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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벗어나려고 꿈꾸는 시대에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시인이 있다. 그가 바로 소위 '밥상 차리는 시인'으로 불리는 오인태씨다. 시인은 지난 대선 때 페이스북을 통해 누구보다도 많은 정치적 발언들을 쏟아내었지만, 사람들이 일순간 말을 잃게 만드는 대선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고, 아팠지만 그냥 주저앉을 수 없어 작정하고 '저녁밥상'을 차렸다고 했다.

저녁밥상을 차린다는 것. 이는 삶의 중심을 잡는 것이라고 했다. 삶의 중심을 잡는 것은 일상의 궤도를 점검하고 바로 잡는 일,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녁밥상을 차리면서 일상은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고 평온해졌다 한다. 다행이다.

일상은 끊어지는 법이 없으므로, 일상은 멈추는 법이 없으므로. 그것이 곧 일상의 힘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일상은 흘러가야 하고, 세상이 아무리 거대담론 속에 있다 해도 소소한 일상성의 회복 없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이 시인으로 하여금 밥상을 차리게 하였을 것이다.

시, 인문정신, 그리고 저녁.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질료로 곡진하게 차린 시인의 밥상
▲ 오인태 시인의 <시가 있는 밥상> 시, 인문정신, 그리고 저녁.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질료로 곡진하게 차린 시인의 밥상
ⓒ 인사이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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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힘내라고 차려준 시인의 밥상

오인태 시인의 <시가 있는 밥상>은 이런 깨달음을 엮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책 속에는 그동안 시인의 차려준 예순 개의 밥상이 있고, 예순 수의 시가 있으며, 예순 편의 산문이 정좌하고 있다. 그러니 시집도 아니고 산문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리책은 더욱 아니다. 변화한 환경에 따르려는 새로운 장르라고 시인은 덧붙였지만, 서로 다른 형식과 코드들을 결합시킨 책의 구성이 도리어 낯설지 않고 자연스럽다.

밥상과 함께 차린 시는 <그곳인들 바람 불지 않겠나>, <혼자 먹는 밥>, <등 뒤의 사랑>, <아버지의 집>, 그리고 < 별을 의심하다> 등 시인이 이미 발표한 시집의 시들 중에서 골라 뽑은 시들이다. '시가 있는 밥상'은 그렇게 차려져서 우리들 앞에 놓였다. 마주 앉아 수저를 들고 싶게 한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

더 갈 데도 없는 생애의 가파른 벼랑, 이렇게 넘실대는 파도에 섞여 겨드랑이에 반짝이는 비늘 하나 돋을 때까지

혹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저 검푸른 물보다 더 깊이 잠겨서 마침내 내 생애의 예쁜 섬 하나 띄워 손짓할 때까지

안녕, 모두들 잘 계시게
('남해에 와서', 17쪽)

더 갈 데도 없는 '가파른 벼랑'이며, '넘실대는 파도', '저 검푸른 물'이 어쩌면 일상의 삶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결국 여기까지 왔네'는 탄식일까 안도일까. 그러나 남해라는 끝 섬까지 닿아 망망한 바다를 보는 일이 좌절이 아님을 '반짝이는 비늘'이며 '생애의 예쁜 섬'이 말해준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힘내라고 시인은 우리에게 문어 애호박국과 오이소박이, 데친 두부를 올린 밥상을 내밀어준다.

식구와 밥상과 가족공동체에 대한 은유

책 속에는 밥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자주 말한다. '두레 밥상'을 잃어버린 지금 이 시대의 안타까움이 진하게 배어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이고, 그 삶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식구'라고 부르는 것인데, 저녁이 없어지고 가족의 일상이 사라지면서 가족 공동체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집'이라는 다음 시는 극적인 비유를 통해 식구와 밥상과 공동체를 은유하고 있다. 

손에 든 꽃이 무색해라

일마치고 돌아오는
사람을 맞는

저기
꽃보다 환한

불빛
('집', 53쪽)

시인은 꽃보다 환한, 꽃보다 아름다운 집의 저녁 불빛 속에서 식구들이 두레 밥상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과 정치의 연관성에 대한 발언도 담아낸다. 물론 산문을 통해서이다. 정치는 그 무엇보다 국민들의 삶 속 깊숙한 곳에서 매일의 일상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전시가 아닌데도 가족들이 최소한 저녁밥을 같이 먹는 정도의 일상성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정치를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시인의 산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구성체에 대한 나름의 짧은 담론을 피력하기도 한다. 지금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극심한 갈등은 보수와 진보의 대립도 아니고, 민주와 반민주, 자본과 노동, 여와 야의 대립도 아니며, 한국 사회의 핵심 갈등 구조는 기득권 세력과 비(반)기득권 세력의 대립 구도로 시인은 파악한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 안에도 각각 기득권과 비기득권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자본과 노동, 여와 야 안에도 마찬가지다고 말한다.

시인은 정당성 없는 기득권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며, 세상이 아무리 쓸쓸해도 느닷없이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니, 이렇게 일상을 이어나가야 하고 살아가야 하는 일이 참 눈물겹다고, 시인은 메밀국수를 삶아 따뜻한 국물에 말았다. 이럴 때 다음 시는 매우 간절하게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팔짱을 내어주고 싶은 날
그리하여 이따금 어깨도 부대끼며
짐짓 휘청대는 걸음이라도
진심으로 놀라하며 곧추세워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발걸음을 맞춰 마냥 걷다가
따뜻한 불빛을 가진 찻집이라도 있다면
손잡이를 열고 들어서서
내 얘기보다 그의 얘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싶은 날

혼자 앞서 성큼성큼 걸어온 날이
누군가에게 문득 미안해지는 날
('그런 날', 105쪽)

시가 있는 밥상에서 일상이 된 그리움

<시가 있는 밥상>의 많은 시들 중에 시인의 혈육에 대한 시들도 진하다. 시인 자신을 만들었던 팔 할인 아버지, 배고플 때 부엌에서 새어나오던 밥내 같은 어머니, '너에게는 참 할 말이 없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착한 아우, 그리고 수국 같은 당숙모까지, 피붙이들의 기억 속에서 삶의 척박함과 끈끈함을 담아내기도 한다.

시인의 애틋한 가족사는 시인의 시 내면에 깊숙이 스며든 시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시인이 서 있는 정치적인 입장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교육민주화니 정의니 양심이니 하며 '사치스런' 구호를 외치다 교단을 쫓겨나온 시인을 한없이 지켜보다, 차비나 하라고 지폐 몇 장을 쥐어주며 가슴 저리게 했던 아우, 시인은 그 아우의 속 깊은 마음을 두려움으로 간직하고 있다.

아프고 후회스러움만 남은 부모님이건만 '부당한 방법을 써서라도 남을 이겨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않으셨고, 생명과 사람에 대한 연민, 무욕의 마음을 물려주신 것을 '과분한 유산'이라며 깊은 긍정으로 안아 들였다. 어쩌면 가까운 혈육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세상을 포용하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시인의 밥상, 시가 있는 밥상에서 일상이 된 그리움을 발견한다. 시인은 밤고구마와 곶감에 머루즙 한 잔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린 날, 어머니와 고구마나 감자를 거두는 날이면
내가 캐는 것들은 하나같이 생살이 찍히거나
몸통이 잘려 허연 피를 쏟아내는데

희한하게도 어머니의 호미 끝에
이끌려 나온 고구마와 감자들은
껍질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

가만 보니 어머니는 호미 날을 수직으로
세우는 법 없이 멀찌감치 팔을 뻗어
마치 밭두둑을 싸안듯이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호미질' 부분, 123쪽)

오인태 시인의 <시가 있는 밥상>은 이처럼 정겨운 소반 위에 정갈하게 차려준 밥상으로 세상을 아우르며 팍팍해진 사람의 마음을 위무한다. 우리는 시인의 향기로운 밥상에, 시인의 진솔한 시 구절에, 그리고 시인의 담론에 얼마든지 위로를 받게 된다.

함께 가야 험난한 고개를 넘을 수 있는 법

그래서 시인의 밥상은 단순한 음식의 집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상을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이자 간절한 염원의 결정체라고 했던가. 시와 인문정신, 집과 일상이 곧 건강한 공동체의 복원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요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결국 시인은 함께 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두레 밥상에 모여 앉아 왁자하게 밥 퍼먹고, 반찬을 나누고, 국물로 몸 데우며 함께 가자는 것이다. 함께 가야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함께 해야 어려운 시대의 고개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의 은유로 시인이 들려주는 다음 이야기는 그래서 힘이 난다.

내 고향 안의에서 장수로 넘어가는 육십령이라는 고개가 있다. 굽이가 육십이어서 육십령이 아니다. 옛날 그 고개에 소도둑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소장수 육십 명이 모여야 비로소 재를 넘어갔다고 하여 육십령이라 불렀다고 한다.(9쪽)

덧붙이는 글 | <시가 있는 밥상>, 오인태, 인사이트북스, 2014년 1월 20일, 1만 3천 원



시가 있는 밥상 - 세상의 저녁을 따뜻하게 하는

오인태 지음, 인사이트북스(2014)


태그:#시, 인문정신, #집과 일상, #시인의 밥상, #건강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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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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