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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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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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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의 진리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거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한신프)는 한 발도 못 뗐다. 이제 겨우 이산가족 상봉 한 번 한 것으로 국민들에게 통일에 대한 환상을 심으면 안 된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그림을 크게 그리고 있는 것 같다"는 질문에 정세현(70) 전 통일부 장관(원광대 총장)이 한 일갈이다.

'통일대박론'과 남북고위급 접촉에 이은 이산가족 상봉, 통일준비위원회와 새로운 통일론까지, 이 일련의 과정을 진단하는 데 그만큼 적합한 이도 많지 않다.

박정희 정부시절인 1977년 통일부에 들어가 전두환 정부에서 남북대화 실무를 맡았고, 김영삼 정부에선 3년 반 동안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일했으며,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통일부 장관과 노무현 정부의 첫 통일부 장관을 끝으로 정부를 떠난 뒤에도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으로 남북 관계 현안을 짚어왔다.

"현 정부, 통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지난 4일 전북 익산 원광대 총장실에서 한 인터뷰와 5일 전화통화에서 정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의 '통일 드라이브'에 대해 "통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한꺼번에 쏟아놓고 대박이라고 한다"고 우려했다.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실질적인 교류협력부터 하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북핵문제와 관련해 "이 정부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핵문제에 대해 조바심 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북핵능력 강화는 개발에 필요한 경비의 문제가 아니라 개발에 필요한 시간의 문제"라며 "북한에게 이렇게 시간을 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한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정 전 장관과 나눈 일문일답 전문이다.

- 한미 군사훈련 기간에는 일체의 접촉을 하지 않아왔던 북한이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대가에 대한 약속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 뒤에 더 많은 진전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이면합의 해줄 수 있다고 본다. 나쁘지 않은 거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북한이 우리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속된 말로 국물도 없다'고 했다는데, 이건 뒤집어보면 북한과 한 약속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전반적인 정황을 보면 뭔가 물밑접촉이 있었던 것 같은데, 류 장관 발언에 비춰보면 거기서 한 약속이 어그러진 게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산가족 상봉은 어차피 공짜로 안 된다. 우리에게는 인도적 문제지만 북에는 체제부담이 큰 정치 문제다. 사전 교육도 시켜야 하고, 생활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상봉자들이 상봉에서 받는 충격도 엄청나다. 이건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번질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에 소극적인 것이다. 

북한이 이런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이산가족 상봉에 나올 수 있게 하려면 그걸 뛰어넘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주워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16차례의 (대면)상봉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이 쌀, 비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명박 정부 때 단 1회뿐이었던 것은 기대를 걸고 응했다가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 입장에서도 한신프를 내걸었지만, 말만 앞서고 별 성과는 없는 것이 부담스러울 거다. 때문에, 지난번 협상 때 북의 전향적 태도변화를 전제로 지원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본다."

- 박근혜 대통령이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제안했다. 뭔가 물밑교감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박 대통령이 연간 상봉 규모가 6천 명 정도는 돼야 한다고 했다던데, 국가의 최고책임자가 이 정도 얘기를 하면서 근거없이 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산상봉의 상시화, 대규모화에 대해 물밑에서 상당한 의견접근이 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더라. 만약 그렇다면 이건 참 좋은 일이다. 이산가족 상봉이 박 대통령이 말한대로 현실화되면 한반도 상황이 굉장히 안정되는 것이다."

- 신년사부터 이산가족 상봉까지 북한의 남북관계 개선 의사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신년사를 보면 농업문제를 1번으로 제기했고, 그 다음에 바로 축산문제가 나왔는데, 결국 먹는 문제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식생활에서 이전 정부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북은 의식주가 아니라 식의주라고 한다. 만성적인 식량부족국가다. 북은 이 때문에라도 대남, 대미, 대일 관계 개선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다 어려워진다. 관계가 나쁜 상황에서는 북한의 작은 군사조치에도 제재가 나올 수 있다.

'장성택 사건'이후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했을 것이다. (중국이 북한을)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는 좀 달라졌다고 본다. 장성택 죄목 중에 지하자원과 나진-선봉(경제특구)을 헐값에 팔아먹었다는 게 있는데, 중국으로서는 매우 기분 나쁜 일이다. 북중 경협에 당분간 중국이 적극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에 학교일로 베이징에 갔다가 북·중관계 전문가들을 만났는데, 중국이 당분간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대해 깐깐하게 하려는 것 같다고 들었다. 중국에 와 있는 북한 업체들에 대한 규제가 심하고, 교역물자들도 세관에서 전수 조사한다고 하더라."

- 지난해 개성공단 폐쇄 후 재가동, 이번 이산가족상봉 전격 성사를 놓고 '박근혜의 원칙'에 북이 굴복했다는 평가들이 적지 않다
"저차원적인 분석이다. '이보전진 위한 일보후퇴'라는 말도 있다. 우리도 전략적으로 일본에, 미국에 물러설 때가 있지 않나. 일시적으로 유연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하다.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 '북한 붕괴' 생각하는 건 아닌 듯"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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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 '통일대박' 발언을 처음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2015년 자유민주주의 통일' 발언과 '장성택 사건' 뒤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정부 사람들이 북한 붕괴를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판단이었다. 거기에 <조선일보>의 '통일은 미래다' 기획시리즈까지 나오지 않았나.

그런데 요즘은 그건 아닌 것 같다. 오늘(4일) 국무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통일과정과 통합과정까지 잘 관리하기 위해 통일준비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했다. 외형적-정치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통일(unification), 내면적-문화적으로까지 하나가 되는 것은 통합(integration)이라고 한 것 같은데, 개념은 정확하게 쓴 것 같다. 결국 통일이라는 게 시간이 걸리는 문제고, 대박은 한참 후에 터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다만 '남북한이 통일되면 세계가 대박'이라고 한 건 좀 과한 것 같다. 주변 국가들은 통일의 원심력으로 작용하기 쉽다. 친미통일이면 중국이 반대하고 친중통일이면 미국이 반대 하게 돼 있지 않나. 친미통일을 해도 그 통일국가는 일본에게는 살갑게 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일본은 실제 우리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 통일대박 발언에 이어 고위급접촉, 이산가족 상봉성사, 통일준비위원회까지 나왔다. 박 대통령 쪽의 '속내'를 어떻게 봐야 하나.
"대붕(大鵬)의 뜻을 어찌 연작(燕雀)이 알겠나.(웃음) 그런데 일단 통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통일은 민족문제인 동시에 국제문제다. 이런 양면성 때문에 남북만 좋다고 통일이 되는 게 아니고, (미·일·중·러) 4국이 통일하라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민족문제 중시론자들은 극단적으로 화해협력 지상주의자가 되고, 국제시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북한의 변화, 북한의 개혁개방은 북한이 먼저 도발하지 않는 한 미국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야 가능하다.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개방도 그렇게 해서 됐다. 다른 여러 나라가 개방개혁하라, 변화하라고 고함지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북미 관계 개선이 핵심이다."

- 그런 접근법에 대해, 결국 통일을 먼 미래 일로 제쳐 놓으면서 젊은 세대의 관심권에서도 멀어지게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평화부터 정착돼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에 '선(先)평화 후(後)통일'이라고 했다. 평화를 위해 안보, 안보를 위해 군사정권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가버렸지만. 개념자체는 맞았다. 오히려 북한이 평화와 통일을 섞어버렸는데, 고려연방제가 그거다. 정부가 하나라는 것부터 선언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통일부터 먼저하고 평화는 관리하면 된다는 건 포퓰리즘이다. 남북 간 교류·협력을 지속하다보면 민족 내부의 통일구심력이 커진다. 통일은 그 구심력이 원심력을 밀어내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반대로 원심력이 커져서 우리가 분단된 것 아닌가."

- 통일준비위원회에 새로운 통일론까지 나오는데, 정부는 그림을 크게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그건 좋은 일이고 환영한다. 그런데 불변의 진리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거다. 첫발도 못 뗐는데, 엄청난 그림을 그리고 있다. DMZ평화공원 좋은데 북한 동의가 필요한 것 아닌가. DMZ평화공원은 그 지역만 군대와 무기를 철수할 수 있나. 정전협정을 고쳐야 하고 그러려면 평화협정까지 가야 한다.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한꺼번에 쏟아놓고 대박이라고 하고, 입구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출구 얘기가 너무 많다. 한신프는 한 발도 못 뗐고, 이제 겨우 이산가족 상봉 한 번 한 것으로 국민들에게 통일에 대한 환상을 심으면 안 된다."

- 현재 정부에서 말하는 통일준비위원회는 어떤 조직이 될까. 전례를 갖고 짚어본다면.
"민주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전신이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인데, 내가 통일원에 공산권연구관으로 있던 1980년에 이범석 장관 지시로 그 준비를 했다. 헌법기관으로 대통령의 통일에 대한 관심을 과시하고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대응한다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그래서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대응하는 단체로 위상을 생각하고 독일 운타일바레스도이치란트(Unteilbares Deutschland 분단될 수 없는 독일), 대만 광복대륙설계위원회,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같은 기구들의 장점을 연구했다.

나는 순수민간단체로 만들어서 북한에 대해 잘 아는 명망있는 민간지도자를 책임자로 모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직접 의장을 맡을 것이고, 전두환 대통령을 선출한 대통령선거인단 5000명을 기본으로 하고 직능단체 인사들 5000명, 약간의 해외동포 대표들을 포함시키라는 지시가 왔다.

결국 통일정책자문보다는 정부 통일정책을 국민과 해외동포에게 홍보하는 기능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통일문제와 관련해 국론을 하나로 모으겠다고 민주평통을 만들었는데, 지금 통일준비위원회는 뭔가. 나로서는 아직은 방향이나 개념을 잘 모르겠다. 그리고 통일부는 뭔가, 통일준비위원회 사무국 역할을 하는 것인가."

"북핵문제 어물어물하면, 박근혜 정부의 역사적 책임문제 나올 것"

- 박 대통령은 "통일로 가는 길은 북한의 핵포기가 빠를수록 앞당겨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실제 행동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정부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핵문제에 대해 조바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6자회담이나 핵관련 북미회담이 없을 때 절대 놀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실 미국은 북이 핵무기 10여 개를 갖고 있어도 겁날 게 없다. 일본도 한반도 유사시 핑계로 자위대 해외출병 명분을 삼을 수 있기  때문에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몹시 바라던 바임)인 상황이다. 중국도 북이 핵을 가지면 골치는 아프겠지만 그걸로 중국을 위협하겠나.

그러나 우리는 그게 아니다. 우리는 북한한테 핵멱살 잡히게 된다. 그런데 한미공조라는 명분으로  북한의 '진정성 있는 선행동'만을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든 6자회담을 빨리 재개시켜서, 싼값에 북핵문제를 풀어야 한다. 북한에게 이렇게 시간을 주면 나중에 크게 후회한다.

북핵능력 강화는 개발에 필요한 경비의 문제가 아니라 개발에 필요한 시간의 문제다. 이렇게 어물어물하다간 박근혜 정부의 역사적 책임문제가 나올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북대화보다 북핵 6자회담이 더 빨리 열려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북핵문제를 풀지 않는 상황에서 5.24조치를 해제할 수 없다고 한다. 답답한 노릇이다."

- 민주당에서는 국민통합적 대북정책을 만들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민주당도 참!(한숨) 비현실적인 얘기다. 북한은 통일의 상대방이지만 동시에 군사적 적대자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국민통합을 이루어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국민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극보수-보수-중도-진보-극진보로 갈려 있는 현실을 무시한 얘기다. 철학과 의지를 갖고 비난과 반대를 무릅써 가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통해서 국민들을 그때그때 설득해서 끌고 가야 하는 게 대북정책이고 남북관계라고 본다. 국민통합적 대북정책, 목표로서는 멋지지만 처음부터 국민통합적 대북정책은 만들기 어렵다고 본다."


태그:#통일대박, #정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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