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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토 아키이치'씨가 쓴 일기
 '무토 아키이치'씨가 쓴 일기
ⓒ MBCD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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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감정기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참혹한 역사를 기록한 일기를 남긴 아버지와 일기를 한국에 기증한 아들. 두 일본인 부자의 이야기가 삼일절 아침 안방을 찾아온다.

MBC는 3.1절인 1일 오전 8시 55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아버지의 일기장>(대전MBC 최영규 PD)을 통해 77년 만에 공개된 일본군 병사의 일기장을 펼친다.

프로그램은 지난 2006년 사망(당시 91세)한 일본인 '무토 아키이치'씨의 일기를 소재로 '전쟁 그 후'의 아버지와 아들이 겪은 마음의 상흔을 그렸다. 무토씨가 중일전쟁에 참전당시 쓴 일기에는 참혹한 전쟁 상황과 함께 중국에 있던 군위안소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그의 아들인  다나카 노부유키씨(63·田中信幸·일본 구마모토현 거주)는 아버지의 일기를 지난 2010년 독립기념관에 각각 기증했다. 일기의 사본은 서울에 있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아버지 무토씨는 사람을 죽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그 아들은 왜 아버지의 '치부'가 담긴 일기를 왜 한국에 공개 기증한 것일까? 화면은 아버지 무토씨의 일기와 아들 다나카씨를 오간다.

총검으로 포로 살해 "넋 나가 밥을 먹지 못했다"

1937년. 다나카씨의 아버지 무토씨는 일본 육군 제6사단 13연대 소속으로 구마모토에 주둔 중이었다. 제대를 몇 달 앞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전선으로 동원됐다.

"기상 후 간단한 체조를 했다. 같은 날 중국군 포로를 처치하러 갔다. (포로들을) 천양에 있는 역 건물 동쪽에 세우고 누마타 소위가 먼저 일본도로 베었다. 그리고 우리 부대원 모두 총검으로 한 번씩 찔렀다" (1937년 9월 2일 무토씨 일기 중에서)

"아버지는 훗날 저에게 '이 날 받은 충격으로 일주일가량 넋이 나가 밥을 먹지 못했다'고 했어요" (다나카씨)

중일전쟁에 참여한  '무토 아키이치'씨와 그가 받은 훈장
 중일전쟁에 참여한 '무토 아키이치'씨와 그가 받은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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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씨는 이후 대학살이 일어난 중국 남경으로 향한다.

"2시까지 경계를 서고 그 후에 여단장을 모시고 남경시를 돌아봤다. 남문대로를 걸어 국민당 정부 청사를 보러 갔다. 거리에 중국군의 시체가 널려있다.'(12월 14일 일기 중에서)

이듬해 인 1937년 2월 21일. 무토씨 일기에는 일본군의 군위안소 운영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

"오늘은 즐거운 외출하는 날이다. 이시카와와 둘이서 먼저 조선 정벌을 하러 갔다. 내 순서는 네 번째였다. 경상남도 출신 토미코.그 다음은 중국 정벌을 하러 갔다. 첫 번째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에코를 만났다. 약간의 소동이 벌어졌고 치에코가 울었다. 너무 불쌍했다."

위안소 출입은 즐거운 외출..."정벌하고 왔다"

"외출하는 즐거운 날이다. 오타쿠로, 이시카와와 함께 세 명이 위안소에 갔다. 일본, 중국, 조선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3월 12일 일기중에서)

일본군들은 위안소 출입을 '즐거운 외출'로, 한국인 등 위안부 여성들을 정벌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훗날 아들 다나카씨는 아버지 일기를 보고 큰 충격에 빠진다.

"어쩔 수 없이 간 게 아니라 3개국 여자를 정벌했다는 식으로 써놓았기 때문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쟁을 놓고 한동안 심각한 갈등을 벌인다. 오랜 시간, 수많은 대화 끝에 두 사람은 화해의 합의에 이른다.

"제가 당신의 전쟁 책임을 함께 지고 가겠다. 그러니까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도 고개를 끄덕이셨고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에게 일기를 건네주셨습니다. 세상에 알리라는 의미였죠.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도록 알려야 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나카씨)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위안부 쉼터' 할머니들과 대면한 다나카 노부유키씨(오른쪽)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위안부 쉼터' 할머니들과 대면한 다나카 노부유키씨(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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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세상을 떴지만 '전쟁 책임을 함께 지고 가겠다'고 약속한 다나카씨는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데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는 1975년 유학생 간첩 혐의로 수감된 재일동포 이철씨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후 구마모토지역에서 평화시민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1989년에 일본국기(히노마루)와 국가(기미가요) 강요반대 시민넷을, 1992년에는 자위대 해외파병 반대시민네트워크를 결성했다.

구마모토현 교육위원회에서 중학교 교과서에서 수록돼 있던 위안부 관련 기록을 삭제하려하자 구마모토현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충남도청이 있는 지역 시민단체에 공동대응을 요청해 온 것도 그다. 또 지역시민들을 대상으로 '독립기념관 역사 연수단'을 구성해 매년 한국을 찾고 있다. 최근에는 구마모토현 현립 중학교 3곳에서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기술한 이쿠호샤판 공민교과서를 부교재로 채택하자 역사 왜곡 교과서라며 채택 무효 소송을 벌이고 있다. 

아들 다나카씨 "전쟁 책임 함께 지고 가겠다"

프로그램은 일기 내용을 중심으로 전쟁 세대가 후대에 남긴 '전쟁 책임'이 무엇인가를 시종 파고든다. 이를 위해 일본 현지는 물론 아버지 일기에 담긴 중국 상해, 남경 등 위안소 현장을 취재했다. 중일전쟁 참전 일본군을 직접 만나 당시 위안소와 위안부들의 생활에 대한 증언도 생생히 담았다. 이 밖에 일본군 내부 문서를 통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일 대사관 앞 수요 집회에 참여한 다나카씨는 "아버지의 전쟁 책임을 저도 함께 져야만 한다"며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는 주장에 맞서 싸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날 방송을 통해 가해자 아버지를 대신해 '위안부 쉼터'를 찾은 다나카씨와 할머니들의 대면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최영규 PD(대전MBC 편성국 제작부)는 "일본 정치권이 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부정하는 등 우경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77년 전 한 일본군 병사의 일기와 그 아들을 통해 전쟁의 진실을 찾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태그:#아버지의 일기장, #삼일절, #엠비씨(MBC), #일본,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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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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