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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같았던 첫째 아이 출산 이후 난 둘째는 반드시 집에서 낳겠다고 결심했다.
 악몽 같았던 첫째 아이 출산 이후 난 둘째는 반드시 집에서 낳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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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의 두 번째 아이는 '필리핀 마닐라 이스트우드 원 오차드 콘도 타워2 6B(Manila Eastwood one orchard condo. tower2 6B)'에서 태어났다. 11시간을 통과해 세상에 나온 순간, 아이가 만난 것은 아빠의 묵직하고 따스한 손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외국의 한 작은 집에서 둘째 아이를 낳았다. 그와 나와 큰 아이, 이렇게 세 명이 만든 기적이었다. 과거는 희석되기 마련이라지만 그 날만큼은 여전히 생생한 아름다움으로 남아 절망에 마주한 순간마다 우리를 일으켜주는 영감이다.

큰 아이를 가졌을 때 출산 관련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봤는데 그 때 가정출산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산모와 태아가 출산의 주체가 되어 생명 탄생의 현장을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래서 첫째도 집에서 출산하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두려움과 조산사를 부르는 비용이 부담이 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첫째는 종합병원에서 낳게 되었다. 아기가 거의 나올 때쯤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출산 후 난 하루 종일 물속에 있다 나온 사람처럼 팅팅 부었고 입맛도 돌지 않아 밥을 남겼다. 물론 연약한 음성으로 울던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엄마가 되었음을 실감할 때의 말로 표현 못할 뭉클함도 있었지만, 나와 아이를 지나치게 혹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 후 결심했다. 둘째를 갖게 된다면 반드시 집에서 낳겠다고.

첫째가 7개월이 되었을 즈음 우리는 필리핀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큰 아이가 16개월이 되었을 즈음 우리에게 둘째가 찾아왔다. 우리는 고민했다. 한국에서 낳아야 하나, 산후조리는 어떻게 하나, 필리핀에서 낳는다면 진료 받을 병원은 어떻게 고르나 등등.

여러 가지를 따졌을 때 필리핀에서 낳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타지에서 가정출산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산파를 찾아보기도 했다. 직접 만나 면담도 했는데 다들 반응이 왜 위험하게 집에서 낳느냐는 것이었다. 외국어로 우리가 가정출산을 왜 하려고 하는지 설득하는 것은 어려웠다. 남편은 계속 걱정했지만 난 마음을 굳혔다. 그냥 우리끼리 낳아보자고.

그냥 우리끼리 낳아보자, 그렇게 결정했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진통이 시작되었다.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분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큰 아이가 걱정이었다. 둘째를 낳을 동안 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남편 혼자 모든 일을 도맡아야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 날의 주인공은 나도, 둘째도 아닌 남편이었다. 힘들고 무서웠을 텐데 듬직하게 날 이끌어주고 두 아이를 보살핀 진정 멋진 가장이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가슴이 울컥한다. 고작 두 돌을 넘긴 큰 아이의 어른스러움과 남편의 믿음직함이 사무치게 고맙기 때문이다. 과거는 힘이 없지 않다. 변치 않을 진실로써, 오늘과 내일을 이끌어줄 동력으로써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새삼 내가 얼마나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므로.

집에서 아이 낳는 경험은 나뿐만 아니라 남편, 첫째에게도 대단한 일이었다.
 집에서 아이 낳는 경험은 나뿐만 아니라 남편, 첫째에게도 대단한 일이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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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시작된 진통은 어둑해져갈 때까지 끝날 줄을 몰랐다. 남편은 하얀 막 같은 것이 보인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아기는 도무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난 고국에서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을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제발 이 고통이 빨리 끝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빌었다.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에 압도되어 불안이 극에 다다랐을 때 드디어 아기가 바로 밑까지 내려온 느낌이 들었다.

당시 나는 의자에 엎드려 기댄 자세였는데 아기가 나오면서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미끄러워서 아기를 놓칠 뻔했다고 한다. 부랴부랴 아이를 받고 잠시 바라봤는데 아주 평온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익숙한 공간의 포근함에 아이도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다. 아이를 내 배 위에 눕히고 남편은 울먹이며 편지를 읽어줬다. 큰 아이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놀라움으로 조용히 남편 옆에 서 있었다. 우리는 탯줄을 바로 자르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만져본 탯줄은 따뜻했고 심장박동이 느껴졌고 생각보다 두꺼웠다. 참 평화로웠다.

둘째 출산은 많은 면에서 첫째와 달랐다. 둘째는 가진통도 잦았고 이슬도 나오지 않았고 양수도 거의 흐르지 않았다. 남편 말에 따르면 나의 출산 자세도 의사들이 '적극적으로' 말리는 자세라고 한다. 행여 산부인과 의사가 나의 출산 이야기를 읽는다면 기겁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위험천만했던 출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는가. 기적이었다고! 우리는 그저 믿었다. 엄마의 본능을, 아이의 생명력을, 우리 가족의 간절함을.

둘째를 무사히 낳은 후 우리는 감격에 겨워 한동안 새로 태어난 사람마냥 활기차게 지냈다. 산후 조리도 전혀 못하고 멀리서 축하 인사만 받았을 뿐 그리운 이들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외롭게 두 아이를 키우는 일에 매달려야 했지만 생명 탄생의 현장을 온전히 우리 의지로 맞이했다는 성취감에 어느 정도 견딜 만했다. 때로 심신의 고단함에 무너질 때도 서로의 손을 맞잡고 끊임없이 격려하고 위로했다. 둘째 출산뿐 아니라 마닐라에서의 하루하루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건 몰라도 '살아 있다'는 말의 무게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셋째가 태어날 땐 출산잔치를 열 겁니다

지금 나의 뱃속엔 셋째가 자라고 있다. 셋째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는 해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셋째도 집에서 낳을 것이다. 이번에는 사람들을 초대해 즐거운 출산 잔치를 열 계획이다. 진통의 고통으로만 가득한 출산이 아니라 사람들의 격려와 기쁨이 가득한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부족은 여성이 진통을 하고 있으면 밖에서 순산을 기원하는 춤을 춘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의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둘째를 낳고 가장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우리만 외로웠던 게 아니라 아이들도 외로웠다. 그것이 사무치게 미안하고 서러웠다. 그래서 이번 출산은 시끌벅적하고 사람의 온기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아이를 하나 키울 때와 둘 키울 때가 사뭇 달랐는데 셋을 키울 땐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고된 만큼 뿌듯할 것이라 믿는다. 초음파로 처음 만났을 때 작은 씨앗 크기였는데 벌써 5살이 되고 3살이 된 두 아들을 보며 생명이란 인간이 감히 분석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자 근본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그러니 한낱 부모인 우리는 그저 아이들의 건강한 웃음을 소망할 뿐이다. 건강하게,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덧붙이는 글 | '출산, 그 아름다운 이야기' 공모



태그:#가정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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