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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9일 오후 6시. 대한민국 국민 전부가 긴장하며 텔레비전을 주목했습니다. 방송사와 리서치 조사기관이 공동으로 진행한 제18대 대통령선거 출구조사 결과 발표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오. 사. 삼. 이. 일….

그리고 YTN을 제외한 나머지 공중파 채널에서 화면을 가득 채운 여론조사 결과는 정권 교체를 열망한 저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예측 결과 앞에서 많은 이들이 차마 그 결과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높은 투표율 앞에서, 뜨거운 정권 교체 열망 앞에서 분명 야당의 승리를 확신했는데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멘붕'과 절망 그리고 이어진 죽음들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 되고 있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축하꽃다발을 건네받은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이 확실시 되고 있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축하꽃다발을 건네받은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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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그날 밤, 지켜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워 텔레비전을 껐다가 다시 켜기를 반복하며 막연한 반전을 기대했지만 그것은 저만의 희망이었을 뿐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있겠나 싶었던 현실이 거짓말처럼 진짜가 되는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밤 12시 채 되지도 않아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이후 여의도 당사를 향해 '승리의 카 퍼레이드'를 하는 박근혜 후보를 지켜보는 제 심정은 차마 표현할 수 없이 참담했습니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 한동안 회자된 유행어는 이른바 '멘붕'이었습니다. 마치 지독한 감기처럼 많은 이들이 마음의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프리 허그' 공약을 이행하기도 했고 그렇게 프리 허그를 하며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는 등 아픈 마음을 호소했습니다.

정신적 고통은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미래의 희망을 포기하는 절망적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특히 대선 후 이어진 노동자의 자결 소식은 우리 모두의 심장을 쥐어 뜯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의 죽음으로 시작된 농성 노동자의 자결은 '함께 살자'며 호소했던 희망이 더 이상 기댈 언덕조차 사라졌다는 절망이었습니다. 죽지 말자고, 다시 시작하여 새로운 희망을 만들자는 우리 모두의 눈물에도 매일 매일 들려오는 소식은 너무나 절망적인 슬픔이었습니다. 그때의 그 아팠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오늘입니다.

충격적인 결과를 접한 그날 밤 저에게 떠오른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의 부인 김희숙 여사였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2년 8월 1일, 묘 이장 과정에서 동그랗게 뚫린 장준하 선생님의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무려 38년간 계속된 사인 의혹을 두고 장준하 선생님 스스로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자 자신의 아픈 상처를 드러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관련 기사 : 장준하 의문사, 숨어있는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리하여 '유신 독재자'의 딸이 아무런 반성 없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우리에게 '정신 차리라고' 외친 비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과는 부끄러웠습니다. 대선이 끝난 후 국정원 등 권력기관의 총체적인 부정선거가 있었고, 이로 인해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의혹이 남아 있지만 여하간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는 박근혜 후보였습니다. 바로 박근혜 당선자가 여의도로 승리의 행진을 하는 것을 보며 제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던 이유입니다.

다음날, 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다가 파주 장준하 묘역을 가고자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희뿌옇게 밝아오는 그 새벽녘에 장준하 선생님 묘 앞에 주저앉아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부끄러워서 울었고, 죄송해서 울었고, 또 이 나라 우리 국민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2012년 12월 20일, 그 아픈 기억이었습니다.

18대 대통령 취임일, 장준하 선생 사모님을 찾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자' 꼬리를 떼고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연 날입니다. 전날부터 경축 분위기를  끌어내고자 요란 떠는 소리가 듣기 싫어 뉴스도 보지 않았는데 당일이 되니 더욱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과거 자기 아버지 시대에 저질러진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않은 채 이렇게 대통령까지 올랐으니 그의 독선과 오만이 걱정되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전날 장준하 선생님의 부인이신 김희숙 어머니에게 전화하고 "찾아 뵙겠다" 하니 예의 정답고 환한 미소로 조심해서 오라 하십니다. 그래서 찾아 뵌 사모님의 집은 조그마한 임대 아파트였는데 성품처럼 잘 정돈된 깔끔한 집이었습니다. 전날부터 정성껏 끓여 그릇에 담아간 사골국을 아내가 건네 드리며 "그간 잘 지내셨냐"고 안부를 여쭸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말씀 나누던 중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은 애잔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대선 투표 결과를 알게 된 날 저조차도 심정이 그랬는데 이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생각하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넌지시 여쭤봤습니다.

"어머니. 대선 결과 보시고 난 후 가슴이 많이 아프셨죠?"

어머니는 성품 좋은 그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네. 가슴이 많이 아파서 아주 혼났어요"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에 저 역시 "그러셨겠죠. 저조차도 가슴이 많이 아팠는데 어머니야 오죽 하셨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손을 내젓는 겁니다.

"아니. 전 진짜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요 앞 종합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찰도 받고 이것 저것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별 거 다 해봤다니까요."

의사 선생님. 저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2012년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장남 장호권씨와 부인 김희숙씨가 추념사를 듣고 있다.
 2012년 8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통일동산에서 열린 '장준하 공원 제막식 및 제37주기 추도식'에서 장남 장호권씨와 부인 김희숙씨가 추념사를 듣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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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대통령 선거 결과가 발표된 12월 20일 아침, 어머니는 가슴에 큰 통증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래서 119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입원을 했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각종 검사를 받았답니다. 그 결과 확인된 통증 이유는 어머니의 심장 쪽에 작은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다행히 악성 종양이 아니어서 약물 치료로 치료가 가능할 것 같다고 의사가 했답니다. 천만다행이라고 하는데 이어진 어머니의 말씀입니다.

"여자 의사가 하는 말이 손톱 크기만한 종양이 심장 쪽에 있는데 괜찮다며 안심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어요. 그 종양이 손톱만 해요? 아니면 손 마디만 해요?"

어머니의 질문을 받은 여자 의사는 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손톱 크기만 하고 악성도 아니니 약 잘 드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때였습니다. 웃으며 답하는 여의사에게 다시 어머니가 했다는 말씀입니다.

"의사 선생님. 그 종양 크기가 손톱만 하건, 아니면 그보다 더 크건 상관없고 제가 꼭 여쭤볼 게 있는데요. 제가 앞으로 5년은 꼭 살아야 겠는데요. 앞으로 그럼 5년은 살 수 있겠습니까? 어때요?"

여자 의사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말씀에 빙긋 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왜 5년만 더 사실려고 하세요? 앞으로 더 오래 오래 사셔야죠."라고 어머니에게 답했다는 겁니다. 저 역시 그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아니. 어머니 더 사셔야지 왜 5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하셨어요?"

이어진 어머니의 말씀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죽으면 저 세상 가서 영감을 만날 거 아니요. 그때 영감이 나보고 '그래.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하고 있소?'라고 물으시면 내가 차마 말을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 앞으로 5년만 내가 더 살아서 다시 대통령 선거해서 대통령 뽑을 때까지 살아 있으려고 해요. 그래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대통령되는 것 보고 죽어야 내 영감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머니의 말씀에 아내와 저는 울컥했습니다. 제 가슴에 진한 아픔이 눈물로 고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장준하 선생 사인 의혹 반드시 밝혀야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왼쪽)가 2007년 7월 11일 오전 지난 1975년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의 강남구 일원동 자택을 방문했다. 박 후보가 눈물을 훔치는 김 여사를 바라보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왼쪽)가 2007년 7월 11일 오전 지난 1975년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의 강남구 일원동 자택을 방문했다. 박 후보가 눈물을 훔치는 김 여사를 바라보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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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그런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꼭 1년이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대선 공약집 제목은 '세상을 바꾸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박근혜의 행보는 많이 달랐습니다. 노회찬 전 의원의 비판처럼 '세상을 바꾸는 약속'이 아니라 '약속을 바꾸는 세상'이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임기 4년 역시 그리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지난 대선에서의 총체적인 국가권력 개입 부정선거 의혹은 박근혜 정부가 자신의 임기내 반드시 규명돼야 할 정치적 숙제입니다. 또한 대통령에 당선되고자 '불가능하다'는 지적에도 "내가 대통령이 되면 다 된다"며 터무니없는 복지 공약을 남발한 후 역시 이를 스스로 모두 허물어버린 복지 공약 뒤집기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당면한 문제입니다.

이처럼 엉망으로 꼬인 임기 1년이 지나가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결심만으로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다른 어떤 사안처럼 재정 부담이 드는 것도, 정치적 부담이 생기는 일도 아닙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을 밝히는 일입니다. 과거 자기 아버지 시대에 벌어진 온갖 인권 유린과 야만적 정치 공작의 진실을 밝혀 국민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선언하면 됩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을 끝내 외면하고 이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이 문제는 아버지 시대에 벌어진 잘못이 아닙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가 아버지 시대의 야만을 그대로 이어가며 또 다른 가해자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 상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자기 필요에 따라' 장준하 선생님 사모님을 찾아와 사과하겠다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때 사모님은 박근혜 후보가 내민 '사과의 손'을 내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의 잘못을 그 딸이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받아 들이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의 마음은 진심이 아니었던 듯합니다. 대통령 경선 승리를 위한 '일회성 이벤트' 차원이 아니라며 진정성 있는 사과라고 강하게 부인했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지금 보여주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진상규명 외면이 당시 그 모든 것이 '정치적 이벤트'였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약속의 정치인,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미사여구도 필요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늘상 주장하는 '비정상을 정상으로'라는 말만 상기해 보십시오.

그렇기에 저는 주장합니다. 지난 39년간 밝혀지지 못한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을 둘러싼 의혹을 규명해 주십시오.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이 나라의 광복군이자 민주주의자, 언론인이며 국회의원이었던 장준하 선생님의 진실을 찾아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록 더디 움직이지만 반드시 정의를 찾아올 것을 믿습니다. 저는 끝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태그:#재야인사 장준하, #의문사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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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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