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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4주년 특별기획의 하나로 <행복사회의 리더십>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해 오연호 대표기자가 연재한 '행복지수 1위 덴마크의 비결을 찾아서'의 속편격이다. 덴마크 행복사회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우리는 더 나은 행복사회를 위해 오늘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지를 모색해본다. 이 연재는 2014년 9월 초 단행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자말]
중앙선이 없는 시골길을 30분 이상 렌터카로 달리고 있다. 시골길이라 해서 우리나라처럼 꼬불꼬불한 산길이 아니다. 덴마크에는 높은 산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 높이의 산이 고작 177m이니 시골길도 평지를 마냥 달린다. 그래서 매우 무료하다.

닷새째 계속 렌터카를 몰고 있는 운전자 나를 긴장시키는 유일한 것은 상대편에서 차가 다가올 때다. 그러나 시골길에선 그것도 드물다. 날씨는 오늘도 역시 덴마크다워서 햇볕을 한줌도 보지 못했다. 닷새 연속 햇볕을 못 보니 단념이 되고 내 몸 어딘가에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아주 단순한 것에 가슴이 설레고 있다. 목적지 뢰딩(Rødding)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알려주는 표지판에 적힌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지 않은가? 뢰딩, 그곳에 가면 살아있는 그룬트비들을 만날 수 있다!    

▲ [오연호의 특별취재 리포트]그룬트비의 '살아있는 자식들'을 만나다
ⓒ 오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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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룬트비의 자식들'을 찾아서

덴마크는 왜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가 되었을까? 그 이유를 찾아 덴마크 이곳저곳을 돌다보면 계속 듣게 되는 이름이 있다. 그룬트비. 사실 그를 모르면 덴마크의 오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를 알아야 왜 덴마크가 행복사회가 되었는지를 비로소 알 수 있다. 현재의 덴마크는 그가 그려놓은 설계도 위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정식이름은 니콜라이 프레데릭 세베린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다. 그룬트비는 누구인가? 한 마디로 그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목회자였고, 교육자였고, 정치가였으며 역사가였다. 그런가 하면 시인이었으며 찬송가 작곡가였고, 단행본 저자였다. 또 그는 탁월한 언어학자였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에 우선하여 그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깨어있는 시민'을 만들어낸 사람.

그룬트비(1783~1872)는 한평생을 시민 교육과 계몽에 앞장섰다. 그는 덴마크의 미래는 '깨어있는 시민'에 있다고 보았다. 덴마크는 왕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왕정시대인 1814년에 국가에 의해 초등학교가 의무교육이 되었는데 그룬트비는 국정교과서 중심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못마땅했다. 당시로선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국정교과서 대신 '살아있는 언어'를 중시했다. 학생들에게 위에서부터 아래로 지식을 심어주는 것보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깨어있는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그는 학교는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주도하는 '시민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에 의해 덴마크에서는 국가주도의 교육기관과 별개로 이른바 자유학교들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학교'가 아니었고 '시민의 삶을 위한 학교'였다. 그룬트비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건강한 사회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역동적으로 참여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학생용 자유학교와 성인용 자유학교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차를 몰고 뢰딩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70년 전인 1844년 그곳에서 그룬트비의 정신철학에 입각한 최초의 성인용 자유학교가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서 단지 역사만 접할 수 있다면 나는 덜 설렐 것이다. 오늘도 그 학교에는 학생들이 있고 선생님들이 있다. 그들은 그룬트비 자식들이라 할 만하다. 살아있는 그룬트비다.

청년 80명, 6개월 숙식하며 인생공부

 뢰딩 고등학교의 본관. 1844년 개교했다.
 뢰딩 고등학교의 본관. 1844년 개교했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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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가 행복지수 세계 1위가 된 것이 교육의 역할이 크고, 덴마크 교육의 아버지를 그룬트비라고 할 때, 살아있는 그룬트비들을 만나는 것은 자못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뢰딩 5킬로미터'라는 안내판을 보고 침을 꼬올깍 삼키고 운전대를 고쳐 잡았다. 닷새째 햇볕을 못 본 탓에 다소 처져 있었던 몸이 탱탱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차가 뢰딩의 작은 읍내에 들어섰다. 인구가 1만이 채 안 되는 뢰딩에는 호텔이 딱 하나 있었다. 나는 호텔에 짐을 내려놓는 것을 생략하고 그곳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그룬트비 학교 입구로 차를 몰았다. 2014년 1월 24일 저녁이었다.

학교의 정식 명칭이 눈에 들어왔다. Rødding Højskole. 일반 고등학교와는 다른 성인용 자유학교여서 '청년 인생학교'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룬트비가 살던 19세기에는 농민들이 주요 학생이어서 농민학교라고도 불렸다.

입구를 따라 학교 안으려 들어서려는데 큼지막한 돌로 만든 기념비가 눈에 띈다. 그 돌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89%의 뢰딩 사람들이 덴마크를 원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당시 독일과 국경분쟁을 하고 있던 이 지역이 주민투표로 덴마크에 속하기로 결정한 것을 기념하고 있었다. 이 기념비를 보니 왜 그룬트비가 '깨어있는 시민'을 위한 성인용 자유학교를 맨 처음 이곳에 세웠는지 이해되었다.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였으면서도 덴마크적인 것을 강조했던 민족주의자 그룬트비는 강대국 독일에 저항하는 한 상징으로 이곳에 시민학교를 세운 것이었다.

교장선생님 에릭슨(Mads Rykend-Eriksen)씨는 낮선 이가 학교에 들어서자 오래 전부터 기다린 듯 잔디광장을 가로질러 마중을 나왔다. 그는 학생들이 저녁을 먹고 있는 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20대 초반의 남녀 학생 80여명이 8명의 교사들과 함께 왁자지껄 식사 중이었다. 덴마크 성인들은 대체로 표정이 무뚝뚝한 편인데 이들은 밝고 활달해보였다. 에릭슨 교장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이미 졸업한 학생들인데 대학이나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점검하기 위해 이 학교에 왔다"고 했다. 학생들은 6개월간 기숙생활을 한단다.

21살인 남학생 에베는 고향이 기차로 1시간 거리인데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할지 몰라서 힌트를 얻기 위해 왔다"고 했다. 비슷한 또래의 남학생 한센은 "장차 정치인이 되고 싶은데 준비 차원에서 이 학교에 왔다"고 했다. 덴마크는 사회복지 등이 이미 다 정착이 돼있고 정치도 여야가 서로 타협해가면서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정치에 흥미가 있을까? 그의 답은 "지금도 좋지만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였다.

핵심 공부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학생들은 “그룬트비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그룬트비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말한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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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는 정치, 언론, 음악, 디자인, 공연 등 5개의 학과에서 25개의 수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수업은 있지만 시험도 등수도 없다. 그룬트비 정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룬트비는 학교에서 노트에 필기하고 시험을 쳐서 점수를 얻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교육은 학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극하고 도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학교는 개교 때부터 학생들이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토론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들은 선입견과 스테레오타입에 도전했다. 목표는 이 학교에서 뭔가를 다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학교를 나오면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에릭슨 교장은 "밥벌이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우리가 누구인가를 역사와 문화 속에서 알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학교에서는 지식보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에 학생들끼리의 자치 활동이 매우 중시된다. 전교생 모임과 기숙사 단위 모임이 1주일에 한 차례 30분간 있다. 여기에서 청소당번, 식사당번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논의 한다.

 저녁 식사시간에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하는 교장 선생님
 저녁 식사시간에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하는 교장 선생님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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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문한 날은 금요일 저녁이었는데 학생들이 식사 후에 큰 강당에 모여 조별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맥주병이 놓여진 채로 깔깔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학생들 MT의 한 장면 같았다. 교장 선생님에게 "학교에서 술이 허용되느냐"고 묻자 "금요일과 토요일만 허용되는데 하루에 맥주 몇 병까지 가능한지도 학생들끼리 논의해서 정한다"고 했다.

인생학교라는 점에서 이 '성인용 자유학교'는 덴마크의 학생들이 중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1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설계하는 '애프터 스쿨'과 닮았다. 그러니까 덴마크는 고등학교 입학 전 1년, 대학교 입학 전 6개월을 이렇게 기숙형 학교에 가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험한다. 직장인이 되어 한 직장에 오래 다니다가 전직을 하고 싶을 때는 또 다른 평생교육기관을 선택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인생항로를 점검한다.

이렇게 중요한 선택 전에 나에게 시간적 여유를 준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내 선택의 주인이 되게 한다는 것, 이것이 덴마크를 행복사회로 만드는 중요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신 또한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세 학생 "그룬트비는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

이런 학교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까지 하는 기숙학교여서 공짜가 아니다. 정부와 학생이 반반 내는데 이번 학생들은 4만 크로나, 우리나라 돈으로 약 800만 원을 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은 스스로 벌어서 학비를 마련한단다. 부모로부터 자립 훈련을 그렇게 시작한단다. 식사를 마치고 한 테이블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6명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부모가 대준 사람이 있냐고 물으니 모두 고개를 저었다.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온 여학생 마리아는 19살인데 "4만 크로나를 벌려고 식당에서 몇 달간 하루 8시간씩 종업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단다. 개강한 지 3주밖에 안되었지만 마리아는 "우리가 벌써 식구처럼 친구가 되었다"고 만족해했다. 그는 여러 평생교육기관이 있지만 이 학교를 택한 이유를 "그룬트비 정신이 살아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룬트비는 여전히 우리 마음에 있다."

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룬트비가 개교식 때 이 학교에 왔냐고 물으니 "아니다. 그룬트비는 당시에 코펜하겐에 살았는데 여기까지 오는 것이 너무 멀어서 오지 못했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다목적홀로 안내했다. 그곳엔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초대 교장이 된 요한 베게너(Johan Wegener)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베게너 교장은 개교식 때 대부분이 농부였던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명료하고 분명하며 올바르게 말하고 생각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배움은 민족주의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젊은이들의 심장은 조국의 언어, 조국의 역사, 조국의 전통에 대한 사랑으로 젖어 있어야 한다. 민족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소작농은 독립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누가 자신의 적인지 알면서도 의지만 할 것이다."

'깨어있는 농부' 10%가 나라를 바꿨다

한마디로 '깨어있는 농부'가 되라는 것이다. 베게너 교장의 초상화를 보면서 나는 개교식 당시 그와 학생들 사이에 오갔을 눈의 대화를 상상하고 있었다. 현 교장이 설명을 보태준다.

"당시 이 농민학교에는 귀족부농은 오지 않았다. 아주 가난한 농민도 별로 없었다. 주요 학생은 소작농 등 중간층 농민이었다. 여기에 온 학생들은 자기가 사는 마을의 10%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룬트비 정신으로 배운 그들이 덴마크라는 나라를 바꿔버렸다."

나라를 바꿔버렸다? 내 귀가 솔깃했다. 한 농민학교가 나라를 바꿀 수 있었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농민들은 여기에서 배우면서 나 개인뿐 아니라 우리 농촌, 우리나라, 우리 역사를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졸업 후에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모두 리더가 됐다. 때마침 붐이 일기 시작한 협동조합 운동도 자연스럽게 이들이 주도하게 됐다."

그것은 '깨어있는 농민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소중한 과정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설명이 계속된다.

"협동조합은 1인1표가 아닌가?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결정권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한마디로 평등하다. 당시 농민들에겐 이 새로운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 평등하게 협동하니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한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그 경험이 오늘날의 덴마크를 행복사회로 만든 기틀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때부터 농민들은, 우리는 작은 나라이니까 서로 돕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서로 남이 아니라 다 연관돼 있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세금 50%를 기꺼이 내고 있다. 내 돈으로 어려운 사람이 덕 보는 것을 보면 참 행복하다."

내 돈으로 어려운 사람이 덕보는 것이 참 행복하다! 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행복했다. 닷새 동안이나 햇볕을 보지 못한 내게 마치 햇볕을 본 것처럼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줬다. 이 지구상에 사는 보통사람으로부터, 매일의 삶의 무게에 찌들어있는 이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교장 선생님은 티셔츠에 잠바를 걸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였는데,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학생들은 이 노래책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학생들은 이 노래책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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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목적홀 입구에는 노래책들이 놓여 있다. 마치 교회 예배실 입구에 찬송가 책들이 있듯이. 학생들은 매일 아침 이 노래들을 합창하면서 즐겁게 하루를 시작한다. 그룬트비는 교육은 즐겁게 해야한다는 신조를 갖고 '노래와 함께 하는 교육'을 강조했는데 이를 위해 스스로 수백 곡의 노래를 작사작곡했다. 

교장은 이 노래책을 펴면서 말한다.

"여기 보세요, 이것이 그룬트비가 만든 노래입니다. 이 노래책이 바로 덴마크에서 모든 책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입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교장 선생님은 다목적홀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는 교육관으로 안내했다. 이동하는 데 30초도 안 걸렸지만 매서운 겨울바람에 온몸이 시렸다. 

학생들에 대한 대부분의 강의가 이뤄지고 있는 이 교육관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원래 1940년에 소 마굿간, 옥수수 저장창고 용으로 지었던 건물을 2013년에 리모델링했는데 옛 틀거리는 유지하고 내부 공간은 현대적으로 꾸몄다.

 빼앗긴 땅을 기억하라! 독일과의 전쟁에서 진 다니비아케(Dannevirke)에서 가져 온 벽돌을 교실 벽에 심어놓았다.
 빼앗긴 땅을 기억하라! 독일과의 전쟁에서 진 다니비아케(Dannevirke)에서 가져 온 벽돌을 교실 벽에 심어놓았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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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육관 건물 속에서는 곳곳에서 그룬트비와 마주친다. 1층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편 벽에 이 건물의 정신이 될 만한 것이 박혀 있다. 어른 눈높이정도의 벽에 오래된 벽돌 한 장이 박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1000년 이상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로 20cm, 세로 5cm 크기인 이 벽돌은, 지금은 독일 땅이 된 다니비아케(Dannevirke)에서 가져온 것이다.

1864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덴마크가 빼앗긴 땅, 그 아픔의 역사를 지닌 작은 벽돌을 여기에 박아 놓은 이유는 뭘까? 그 벽돌은 상처받은 덴마크의 뿌리다. 벽돌 옆에는 그룬트비가 쓴 글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인간은 육체 이상이다.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룬트비는 그 글귀를 통해 말하고 있었다. 땅은 독일에게 빼앗겼지만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덴마크인들은 독일인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이 역사적 벽돌을 충분히 감상하고 뒤로 돌아서니 이번엔 그룬트비가 더 크게 다가왔다. 3층 높이의 벽에 그룬트비의 얼굴이 가로 2m 세로 3m 크기로 그려져 있다. 1층 입구, 2층의 작은 토론방, 3층의 큰 토론방 어디에서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위치에 그가 있다.

교장 선생님은 왜 이 건물이 학생들과 그룬트비와의 대화가 늘 가능하도록 구성돼 있는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19세기 초에 노르웨이를 잃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과의 전쟁에서 다시 또 남부 땅을 크게 잃었다. 당시는 절대왕정체제였는데 왕이 있었지만 왕을 의지할 수 없었다. 패전으로 쪼그라든 나라에서 우리 스스로 책임감을 느꼈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을 일깨웠다. 우리가 주인이 되어야겠다!"

상실은 때론 이렇게 재기의 기회가 된다. 교장선생님의 입에서 매우 중요한 말이 나왔다. 우리가 주인이 되어야겠다! 내 삶의, 내 나라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룬트비 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행복한 인생의 핵심 조건이 아니겠는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이상화는 이렇게 노래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덴마크의 오늘을 보면 이런 답이 나온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그룬트비식 시민학교는 1844년 뢰딩에서 처음 만들어진 후 급속히 확산돼 19세기말에 덴마크에서 75개나 되었다. 그러자 정부에서도 이 학교들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1917년에는 약 30만 명의 젊은 덴마크 성인들이 적어도 6개월간 이곳에서 '깨어있는 시민'이 되기 위한 공부를 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이 학교는 성인들의 필수코스가 되다시피해서 매년 약 5000~7000명의 성인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교장 선생님이 아이를 7명 낳은 까닭

 교장 선생님 에릭슨(Eriksen)씨는 이른바 ‘그룬트비 자식’이다. 그는 18세때에 “그룬트비처럼 살겠다”고 결심했다.
 교장 선생님 에릭슨(Eriksen)씨는 이른바 ‘그룬트비 자식’이다. 그는 18세때에 “그룬트비처럼 살겠다”고 결심했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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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덴마크는,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는 그룬트비의 자식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뢰딩학교의 에릭슨 교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92년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모교에서 7년째 부인과 함께 공동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니까 가족이 함께 학교 건물 안에서 살고 있다. 이 장점을 이용해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학생들 10여 명을 사택으로 불러 편하게 인생상담을 해준다.

에릭슨 교장은 "열여덟 살 때 그룬트비처럼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 어린나이에 그런 결심을 했을까? 알고보니 그의 가문이 그룬트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의 증조부는 그룬트비가 아직 살아있을 때 그의 정신을 담은 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교인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새 나라 만들기'를 했다.

올해 44세인 그는 아이가 무려 7명이다. 첫째가 23세이고 막내가 이제 네 살이다. 힘들지 않느냐고 했더니 "이 기숙학교에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니 따로 밥을 안해도 돼서 그리 힘들지 않다"고 웃는다. 그는 "우리부부가 모두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덧붙인다. 이 말은 달리하면 이런 것이다. 덴마크 사회는 우리 아이들에게 권할 만하다!

에릭슨 교장에게 "그래서 당신은 지금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물론이다"라고 단박에 답한다. 그러면서 본인의 행복론을 이야기한다.

"행복은 'Have to'에서 나오지 않는다. 'Like to'에서 나온다. 의무적으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것에서 나온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지금 즐겁게 하고 있다."

그는 "덴마크 사람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나처럼 행복하다고 할 것"이라면서 "그 이유는 우리가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유롭다. 교육비 무료, 의료비 무료 등 기본 사회복지가 되어 있으니까 남의 눈치,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교육비, 의료비를 부모가 대주지 않고 나라에서 대주지 않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부모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내가 뭘 할까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다. 나 스스로에게만 물으면 된다."

그의 말이 참 부럽게 다가왔다. 그는 더 부럽게 느껴지는 한 마디를 보탰다.

"덴마크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서로 화합을 잘하기 때문이다. 그룬트비 정신을 가진 이 학교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 간의 토론을 매우 중시한다. 이런 훈련이 돼 있기에 우리 덴마크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서로 싸우지 않고 토론한다. 그래서 실현 가능한 해법을 찾아낸다."

미련이 남았다. 약 3시간 동안 교장선생님을 따라다니며 학교를 구경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는데도 여기에서 좀 더 머무르고 싶었다. 봄이 오면 그룬트비의 인생과 철학만을 배우는 1주일짜리 특별코스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만약 다음 주에 시작 한다면 출장을 연기해서라도 듣고 싶어졌다.

 구경꾼은 없다. 연극연습하는 학생들
 구경꾼은 없다. 연극연습하는 학생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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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정에 없이 다음날 오후 다시 이 학교를 찾았다. 토요일인데도 대강당이 시끌벅쩍했다. 창을 통해 들여다보니 학생들 30명이 모여 연극연습을 하고 있었다. 구경꾼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전원 역할이 주어졌다. 춤과 노래와 몸짓들이 어울려진 연습장은 시종 왁자지껄, 박장대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날도 나는 햇볕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창을 통해 그들을 좀 더 잘 보려는 순간에도 햇볕은 도와주지 않았다. 덴마크의 겨울은 정말 지독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햇볕을 보았다. 축제를 준비하는 '그룬트비의 자식들' 서른 명의 얼굴에서 비추는 서른 가지의 햇볕.

 오연호 대표 기자가 연재했던 <'행복사회의 리더십'-'행복지수 1위 덴마크 비결을 찾아서'>가 2014년 9월1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오연호 대표 기자가 연재했던 <'행복사회의 리더십'-'행복지수 1위 덴마크 비결을 찾아서'>가 2014년 9월1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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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