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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성형수술을 하고 싶다는 한 여성이 있었다. 차가운 인상을 주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서비스직이었다. 그러니 예뻐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절해 보이기 위해서 성형을 한다는 것이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 때문에 고객들의 항의가 참 많았다는 그녀는 맘고생을 무척이나 한 듯했다.

"Why are you so serious? (뭐가 그렇게 심각해?)"

영화 '배트맨'의 등장하는 인물인 조커처럼 입을 찢어서라도 억지로 웃어야 하는 서비스업계 종사자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저렇게까지 남을 괴롭힐까"

서비스업계 종사자들은 영화 <다크나이트>에 등장하는 인물인 조커처럼 입을 찢어서라도 억지로 웃어야 한다.
 서비스업계 종사자들은 영화 <다크나이트>에 등장하는 인물인 조커처럼 입을 찢어서라도 억지로 웃어야 한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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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병원에서 의료서비스직을 한다는 A씨는 흥분한 보호자에게 뺨을 맞았다. 하지만 폭행으로 고소당해야 할 그 사람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병원 관계자들은 A씨를 보호하기는커녕 이틀 가량의 휴가를 주고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저를 폭행한 보호자를 고소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어요. 쉬쉬하고 조용히 넘어가라고 하더군요.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자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그러니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교육서비스업계에서 일한다는 B씨는 한 달 전 그만둔 학생의 부모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유인 즉 한 달 전에 B씨가 아이를 수업시간에 밖으로 내보냈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떠들며 방해하는 학생을 어쩔 수 없이 교실 밖에 5분 가량 세워둔 게 문제가 된 것이다.

원장으로부터 수차례 경고를 받았고 부모님에게도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으나 학원을 그만둔 후 한 달 만에 걸려온 전화는 B씨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B씨는 막무가내로 소리치는 학부모 때문에 잠도 못자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또 다른 서비스업종에서 일을 하는 텔레마케터 C씨는 요즘 욕설과 협박을 하는 고객들 때문에 애가 탄다. 정해진 시간에 받아야 하는 콜수를 채워야 하건만 구입 후 일 년이 지난 물건을 환불해 달라며 욕을 하며 손님이 수화기를 놓지 않는 통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여자라고 만만히 보는 것 같았어요. 욕을 하면 전화를 끊고 싶죠.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아요. 남자인 텔레마케터가 전화를 받으면 그렇게까지 않더군요. 그것 때문에 더 속상했어요."

덕분에 요즘에는 상담내용을 녹취한다는 안내 멘트까지 하고 있으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친절을 강요당하는 마음에는 피멍이 들었다. 인식도 문제지만 막상 일이 터지면 평판 때문에, 소문 때문에 공론화 하기를 피하고 애꿎은 직원들에게 잘못을 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래는 여기까지가 내가 기획했던 기사 내용이었다. 지인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작성하다보니 내가 겪었던 비슷한 상황까지 덩달아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솔직히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저렇게까지 남을 괴롭힐까'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상담창구는 한산했다.
 상담창구는 한산했다.
ⓒ 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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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마 뒤 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몇 주 전,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볼 일을 위해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 허락된 터라 마음이 급했다.

'사람 많으면 다음에 만들어야지.'

그런데 웬일로 은행은 한산했다. 번호표를 뽑으러 가기 민망할 정도였다.

'접수번호 406번. 대기인수 0명.'

창구에서 이미 볼 일을 보고 있는 아주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을 제외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나, 단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금방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이야기는 점점 길어지는 듯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은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은행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방문하신 지점이 제1금융권인지 몰랐다고 하면서 이율이 너무 낮다며 끈덕지게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했다. 어르신은 통장은 개설하지 않고 싶으니 다른 서비스를 알려달라고 하다가 은행업무와 상관이 없는 정보와 요구를 늘어놓았다. 진땀 꽤나 흘린 직원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나의 눈치를 보던 높은 직책의 담당자는 급기야 직접 나서서 일을 수습하려고 했다.

"무슨 일 때문에 기다리시는 건가요?"
"통장 만들러 왔는데요. 적금통장이요."

그리고 나를 행원이 있는 넓은 곳으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통장발급이 겨우 시작되는 듯했다. 사실 나는 기분이 꽤 상해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점점 통장발급은 늦어졌다. 담당업무가 아니라 방법을 잘 모르는 직원에게 나를 배정했는지 여기저기 전화로 필요한 서류를 물어보느라 점점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사항과 다른 답변을 내놓으며 재차 확인을 하자 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게다가 나중에는 다른 담당자까지 와서 직원이 알려준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며 사과를 했다.

"고객님 괜찮으세요?"
"아니요. 매우 괜찮지 않은데요."

간단한 통장발급에 한 시간이 소요되었고 내게 허락된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신 것 같아 얼른 해드리려고 했는데…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그 직원이 내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연신 빠르게 처리해주려고 했던 걸 알면서도 나는 내 화에 못 이겨 모른 척했다. 실수했다는 것 때문에 자판을 누르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 걸 보고도 외면했다. 그리고 나는 우여곡절 끝에 통장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에 느꼈던 짜증이 화가 점점 이상한 기분으로 바뀌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갈수록 이 복잡 미묘해지는 감정이 뭔지 몰라 주변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그래, 실수했네. 거기서. 근데 별거 아니니까 잊어 버려."
"근데 너도 너무 깐깐하게 군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그랬냐."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좀 지나쳤나 하는 생각도 드는 동시에 점점 그 사람이 나에게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할 정도로 큰 실수를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구나.'

만약 그 직원이 정말 막대한 손상을 입힐 정도로 잘못을 한 거라면 오히려 그 정도로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바로 '진상'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에게 서비스로 감동을 전하겠습니다.'

내가 방문했던 은행에 걸려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이런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어쩌면 지금도 은행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감동적인 서비스를 당연히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일터에서 누군가의 하루를 진땀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이 일이 있은 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조차 또 한 명의 '진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항상 선량한 고객도 항상 완벽한 근로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든 우리는 자리를 바꿔 서로 다른 입장에서 상처를 주고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아프니까 감정노동이다' 공모글입니다.



태그:#진상, #감정노동, #근로자, #고객, #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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