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호주 브리즈번에서 한인 세 명이 잇따라 사망했다. 사망자 셋 모두 한국인 '워홀러'였다. '워홀러'란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 등 외국에 와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사망 사유는 모두 달랐지만, 사망 사건이 잇따르면서 호주 워킹홀리데이 실태가 이슈화됐다. 영어권 나라 중 캐나다·뉴질랜드·아일랜드 등도 우리나라와 청년 워킹홀리데이 협정을 맺고 있지만, 호주는 비자 발급 절차가 간단해 한국청년들이 특히 많이 오고 있다.

나는 지난 2월 초까지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 멜버른(Melbourne)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소위 '워홀러'라고 불리는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회사 동료, 프로젝트를 통해 만났던 한국 출신들은 국적이 호주나 뉴질랜드여서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었다. 살던 동네에도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시티'(City)라고 부르는 시내 중심가에 나갔을 때, 그곳을 동네 주민처럼 다니면서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20대 초반 사람들을 보면 '워홀러인가 보다' 하고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진짜배기 한국인 워홀러가 호주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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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커들은 긴소매, 긴바지에 모자를 쓰고 일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 가리지 않으면 심하게 탈 뿐만 아니라 따가울 정도다. 위 사진은 커팅(Cutting)하는 날. 워커들은 장갑을 끼고 손에 낫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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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비자를 취득하기 위해 나와 내 친언니가 닿은 딸기농장. 이곳 워커(Worker, 노동자)들의 하루는 오전 5시부터 시작됐다. 오전 4시 40분께부터 여기저기 휴대전화 알림이 울리기 시작하면 한두 명씩 깨어나 급히 세수하고 시리얼이나 빵으로 아침을 때웠다.

각자 어제 씻어서 말려둔 작업용 운동화나 장화, 햇볕을 가리기 위한 모자를 챙겼다. 뜨거운 햇빛 아래서 예닐곱 시간을 일해야 하기 때문에 주로 긴소매에 긴 바지를 챙겨 입었다. 아무리 졸려도 선크림을 바르는 건 필수다.

오전 5시 20분,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10년 이상 굴러다닌 것처럼 보이는 15인승 승합차는 12명이 앉을 수 있는 차로 개조돼 있었다. 제일 뒷좌석에 여성 네 명이 끼어 앉아 13명이 한 차를 타고 일터로 갔다.

호주는 앞좌석뿐만 아니라 전 좌석이 안전벨트를 착용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을 경우 운전자가 아닌 안전벨트 미착용 당사자가 벌금을 낸다. 하지만 안전벨트 수는 사람 수보다 적었다. 워커들은 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농장으로 갔다. 양봉장, 소농장, 말농장을 지나며 고속도로를 한 시간쯤 달리자 멜버른 인근 관광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딸기농장에 도착했다.

작업 지시는 한국어와 중국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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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커들은 트롤리(Trolley)라고 불리는 것을 타고 딸기를 딴다. 발로 밀어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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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오전 7시쯤 시작됐다. 딸기농장 한쪽 끝에 놓여 있는 트롤리(짐수레)를 각자 한 대씩 끌고 딸기밭으로 갔다. 슈퍼바이저(Supervisor, 감독관) 진지희(26, 가명)씨는 "트레이(바구니) 챙기세요!"라고 소리쳤다. 이어지는 그녀의 지시.

"오늘은 2번부터 4번, 5번부터 9번까지 쭉 할 거예요! 저 끝에부터 들어가세요!"

보통 업무 지시는 한국어로 한 번, 중국어로 한 번 이뤄졌다. 가끔 컨트랙터(Contractor, 하도급 계약자)가 영어로 업무지시를 할 때도 있었지만, 종종 적절할 표현을 찾지 못해 슈퍼바이저들을 시켜 한국어와 중국어로 워커들과 소통했다(이 농장 슈퍼바이저 두 명 모두 중국어가 가능했다). 이은경(18, 가명)씨는 "호주에 와 있는 것 같지 않다"면서 "영어보다 중국어를 더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컨트랙터는 농장 두 곳을 관리했다. 오전에 와서 작업을 지시하고, 다른 농장에 들렀다가 오후 늦게 다시 우리 농장에 오곤 했다. 실질적인 작업 관리는 슈퍼바이저 몫이었다. 슈퍼바이저 진지희씨는 낫을 들고 일터 곳곳을 누비며 잡초나 마른 딸기 줄기를 정리하며 워커들의 일을 감독했다.

그녀는 "빨리 빨리 하세요" "미스(miss)내지 마세요" "트레이 들고 나와서 여기 미스난 거 다시 따세요" "잡담하지 마세요" 등 같은 지시를 한국어와 중국어로 반복했다. '미스'는 익은 딸기를 안 따고 지나간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또다른 슈퍼바이저 김민철(24, 가명)씨는 워커들이 딸기를 채운 트레이를 받아 각 워커들의 작업량을 입력하고, 딸기 트레이를 다음 작업 장소로 내보내는 일을 했다.

초보인 우리는 딸기 따는 법부터 배웠다. 슈퍼바이저는 구수하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딸기에 대해 설명해줬다.

"이거 보이시죠? 풀 레드(Full Red), 풀 레드. 이게 따야 되는 딸기예요. 이건 좀 거뭇거뭇하죠? 이런 건 브루즈(Bruise, 멍)예요. 브루즈 난 건 버리세요. 이건 못 팔아요. 이건 그린팁(Green tip, 딸기 끝 부분에 덜 익은 녹색 영역)이에요. 그린팁이 너무 큰 건 아직 따면 안 돼요. 이 딸기는 그린색이에요. 이건 아직 못 먹어요.

이런 건 하루이틀 뒤면 익으니까, 그때 따면 돼요. 아직 따지 마세요. 이건 못생겼죠? 당신이라도 이런 건 안 사겠죠? 이건 어글리(Ugly). 이런 건 따서 버리세요. 딸기 딸 때 쥐어뜯지 마시고요. 이렇게 손으로 살짝살짝 따세요. 딸기에 가능한 손대지 마세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시고요. 오늘 첫날이니까 한 로우 반부터 해볼게요. 여기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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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롤리를 타고 딸기를 따고 있는 모습. 트롤리 위에 놓은 플라스틱 박스가 트레이다. 검은 부분은 베드, 두 베드 사이를 로우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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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들 다리에 멍을 달고 살았다. 종아리에 멍드는 건 필수였다. 허벅지나 팔 등은 사람에 따라 멍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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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바이저가 한 로우 반이라고 부르는 지점을 가리켰다. 딸기가 심어져 있는 검은 비닐 부분을 한 베드(Bed)라고 불렀고, 베드와 베드 사이의 길을 로우(Row)라고 불렀다. 구역에 따라 한 로우는 20~70m가량 됐다. 트롤리를 타고 들어가면서 양쪽 베드의 딸기를 따고, 트롤리를 180도 돌려서 타고 나오면서 또 양쪽 베드에서 작업했다. 보통 이렇게 두 로우를 작업했다.

워커들에게 딸기는 곧 돈이었다. 트레이 개수만큼 돈을 받기 때문에 모두들 트레이를 하나라도 더 채우기 위해 열심히 딸기를 땄다.

나는 배운 대로 홀로 작업을 시작했다. 트롤리를 뒤로 밀었는데, 운전이 쉽지 않았다. 트롤리 한쪽에는 바퀴가 두 개가 있는데 다른 한쪽에는 바퀴가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로우를 타고 가다가도 몇 번씩이나 트레이 방향을 다시 잡아줘야 했다. 거리 조절을 잘못하면 종아리에 트롤리가 부딪히기 일쑤. 부딪힌 부분이 이내 아프기 시작했다. 전날 본 다른 워커들의 종아리 뒤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밥 먹는데 '빨리빨리' 소리 들리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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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이에 담은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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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힘을 다해 트롤리를 굴리며 딸기를 따다 보니 금세 낮 1시가 됐다. 슬슬 허기를 느낀다. 한창 배가 고플 시간인데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먹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첫날이라 어리바리하고 있는 우리에게 수미(가명)씨는 "도시락은 오전 11시에서 낮 2시 사이에 알아서 먹어야 한다"면서 "딸기 로우(Row) 제일 앞쪽 아니면 제일 끝쪽에 잠깐 멈춰서 먹으면 된다"고 귀띔해줬다.

한 로우를 끝내고 다른 로우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트롤리를 멈춰두고, 작업용 의자에 그대로 앉아 밥을 먹는 식이었다. 몇몇 대만 워커들은 딸기 로우 입구에 트롤리를 세워두고 빨간 딸기물과 거뭇한 흙이 묻은 손을 씻지도 못한 채 급하게 쿠키나 도시락을 먹었다. 아직 농장일에 익숙해지지 않은 우리는 가져온 바나나를 먹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급하게 먹는 사람 절반, 안 먹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수미씨도 첫날에는 도시락을 싸왔단다. 그런데 수미씨가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 슈퍼바이저가 "빨리 빨리 하세요!"라며 작업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했다. 수미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밥 먹는데 '빨리 빨리' 소리가 들리면 먹던 게 넘어올 것 같다"며 "첫날 이후 도시락을 싸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워커들은 그런 말을 들으며 밥을 먹기보다 안 먹는 편을 택했다. 최지민(18)씨도 "목마르면 딸기를 먹는다"고 말했다. 이수찬(18, 가명)씨도 "배고프면 딸기를 먹는다, 하루에 20개는 먹는 것 같다"고도 전했다. 물론 워커들은 돈이 되는 예쁜 딸기가 아니라, 꼭지가 잘못 떨어져 돈이 되지 않는 딸기, 상품성이 없는 딸기를 먹었다.

이후 슈퍼바이저 진지희씨에게 "점심 안 드세요?"라고 물어봤다. 그는 "저희는 아월리(Hourly, 시간제) 잡(Job)이니까 밥 먹으면 안 돼요"라고 답했다.

휴식시간·점심시간 등 쉬는 시간도 없이 아침에 작업 지시를 받은 뒤부터 딸기밭이 펼쳐진 방향대로 움직이며 딸기를 따 담았다. 가끔 추가 전달 사항이 있으면 하루에 한두 번씩 로우 바깥쪽에 모여 슈퍼바이저의 설명을 들었다. "딸기 큰 거랑 작은 거 잘 구분하세요"라는 설명.

큰 딸기는 슈퍼마켓에, 작은 딸기는 카페에 디저트용으로 판매됐다. 하루는 지름 2cm 정도 구멍이 뚫린 플라스틱판을 가져와서 "이 구멍에 들어갈 정도면 작은 딸기, 그게 아니라면 큰 딸기"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핸드피킹과 커팅, 벌서는 기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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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너(Runner)라고 불리는 삐져나온 딸기줄기를 쳐내는 작업 중인 모습. 바닥 곳곳에 이미 잘라낸 줄기들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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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핸드' 할게요, 핸드!"

딸기가 많아서 빨갛게 보이던 구역 작업을 모두 마치고, 딸기가 듬성듬성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딸기가 적은 곳은 '핸드피킹(Hand picking)'을 해야 했다. 트롤리를 밀고 들어갔다 나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핸드피킹을 하려면 허리를 90도보다 더 낮게 구부려야 했다.

워커들은 로우 절반도 채 안 돼서 허리를 돌리고 주물렀다. 한 로우를 마치고 다음 로우로 작업하고 나올 때면 2kg가 넘는 딸기 트레이를 한 손에 들고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딸기를 따야 했다.

워커들은 "커팅(Cutting)은 핸드피킹과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워커들은 왕복 100m가량 되는 긴 로우를 따라 걸으며 삐져나온 딸기 줄기인 러너(Runner)를 낫으로 쳐내야 했다. 중간에 허리를 한 번 펴면 다시 숙이는 게 너무 아파서 숙인 채 끝까지 가는 게 낫다는 설명을 들었다.

워커 은경(가명)씨는 "벌 서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워커 수미(가명)씨는 "한 번 허리를 펴면 허리에 서늘한 느낌이 온다, 다시 굽히기 힘들다"면서 "로우 처음부터 끝까지 허리를 펴지 않고 가는 게 상책"이라고 설명했다.

"여기 2번까지 하고 끝낼게요. 딸기 트레이 내시고, 빈 트레이도 반납하세요. 트롤리는 제자리에 갖다 두세요!"

그렇게 딸기 픽킹 작업이 끝났다. 워커들이 작업장에 모였다. "내일은 데이오프(Day-Off, 휴일)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등 그날의 전달사항을 슈퍼바이저에게 듣고 나면 딸기농장의 일과는 끝났다. 일이 끝나는 시각은 보통 낮 2시 정도, 늦으면 오후 서너 시였다. 모두들 지친 몸을 차에 실었다. 시원한 물이나 간단한 요깃거리가 있으면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눠 먹고 쪽잠을 청해야 했다.

샤워 순서는 '눈치게임'

워커들은 땀과 흙에 절은 몸으로 집에 도착했다. 신발을 벗으면 흙이 투두둑 떨어졌고, 흙은 양말 안까지 들어가 있었다. 워커 열두 명에 샤워실이 하나인지라 '샤워 순서'는 눈치게임으로 정해지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다른 워커보다 나이가 많았던지라 "먼저 씻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늘 먼저 씻을 수는 없었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우리도 눈치게임의 멤버가 됐다.

셰어하우스로 돌아온 워커들은 배고 고팠다. 씻고 싶었다. 그리고 졸렸다. 우리를 비롯해 워커들은 본능적인 욕구와 환경의 제약 사이에서 갈등했다. 각자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들은 샤워 순서에서 밀려나면 흙범벅이 된 몸으로 일단 밥부터 먹었다. '씻고 먹자'는 교양은 배가 적당히 고플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오전 5시에 시리얼 한 그릇 먹고 예닐곱 시간의 육체노동을 하고 오면, 기다렸다 씻고 밥을 먹을 인내심 따위는 사치다.

12명이 다 씻고 식사를 마치면, 오후 8시쯤 돼야 집이 조금 조용해졌다. 이 시각이면 몇몇은 거실에 모여 영화나 한국 드라마를 함께 봤고, 몇몇은 각자 방에서 영어 강의를 들었다. 오후 10시면 슈퍼바이저가 "내일 일 나가야 되니 얼른 불 끄고 자라!"고 외쳤다. 농장일은 보통 격일로 있었다. 워커들은 다음날 작업이 있으면 새벽 기상을 위해 일찍 잤고, 그게 아니라면 그날 작업에 지쳐 일찍 잠들었다.

처음 일한 날 저녁. 허리와 팔다리에 근육통이 왔다. 도무지 앉아있을 힘이 없어 오후 8시께 잠시 누웠다가 다음날 점심까지 잠을 청했다.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할 때는 겪어본 적 없는 '꿀잠'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