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연구소 '울림' 소장을 맡은 권인숙 명지대 교수.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연구소 '울림' 소장을 맡은 권인숙 명지대 교수.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연구가 연구로 끝나지 않고 사회에 울림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그런 욕망이 반영된 이름이에요."

오는 20일 정식 개소를 앞둔 국내 유일의 성폭력연구소 '울림'의 권인숙(51) 소장이 한 말이다. '울림'은 23년째 한국 사회에서 반성폭력 운동을 이끌어온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부설연구소다. '울림'은 20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성폭력 두려움의 현황과 진단'을 주제로 개소 기념 포럼을 열고 공식 활동에 들어간다.

권 소장은 지난 1986년에 일어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후 여성학자가 돼 현재 명지대학교 교양학부인 방목기초교육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권 소장을 만났다.

"'씻지 못할 상처', '인생 망친다'... 자극적인 언론 보도가 문제"

우선 권인숙 소장은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가 성폭력의 두려움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 보도가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만을 강조해 실제 성폭력 상황에서 대처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씻지 못할 상처', '인생 망친다'는 식의 극단적인 보도로 피해자에게 평생의 피해 의식을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소 개소 기념 포럼의 주제를 '성폭력 두려움의 현황과 진단'으로 잡은 이유다.

권 소장은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심할수록 실제 성폭력을 당한 아이가 이 문제를 부모에게 표현할 가능성이 낮아진다"며 "때문에 언론 보도가 성폭력 피해를 극복하는 데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성폭력 중에서 '가해자=괴물'이라는 구도로 이어지는 성폭력은 지극히 일부"라며 "대부분의 성폭력은 아는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과도한 피해의식과 불안은 성폭력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성폭력 가해자는 '괴물'이 아니라 친족, 연인, 선후배 간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절대악' 프레임, 사회 통념 바꿀지 의문"

출범 1년을 맞는 박근혜 정부의 성폭력 대책도 비판했다. 정부가 성폭력을 가정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과 함께 4대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척결에 나서고 있지만 성폭력의 견고한 통념을 깨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또 성과 위주의 전시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 유발론'이 견고하다"며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다', '여성들의 태도가 중요하다' 등의 통념이 지배적"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이런 통념을 바꿀 수 있는 틀이 필요한데, 4대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게 과연 이런 프레임을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권 소장은 "성폭력을 악의 프레임에 가두는 것은 성폭력 의식이 개선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어떤 것들이 성폭력인가, 성폭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 유발론이 견고하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해 피해자 유발론이 견고하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다음은 권인숙 소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 성폭력연구소, '울림'의 개소를 축하드립니다. 연구소 이름을 '울림'이라고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는 성폭력에 대해 많은 편견이 존재해요. 연구가 연구로 끝나지 않고 사회에 울림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그런 욕심이 반영된 이름이죠."

- '울림'을 통해 이건 꼭 해야한다는 목표가 있나요?
"성폭력을 두고 '씻을 수 없다', '당하면 인생 망친다'는 통념이 지배적이에요. 하지만 성폭력에 대한 피해는 다양하고 조두순, 김길태 사건 같은 괴물에게 당하는 성폭력은 드물어요.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게 주요 목표라고 할 수 있어요."

- 권 소장은 사실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1986년대 일어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데요,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성폭력 연구의 길을 걷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것 같았어요. 저렇게까지 두려워해야 할 일인가라는 생각이었어요.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해요. 하지만 언론 보도가 아동 성폭력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 작용한 것 같아요. 성폭력은 아주 복잡해요. 아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 많잖아요.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이어지면서 계속 해오게 된 것 같아요."

- 오는 20일에 개소 기념 포럼을 엽니다. 성폭력 두려움의 현황과 진단이 주제인데, 포럼 내용이 구체적으로 궁금한데요.
"최근 몇 년 사이, 아동 성폭력 사건이 터지면서 성폭력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아주 높은 상태예요. 특히 자극적인 언론 보도로 간접 피해의 경험이 과하죠. 아동 성폭력 같은 경우에는 과도한 피해의식과 불안은 성폭력에 대처하고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어려워요. 또 성폭력 중에서 '가해자=괴물'이라는 구도로 이어지는 성폭력은 지극히 일부의 일이죠. 성폭력은 가해자가 되기도 쉽고 피해자가 되기도 쉬운 폭력입니다. 그것에 대한 이해도나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가해자=괴물'이라고 불안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대응 방안을 찾게 될 겁니다."

"언론보도로 인한 간접 피해, 성폭력 문제 해결에 도움 안 돼"

- 성폭력 두려움이 늘고 있다는 지적인데,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두려움만 강조돼서는 안 돼요. 언론 보도에서 가장 공포심을 조장하는 게 아동 성폭력, 유괴죠. 이런 보도는 괴물로부터 아이를 무조건 보호해야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성폭력은 단지 두려움으로 포장되기에는 복잡한 면이 많아요. 왜냐면 상호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성찰도 필요하죠.

아동 성폭력의 경우에는 육아 과정에 대한 이해도 필요해요. 하지만 사실 그 빈틈이 너무 많아요.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폭력의 이미지와 실제 성폭력 이미지의 갭이 너무 크죠. 대응 방안도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많죠."

- 언론 보도는 경각심을 일깨우고, 성폭력 예방에 도움을 준다는 순기능도 있잖아요?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해요. 성폭력이 사회적인 문제라고 보도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예방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조두순 같은 괴물 몇 명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게 성폭력 전체의 예방이라고 할 수 없어요. 대부분의 성폭력은 아는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예방이 어려워요. 아버지, 오빠가 가해자인 친족 성폭력이 늘고 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 가족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부모들은 예방책으로 '치마 입었을 때는 조심해', '니가 노(no)라고 얘기해야 해'라는 것만 강조하고 있어요. 자신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입하는 것은 성폭력을 당했을 때  금기를 어겼다는 죄책감에 빠질 수 있어요. 또 아는 사람들에 의한 성폭력은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어요.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이해하기 어렵죠.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심할수록 아이가 이 문제에 대해 주변 사람과 의논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거예요. 언론 보도로 형성된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부정적인 기능을 할지 모릅니다. 아이가 피해를 극복하는 데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예요."

-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요?
"아동 성폭력의 경우 아이가 일을 당한 뒤, 부모에게 바로 얘기하는 게 가장 좋은 대처죠. 엄마에게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해요."

"건수 올리려는 성폭력 대책에서 벗어나야"

-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1년이 다가옵니다. 정부가 성폭력을 4대 사회악으로 규정해 특별 대책을 내놓기도 했는데요. 성폭력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성폭력이 사회적인 문제라고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성폭력은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폭력이에요. 악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성폭력은 모르는 사람에 의한 강제 성폭력이라는 프레임에 갖혀버려요. 악의 프레임으로 잡는 것은 성폭력 의식이 개선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어요. '절대악'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성폭력에서 극복해야 할 통념 중의 하나예요.

성폭력에 대한 통념 중, 피해자 유발론이 견고하죠. 이로 인해 여성들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통념이 지배적입니다. 깨지 못하고 있어요. 또 남자들은 성충동을 조절 못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피해자가 원인 제공했다는 식이죠. 이것을 바꿀 수 있는 틀이 필요한데, 4대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게 과연 이런 프레임을 바꿀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어요."

- 성폭력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요. 인권측면에서 바라봐야 하는데, 지금은 실적위주의 평가가 중심이에요. 예방 대책에 대해서는 구체적이지도 않습니다.
"4대 사회악 중심의 성폭력 정책은 전시 행정으로 흐르기가 쉬워요. 구체적으로 왜 성폭력을 하면 안 되는가, 어떤 것들이 성폭력인가, 성폭력을 어떻게 바라봐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들의 술 문화도 문제죠. 여성이 의식이 없으면 이 기회에 할 수 있다는 남성 의식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죠.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도 '술 먹여서 자빠뜨려라'라는 그런 식의 성폭력 빈도가 훨씬 더 높아요. 그런 상황에서 남자들은 실수로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이 늘어나고 있어요.

사회적인 논쟁이 진행되고 합리적인 성찰이 반영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절대악의 프레임'과 어떻게든 '건수 올려야 한다'는 식의 성폭력 대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지난해 일어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이진한 대구지검 서부지청장 성추행 건과 연관시켜 보면 '절대악 프레임'은 이들 사건이 상대적으로 별 일 아니라는 생각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남자들의 경우 성폭력으로 몰리지 않을까 막연한 불안의식이 있지만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고민은 해보지 않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연구하면서 초등학생 보호자들의 의식을 조사해봤는데요. 자기 아이가 성적인 가해자가 될 거라고 염려하는가라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1%도 안 되는 거예요.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있지만 가해자가 된다는 의식은 거의 없는 거죠.

논의도 많이 되고 토론도 적극적이어야 하죠. 그 과정에서 언론의 생산적인 보도가 필요하지만 아직, 성폭력 사건이 갖고 있는 선정성에 머물러 있어요. 이런 문제는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받아들이는데,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질문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게 만들죠. 경각심이 높아지는 것과 함께 합리적인 고민이 이어져야 하는데 아직은 부족해요. 저희들이 부족한 점을 메우는 역할을 할 겁니다."


태그:#권인숙 소장, #성폭력연구소, #한국성폭력상담소, #4대 사회악, #성폭력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