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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벽4시30분. 오늘도 나는 변함없이 옆에서 자고 있는 마누라가 잠에서 깰까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와 현관에 배달되어 있을 신문을 집어 들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어젯밤 후배와 한 잔한 탓일까?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 신문은 뒤로하고 마누라를 깨워 해장국이라도 끓여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나이 50 넘어 직장 다니는 마누라에게 미안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자라고 배려하며 가스 불에 라면 물을 올려놓는다.

언제 내 나이가 이렇게 먹었나 싶을 정도로 염색을 안 하면 머리가 반백이고 이마에 주름은 웬 계급장을 이리도 많이 달았나, 거울을 보면서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본다.

언제 내 나이가 이렇게 먹었나 싶을 정도로 염색을 안 하면 머리가 반백이고 이마에 주름은 웬 계급장을 이리도 많이 달았나, 거울을 보면서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본다.
 언제 내 나이가 이렇게 먹었나 싶을 정도로 염색을 안 하면 머리가 반백이고 이마에 주름은 웬 계급장을 이리도 많이 달았나, 거울을 보면서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본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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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잘 다니던 한 신문사에서 노-사, 노-노 갈등으로 예기치 않게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입사 후 대한민국 최고의 언론사에 취업하였다는 자부심과 이 직장이 정년이 될 때까지 하늘이 나에게 보내준 선물이기를 기원하며 남들보다 열심히 근무를 하였다.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하여도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업무에 열중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속되는 회사의 적자로 임금이 동결되기를 수년. 사원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을 즈음 회사에서는 내가 몸담고 있는 부서를 분사하여 법인을 달리 하겠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결정문을 내리며 명예퇴직을 시행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 사측의 말도 안 되는 억지와 불의에 맞서 싸우며 잘 버티던 조합원들은 계속되는 사측의 압력과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하나, 둘 노동조합을 탈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합위원장이라는 사람도 회사에 백기를 들고 조합을 탈퇴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실망감을 지울 수 없어 뜻을 같이 하는 조합원들과 함께 44세에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인생의 종착역은 멀기만 한데 중간 환승역에 너무 빨리 하차한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중학교 입학 예정인 장남과 초등학생인 차남 그리고 어여쁜 마누라의 근심 가득할 얼굴이 아지랑이가 너울너울 하는 듯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퇴직 후 평소 알고 지내던 보험설계사와 진로상담을 통해  한 손해보험회사에서 설계사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 만나지 않던 지인과 멀리 있어 뜸했던 친구들에게도 보험회사 명함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몇 번은 반기는 모습을 보이더니 너무 집요하게 영업을 하여서일까, 친구들까지도 만나는 것을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대리운전기사는 밤새 기다리고, 운전하고, 걸어야 하는 직업이다.
 대리운전기사는 밤새 기다리고, 운전하고, 걸어야 하는 직업이다.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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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이 생각보다 적어지자 술 마시면 평소 이용하던 대리운전을 내가 직접기사가 되어 해보기로 마음먹고 대리운전업체에 문을 두드렸다. 약 3년간 야간에는 대리운전, 낮에는 보험설계사로 생활했다. 몸은 피곤해도 수입이 증가하자 마누라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였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서일까? 대리운전동료기사들이 하나, 둘 보험에 가입하여주더니 친구들과 지인들도 나를 찿아주기 시작하였다.

보험계약자가 증가함에 따라 주·야간 돈벌이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지자 대리운전은 그만 두기로 하고, 대신 보험설계사 업무에만 매진하기로 하였다.

대인관계를 넓혀 가면서 인생을 배워나가고 고객과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자필로 기념일에 편지를 직접 써가면서 챙겨 주었고 자그마한 선물을 집으로 방문해 전달해주었다.

인생이 꼬이는 걸까? '고객의 증가는 곧 수입'이라는 일반적인 진리 속에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가던 어느 날 후배의 컨설팅 사업 제의에 일주일 동안 심사숙고 한 끝에 아내에게 사실을 알리고 약간의 자본을 구해 달라고 이야기하자 '당신 나이가 몇 살인지 아냐'고 물어본다.

아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다 눈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잔주름과 함께 며칠 전부터 나에게 머리에 염색해 달라고 조르던 귓가의 흰머리가 언뜻 보인다.

삶에 지쳐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걸까. 언제 자랐는지 나보다 덩치가 훨씬 큰 아들 두 놈이 아내 옆에 않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소름이 끼친다.

내 나이 47세. 나는 생각했다 아직은 젊다. 마누라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마누라의 자포자기식 알아서 하라는 한마디에 더 이상 생각도 없이 다음 날부터 부산으로 울산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 사이 6개월여 동안 보험에 등한시하게 되었으며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자 하나, 둘 떠나는 고객의 불평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무렵 보험사에서는 출근도 안 하고 실적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며 설계사 등록을 말소 시킨다는 보험회사 지점장의 연락이 온다.
 
하지만 나는 컨설팅 사업에 바빠 어쩔 수 없었다. 더 큰 미래를 위해 달려가야 한다는 목표가 욕망이 아닌 야망이기를 나 자신이 스스로 위안을 삼았고 지점장에게 말소요청을 하였다.

설계사 등록이 말소되고 6개월 후, 정확히 컨설팅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계속되는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지 못한다는 명언을 잠시 잊은 나의 시대적 오판과 마누라의 현명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달려갔던 1년을 후회 하고 있을 때 마누라는 오히려 나의 등을 토닥여 주며 괜찮다고 힘을 내라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을 보이자 아내는 '여보 인생을 절망하기에는 너무나 당신의 지나온 세월이 아깝다'고, 웃는지 우는지 아리송한 모습으로 나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래, 나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가는 어두웠던 인생의 한 부분을 승화시켜 희망의 불씨로 바꾸자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어려운 시절 하였던 대리운전을 다시 시작하였다. 모든 것을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생각하자 새로운 인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나는 휴대폰의 액정을 쳐다보며 고객의 부름을 기다린다.

"대리운전 시키신 분."
"기사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딱 한 잔만 마시고 출발할게요."

이제는 정겨운 목소리다.

지금의 내 나이가 어때서. 인생 100세 시대, 딱 절반. 살 날이 많이 남았는데. 인생의 반환점이라고 할 시점에 건설기계협의회에서 관리업무를 맡아달라고 요청이 왔다 너무 기뻤다. 재직 2년여. 지금의 나는 소박한 한 가지 꿈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소망한다, 이보다 더한 기쁨도 사양하고 지금의 행복이 인생 마지막까지 이어져 나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준 가족의 입가에 웃음이 멈추지 말고 항상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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