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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고등학생들.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고등학생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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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학기부터 초·중·고교에서 교육과정에 앞선 내용을 가르치는 선행학습이 전면 금지된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학생들이 그래봤자 소용없을 것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이런 기사를 읽으면 대한민국 학생들은 모두 선행학습을 원하고 학원에 선행학습을 하러 가는 것만 같다. 길거리 학원 광고도 초등학생·중학생이 고등학교 과정 선행학습을 해야 하고, 이미 우리 학원 학생들은 하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하지만 내가 근무해온 고등학교에서는 남의 이야기이다. 선행학습을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매스컴 속 우리나라 학생들은 종일 공부만 하고 성적을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한민국 학생들 모습의 전부는 아니다.

일반계 고교가 슬럼화 되고 있다는 기사가 간혹 보이는데, 현장에서 체감하는 상황은 더 심각하다. 수업을 하면서 방금 전에 설명한 내용인데도 질문하면 대답하지 못하는 학생도 많고, 초등학생에게 설명하듯이 수업한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도 많다. 선행학습은 고사하고 현재하고 있는 현행(?)학습을 제대로 이해시키기도 버겁다.

가끔은 수업을 하다가 작년에 이미 배운 내용을 묻기도 하는데, 절대로 배운 적이 없다며 힘차게 오리발을 내민다. 이럴 때는 작년에 이미 배웠던 내용을 다시 설명하기도 한다. 이미 했던 후행(?)학습마저 다시 해야 할 지경이다. 이러니 선행학습이건 뭐건 남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교실의 가장 큰 문제는 '선행학습'이 아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을 종합해보면 우리 학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대학교 같은 과 출신 친한 친구 여섯 명 중 다섯 명이 교사다. 그 중 네 명은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고, 한 명은 나처럼 경기도 중·고등학교 교사이다. 1990년대 후반 교사를 시작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만나면 자주 서로의 학교 얘기를 나누게 되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서로의 이야기는 비슷해진다. 학생들이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고, 수업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중학교를 졸업하면 대다수가 외국어고, 과학고 같은 특목고로 빠져나가고, 일반고에는 그런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 실업계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간다는 것이었다. 우리 학교를 보아도 그렇다. 수업 시간에 항상 잠들어 있는 학생을 깨워 수업을 들으라고 하니, 자기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이곳에 왔으니 수업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연수를 가서 만나는 다른 지역의 선생님들에게도 이구동성으로 나온다.

이런 상황이니 대부분의 고등학교에게 선행학습 금지법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선행학습은 해본 적도 없고, 해볼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재 우수한 고등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상위 1%의 학교들에게만 상관이 있는 법일 것이다.

사실 조심스럽다. 현장에 있는 교사가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으니, 학부모들이 더더욱 특목고 입시에 목을 맬 것만 같아서이다. 하지만 쉬쉬 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아닌 척한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니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고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현직 교사들의 진단은 이렇다. 일반계 고등학교 상당수가 이렇게 수업하기 힘들어진 것은 우후죽순 특목고가 늘어나면서부터였다. 그 결과는 일반고의 슬럼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악순환은 계속된다. 일반고가 슬럼화 되니 특목고에 진학하고자 하는 이가 더 늘어났고, 일반고의 슬럼화 현상은 더 심해진다. 중학생 중 공부 좀 한다는 학생 대부분이 특목고 입시에 매달리다 보니 특목고 입시 준비를 위해 사교육도 늘어났고, 선행학습도 심해졌다.

이상한 사실은 특목고에 진학하면 그것으로 사교육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동료 선생님 한 분의 딸이 과학고에 진학했다. 사교육은 이제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훨씬 더 비싼 사교육을 시작해야 했다고 한다. 똑똑한 과학고 학생들끼리 경쟁하니 더 어려운 내용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선행 금지법은 첫 단추... 학생 대다수 위한 정책 기대

이런 현실이니 선행학습 금지법이 소용이 있겠느냐는 비판이 많다. 일반 고등학교와는 상관이 없어서 필요 없고, 특목고 등은 학교에서 금지하면 학원에서 배우면 될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바르게 채우는 첫 단추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하듯이, 사교육 만능이 되어버린 현실을 개선해나가려면 어떤 대책이든 하나씩 세우고 적용해나가는 편이 도움이 되리라 보기 때문이다.

뉴스에는 밤늦도록 야간 자율학습에 시달리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공부만 하는 등 대학 입시에 대한 부담감에 짓눌리고 있는 학생들만 일반적인 고등학생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학생들은 전체 학생 중 얼마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압도적 다수의 고등학생들은 교실 안에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다. 수업에도, 영화에도, 심지어는 아이돌에게 마저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멍하니 있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아이들을 보면, 지금 필요한 법은 '선행학습 금지법'보다 수업 결손이 쌓여 가는 학생이 없도록 도와주는 '나머지 공부 대상 학생 관리법'이 아닐까 싶다. 선행학습 금지법도 필요하지만, 그 적용 대상은 전체 학생 중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은 수업 결손을 벌충해주는 것이다.

장기간의 수업 결손으로 인해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업 시간을 수면 시간으로 활용하는 학생들을 보면 조국의 미래는 그저 어둡게만 보인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청춘을 불태워야 할 아이들이 자괴감으로 시들어가는 모습도 그저 슬프다. 그래서 선행학습 금지법 이후에는 다수의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교실 안에서 '멍 때리고' 있지 않을 수 있는 법, 다수의 학생이 수업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을 기대한다.


태그:#선행학습 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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