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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4주년 특별기획의 하나로 <행복사회의 리더십>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해 오연호 대표기자가 연재한 '행복지수 1위 덴마크의 비결을 찾아서'의 속편격이다. 덴마크 행복사회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우리는 더 나은 행복사회를 위해 오늘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지를 모색해본다. 이 연재는 2014년 9월 초 단행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자말]
오늘 아침은 어떨까? 적당히 허기진 상태로 호텔 식당으로 내려간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처럼 기대와 설렘이 있다. 색다른 음식, 색다른 조리를 만나기 때문이다. 2014년 1월 하순에 있었던 덴마크 3차 취재 때는 매일 호텔이 바뀌었다. 전국을 렌터카로 이동하면서 취재하다보니 날마다 짐을 싸야했다. 딱 하루만 빼고 열흘 내내 그랬다. 매우 번거로웠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아침 식사가 늘 참신했다. 하루 첫 출발을 설렘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과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침식사 때 얼마나 싱싱한 과일이 있느냐를 가지고 그 호텔을 평가한다. 반면 우유나 치즈, 버터 등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골출신이라 어려서 그런 것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입에 당기지 않는다. 그래서 빵을 먹을 때도 버터를 바르지 않고 그냥 먹는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우유가 과연 인간에게 이로운가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우유제품과 더욱 멀어졌다.

덴마크 최초의 낙농 협동조합을 찾아서

그런데 덴마크만 오면 달라진다. 우유를 먹는다. 우유를 쭈욱 한 컵 들이키면 참 신선하다. 왠지 신뢰가 간다. 내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덴마크 농부들은 소를 키우고, 젖을 짜고, 그것을 식품으로 만들어낸 과정에서 기본을 잘 지킬 것 같은 믿음이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유는 치즈, 버터, 요거트 등 여러 유제품의 재료다. 그런데 덴마크 근현대사를 보면 이곳 농부들은 우유에서 더 중요한 것을 만들어냈다. 바로 '신뢰'라는 가치다. 신뢰야말로 덴마크 농부들이 협동조합을 하면서 생산한 것 중 가장 부가가치가 큰 게 아닐까? 낙농 협동조합이 덴마크 농촌을 경제적으로 살렸다면,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신뢰는 덴마크 사회 전체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덴마크가 오늘날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가 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작은 농가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 1882년 26명의 농민들이 참여한 낙농 협동조합 건물.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작은 농가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 1882년 26명의 농민들이 참여한 낙농 협동조합 건물.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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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4일 오후, 나는 그 신뢰 생산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덴마크에서 맨 처음 낙농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곳. 유틀란트(Jutland)의 중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 예딩(Hjedding)에 도착하니 도로변에 허름한 건물이 하나 서 있다. 단층짜리인 이 벽돌집은 20평 정도 크기로 아담했다. 여기다. 원래 한 농부의 농가였던 이 작은 집이 덴마크를 크게 바꿔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옛날 농부들이 사용했던 낙농 기계들이 그대로 설치돼 있다. 농가에서 수거한 우유를 쏟았던 큰 나무통. 증기엔진이 장착된 보일러, 우유에서 크림을 분리해내는 장치, 크림에서 버터를 만들어내는 곳. 우유에서 치즈와 버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공정을 직접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하나하나가 구경할 만했다.

나는 이 지역 박물관 소속 역사해설가인 샬로테 웨스트(Charlotte West)씨의 안내를 받았다. 1882년 6월 10일 첫 가동된 이 낙농장은 26명의 농민들이 참여한 협동조합에 의해 운영됐다. 그들이 가진 소는 300여 마리.

그런데 농민들은 처음에 어떻게 협동조합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이런 일엔 항상 선각자가 있다. 협동조합을 하자고 동네 농민들을 설득한 이는 청년 스틸링 안더슨(Stilling Andersen)이었다. 샬로테씨는 이 협동조합운동이 그룬트비의 농민고등학교 운동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농민의 아들들이 그룬트비 학교에 들어가 서로 힘을 합하여 농촌을 살려야 한다고 다짐하고 돌아와 협동조합 만드는 일에 앞장섰다"고 했다. 청년 안더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안더슨은 각 농가마다 개별적으로 우유로 버터와 치즈를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공장을 차려 함께 만들면 훨씬 쉽게, 그리고 더 많은 수익을 얻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농민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동네에서 소를 키우던 농가의 3분의1은 협동조합 방식에 의문을 표시하고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 100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었다. 안더슨은 만약 그들이 손해를 보면 개인적으로 배상해주기로 하고 우유 원료를 받았다. 처음엔 그렇게 비조합원으로 참여한 것이다.

농민들의 대발견 '협동하면 이득이 된다'

기회는 위기에서 온다. 만약 당시 덴마크 농촌이 위기에 처해있지 않았다면, 그냥 잘 살았다면 협동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만큼 큰 에너지는 없다.

1880년대는 때마침 덴마크 농촌이 궁핍 속에서 일대 전환을 겪는 중이었다. 그동안 곡식을 재배해 수출하는 것이 주요 수입이었는데, 미국과 우크라이나에서 값싼 곡식들이 영국 등 유럽시장을 장악하자 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래서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곡식에서 가축으로 주 종목을 바꾸는 중이었다. 소, 돼지, 닭에서 나오는 버터, 치즈, 베이컨, 계란이 덴마크 농민들의 생명줄을 쥐게 됐다. 이렇게 전환기에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협동조합 방식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협동조합 운동은 덴마크보다 영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1844년 영국 멘체스터의 한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은 일용품을 싸게 사기 위해 얼마씩 자금을 모아 소비조합을 만들었다. 이것이 협동조합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덴마크에서는 1866년 첫 소비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소비가 아닌 생산 협동조합은 그보다 늦어 1882년에야 낙농 협동조합이 이 예딩(Hjedding)에서 시작됐다.

신기한 것은 후발주자 덴마크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한 번 불이 붙더니 일시에 확 확산됐다는 점이다. 낙농협동조합은 1년 만에 인근지역에서 10개로 늘어났다. 그런데 8년 후인 1900년에는 덴마크 전역에 900개 이상이 만들어졌다. 들불 같았다. 1930년에는 1400개로 늘어났는데 무려 20만 여 명의 농민이 참여했다.

1950년대가 되자 덴마크 우유생산 농가의 약 90%가 이 낙농 협동조합에 참여했다. 왜 그랬을까? 샬로테씨의 답은 간단했다.

"협동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협동하면 이득이 된다! 이것보다 더 매력적인 참여동기가 있을까?

협동조합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다

 “우유제품 생산의 혁신이 여기서 일어났다” 지역 박물관에 근무하는 샬로테씨가 설명을 하고 있다.
 “우유제품 생산의 혁신이 여기서 일어났다” 지역 박물관에 근무하는 샬로테씨가 설명을 하고 있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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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농 협동조합의 출현은 여러 가지로 혁명이었다. 우선 고된 노동이 줄어들었다. 소를 키우던 농가가 집에서 일일이 손으로 우유제품을 만들었는데, 이제 스팀엔진이 장착된 기계로 처리한 것이다. 우유에서 버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공정은 우유에서 분리해낸 크림을 휘저어 버터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개별농가에서는 그 휘젓는 일을 주로 여성이 담당했는데 매우 고된 노동이었다. 그렇게 집에서 혼자 하면 이틀 걸리던 일이 낙농장에서는 1시간 만에 처리되었다.

생산량은 물론 품질도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협동조합은 집단지성을 만들어냈다. 직접 투표로 낙농장을 가장 잘 운영할 만한 사람을 지배인으로 뽑고, 지배인은 품질 관리인을 고용했다. 제품은 질이 높게 표준화되었다. 조합원들은 더 큰 연대가 더 큰 이득을 준다는 것도 체험했다. 동네 협동조합은 지역협동조합으로 묶이고 지역들이 모여 전국낙농협동조합을 결성했다. 전국단위에서는 수출경쟁력 등을 책임졌다. 그래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던 영국에 효율적으로 수출할 수 있었다.

사실 낙농협동조합이 생기기 전까지 덴마크 농민들은 자기들이 생산한 유제품을 바로 영국으로 수출하지 못했다. 독일로 넘겨 그곳에서 표준화과정을 거쳐 독일 상표를 달고 갔다. 독일이 중간마진을 챙긴 것이다. 그러나 협동조합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특히 전국낙농협동조합이 생기면서 독일을 거치지 않고 직접 영국시장에 진출했고 그것이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낙농 협동조합은 처음부터, 그리고 이후에도 덴마크 농민들에게 글로벌 마켓을 늘 고려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영국, 독일, 미국, 우크라이나 시장을 분석해야 했다. 이것은 농민들의 시야를 넓게 해주었다. 덴마크 농민들이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기업인이나 노동자로 전환할 때도 이런 노하우는 그대로 이어졌다. 에너지 관련 기업 댄포스(Danfoss)와 어린이 장난감 기업 레고(Lego)는 모두 1920년대에 덴마크의 농촌에서 출발한 기업인데 이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다.
   
부농과 빈농, '서로 인정'하며 신뢰 구축

나는 샬로테씨의 설명을 들으며 낙동장 안을 돌다가 덴마크 협동조합운동에서 리더는 누구인지가 궁금했다. 교육계의 그룬트비나 콜처럼 중심 인물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는 특별한 한 사람을 지목하지 않았다. 물론 이곳 예딩에서 스틸링 안더슨이 주도를 한 것처럼 지역별로 앞장선 자는 있으나 교육계의 그룬트비와 같은 무게로 중심 인물이 거론되지는 않았다.

샬로테씨는 말한다.

"주도한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다. 참여하는 농민 모두가 주인이었다."

듣고 보니 그 말이 참 맞다. 샬로테씨가 건네준, 이 낙농장에 대한 영문자료집에는 당시 조합원들이 이런 구호를 가지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이 협동조합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절묘한 타협이 이뤄졌다. 협동조합은 1인1표였다. 소를 아무리 많이 가져도, 단 한 마리만 가져도 의결권은 똑같이 한 표였다. 부자는 돈이 많다고 조직을 주도하지 않았다. '소의 머리 수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 수로 의결한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주식 수대로 의결권이 정해지는 미국식 자본주의 회사의 운영형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부자가 포용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를 동지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협동조합이다. 반대로 가난한 자는 부자를 인정한다. 열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원료가 되는 우유를 10배 더 투자하니 수익도 그에 비례해 10배로 가져갔다. 물론 관리운영비도 10배로 낸다. 신뢰는 이렇게 '서로 인정'하는 타협 속에서 나왔다.

 농가의 우유를 수거해 낙농장에 옮기는 과정. 우유통의 무게와 우유의 농도를 체크해 우유값을 정했다.
 농가의 우유를 수거해 낙농장에 옮기는 과정. 우유통의 무게와 우유의 농도를 체크해 우유값을 정했다.
ⓒ fynhistorie.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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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는 공정한 관리에서도 형성됐다. 각 농가에서 가져온 우유통은 낙농장에 들어올 때 빠짐없이 하나하나 엄격하게 무게를 달았다. 그리고 샘플을 채취해 농도를 쟀다. 그 무게와 농도에 따라 우유값을 달리 지불했다. 투명한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노력한만큼 인정받는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신뢰는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 궁금했다. 최초의 낙농 협동조합이 왜 여기서 탄생했을까? 수도 코펜하겐이나 그 인근이 아니고 왜 유틀란트의 중서부에 있는 자그마한 시골에서 만들어졌을까? 샬로테씨는 "오히려 코펜하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능했다"고 말한다.

"수도는 중앙의 입김이 센 곳이지 않는가? 여기는 지방이어서 중앙정부의 영향이 덜해 무엇이든 자유로운 시도가 가능했다." 

협동조합 천국에 협동조합 법이 없다?

그래서일까? 덴마크의 협동조합은 출발부터 철저히 민간 주도로 이뤄졌다. 정부에서는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다. 낙농 협동조합이 초창기 한창 발전할 때 정부에서 한 것은 왕립농업대학이나 농업연구소를 통해 관련기술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을 뿐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덴마크엔 협동조합법이 없다.

나는 처음엔 그게 믿기지 않았다. 협동조합의 나라에 협동조합법이 없다니. 그래서 그들에게 몇 차례나 물어봤는데 정말 없었다. 조합원들끼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총회에서, 그곳에서 만든 정관만으로도 모든 것이 다 결정되고 작동되는데, 굳이 국가가 나서서 법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당황한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그렇다. 일찍이 1920년대에 일본에서는 덴마크 협동조합을 배우자는 붐이 일었는데 이때 시찰단으로 덴마크에 갔던 한 공무원도 그랬다고 한다. 그는 여기저기를 아무리 뒤져도 협동조합법을 찾지 못해 난감해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야 협동조합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지난 2011년 말 국회에서 협동조합법을 만들고 서울시 등에서 협동조합 상담지원센터 등을 만들어 그 긍정성을 적극 알리면서부터다. 뒤늦게나마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다행스럽지만, 한편으로 관의 지원없이 이런 바람이 불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과연 길게 갈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자발적 참여가 있어야 오래 가고 널리 퍼진다. 덴마크에는 생산, 판매, 신용, 구매 등 각종 협동조합이 있다. 농민 한 명은 다양한 조합에 중복 가입돼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일을 시작할 때 미국 농부는 기계를 먼저 생각하고 덴마크 농부는 협동조합을 먼저 생각한다."

농촌에서 시작한 협동조합 운동은 도시로, 전 덴마크인의 삶 속에 스며들었다. 우유로 만들어진 신뢰의 실핏줄이 덴마크 사회를 살찌우고 있다.

기념비 "함께 하니 새 길이 열렸다"

  “우리가 해냈다” 최초의 낙농 협동조합을 만들어 성공한지 50년이 지난 1932년 이를 기리는 기념비를 뒷마당에 세웠다.
 “우리가 해냈다” 최초의 낙농 협동조합을 만들어 성공한 지 50년이 지난 1932년 이를 기리는 기념비를 뒷마당에 세웠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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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농장 안을 돌아본 후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겨울바람이 세차다. 뒷마당으로 갔더니 커다란 돌 기념비가 서 있다. 1932년, 그러니까 이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지 50년 만에 세워진 기념비다.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예딩에서 덴마크 최초의 낙농 협동조합이 세워졌다. 이곳 농부들의 협동으로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덴마크를 위해서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냈다."

더불어 함께 하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언인가. 처음 협동조합을 만들 때 26명의 농부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이 마을뿐 아니라 덴마크 사회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까?

'우리가 해냈다'는 글귀 양옆에는 클로버 잎들이 그려져 있다. 귀엽고 발랄한 것이 축하의 꽃다발 같다. 그런가 하면 농부들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린 즐겁게 일했고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고 노래하면서.

나는 덴마크어로 된 그 기념비 앞에서 묵념하듯 눈을 감았다. 세찬 겨울바람은 계속 불어대는데 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우리나라에서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은 많이 해봤지만 이국 땅에서, 먼저 가신 덴마크 농부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 고개가 숙여지다니.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덴마크의 협동조합들을 현지에서 둘러보고 감동해 경의를 표한 한국인은 전에도 있었다. 1950년대 초에 덴마크 농촌을 방문했던 당시 서울대 농대 유달영 교수는 <새 역사를 위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인류사 위에 이 고귀한 실험을 성공해 준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여 마지 않는다."

바로 그거였다. 내가 그 돌 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한 것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어서였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이 시대에, 천박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덴마크 농부들의 "고귀한 실험"은 더욱 우러러보인다. 전쟁과 반목과 궁핍으로 점철된 우리 인류사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증명해보인 사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오연호 대표 기자가 연재했던 <'행복사회의 리더십'-'행복지수 1위 덴마크 비결을 찾아서'>가 2014년 9월1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오연호 대표 기자가 연재했던 <'행복사회의 리더십'-'행복지수 1위 덴마크 비결을 찾아서'>가 2014년 9월1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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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