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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초상화.
 황희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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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세종 시대의 특급 참모인 황희는 우여곡절이 많은 인물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그가 선택한 정치세력은 하나같이 망했다(관련기사 : 황희의 저주... 그가 지지한 쪽은 꼭 망했다). '펠레의 저주'처럼 '황희의 저주'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황희는 고려-조선 교체기 때는 조선왕조 건국을 반대하고 경기도 광덕산 두문동에 은거하는 쪽을 선택했고, 태조 이성계 때는 훗날 이방원의 칼에 죽게 될 세자 이방석을 보좌하는 쪽을 택했다. 또 태종 이방원 때는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반대하는 쪽에 섰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역사의 승자는 고려왕조가 아니라 조선왕조였고, 이방석이 아니라 이방원이었으며, 양녕대군이 아니라 충녕대군이었다. 이렇게 황희가 선택한 쪽은 항상 망했지만, 희한하게도 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쪽에 의해 선택돼 항상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가 선택하지 않은 조선왕조가 그를 선택하고, 그가 선택하지 않은 이방원이 그를 선택하고, 그가 선택하지 않은 충녕대군이 그를 선택한 것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황희를 선택한 쪽은 그를 최대한 활용해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황희가 태종과 세종을 잘 보좌했다기보다는 태종과 세종이 황희를 잘 활용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황희는 격동기 때마다 판단 착오로 불안한 처지에 놓였지만, 그런 황희를 무대 위로 끌어올려 능력을 발휘하게 도운 것은 태종과 세종이었다.

황희의 진짜 모습은 '황금 대사헌'

세종로공원. 서울 광화문광장 옆에 있다.
 세종로공원. 서울 광화문광장 옆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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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공원에 있는 사헌부 터.
 세종로공원에 있는 사헌부 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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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어릴 적에 동화에서 읽은 황희의 모습은 태종과 세종의 눈에 비친 황희의 모습과는 다소 다르다. 황희는 동화 속에서처럼 청렴결백한 인물이 아니었다. 세종 10년 6월 25일 치(양력 1428년 8월 6일) <세종실록>에 따르면, 황희는 황금을 뇌물로 받은 사건을 계기로 '황금 대사헌'이란 별명이 붙었다.

황희는 하필이면 지금의 검찰총장인 대사헌 재직 시절, 금덩이를 뇌물로 받았다. 그래서 가장 청렴해야 할 대사헌이 '황금 대사헌'이란 오명을 쓰게 된 것. 서울 광화문광장 서쪽에는 세종로공원이 있다. 공원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헌부 터'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곳에 근무할 당시 황희는 부정부패의 장본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뿐만 아니다. 황희는 뇌물을 받고 재판에 개입하는 탐관오리였다. 또 재산 형성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관직 근무 기간에 비해 너무 많은 노비와 토지를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토지와 노비가 부의 척도였다. 노비가 많았다는 것은 노비를 이용해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이 많다는 의미였다.

황희는 또 다른 분야에서도 대형 스캔들을 일으켰다. 바로 여성 문제였다. 그가 살인 용의자인 여성을 자기 집에 숨겨주는 조건으로 수년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결함투성이인 황희를 태종과 세종과 감싸주고 중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참모는 주군에 비해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받지 않는다. 주군은 참모를 고를 때 도덕성보다는 실무 능력을 더 중시하기 마련이다. 물론 도덕성이 완전히 제로라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웬만한 경우라면 참모의 도덕적 하자는 실무능력에 묻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황희의 경우에는 도덕적 하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태종과 세종은 그를 보호하고 신임했다. 특히 태종은 더 그를 더욱 신임했다. 태종이 황희를 신임했기 때문에 태종의 아들인 세종도 그를 신임했다. 태종이 황희를 총애한 것은 그가 도덕적 하자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이 좋아한 황희의 특성 중에서 중요한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황희가 임금들의 신뢰를 얻은 이유 세 가지

첫째, 황희는 입이 무거웠다. 그는 주군의 비밀을 잘 지켜줬다. 문종 2년 2월 8일 치(1452년 2월 28일) <문종실록>에 수록된 <황희 졸기>에 따르면, 그는 비밀유지라는 측면에서 태종의 높은 신뢰를 얻었다.

황희는 거의 매일 같이 태종과 단둘이 만나 기밀사무를 논의했다. 한번은 태종이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아는 일이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가 한 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황희와 단둘이 있을 때 나눈 대화는 제3자를 통해 왕의 귀에 다시 들어오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황희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황희는 주군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시켜주되 주군을 위협하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은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처남 민무구·민무질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잡은 뒤에 민씨와 처가를 정치적으로 도태시켰다. <황희 졸기>에 따르면, 황희는 이방원의 밀지를 받아 민무구·민무질을 사형으로 몰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민무구·민무질도 주군인 이방원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시켜줬지만, 이들은 원경왕후 민씨를 앞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도 관심을 쏟았다. 태종은 이 점을 위험시했다. 하지만, 황희는 주군을 보좌하기만 할 뿐 주군의 권력을 넘보는 일은 절대 없었다. 

또 황희는 세종시대에는 세종의 중점 사업인 농법 개량과 예법 개정을 성사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세종의 치세를 보필하면서도 세종의 왕권에 결코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이처럼 황희는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주군의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줄 뿐만 아니라 주군의 등에 피가 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참모였다.

셋째, 황희는 사람의 특성을 잘 읽어냈다. 태종시대인 1408년에 목인해란 인물이 반역을 모의한 일이 있었다. "변고가 났으니 급히 대응하라"는 태종의 명령을 받은 황희는 "누가 주모자입니까?"라고 물었다. 태종이 "조용"이라고 대답하자, 황희는 "조용의 사람됨을 볼 때,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은 감히 하지 못할 사람입니다"라며 조용 대신 목인해를 주모자로 지목했다.

나중에 진상을 파악해보니, 주범은 목인해였고 조용은 혐의가 없었다. 이 때문에 태종도 감탄하고 조용 본인도 감탄했다고 <황희 졸기>는 전한다. 황희는 커다란 정치적 흐름은 잘 읽지 못하지만, 사람의 특성을 잘 파악했기 때문에 왕들이 보기에는 매우 요긴한 인재였다.

군주의 가려운 곳 긁어줄 수 있는 참모, 황희

태종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태종은 결점 많은 황희의 능력을 잘 활용했다.
 태종 이방원의 무덤인 헌릉.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소재. 태종은 결점 많은 황희의 능력을 잘 활용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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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치 흐름의 변화를 잘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참모로서는 매우 훌륭한 족적을 남겼다. 이것은 황희의 시대에는 황희 같은 참모가 절실히 필요했고, 황희 본인이 그런 시대적 요구에 잘 부응했기 때문이다.

황희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태종·세종 시대는 조선왕조가 안정기를 향해 달려가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는 정도전이나 한명회처럼 기존의 판도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참모는 불필요했다. 정도전·한명회 같은 참모는 이런 시기에는 위험했다. 이런 때에 필요한 참모는 큰 흐름은 읽지 못하더라도 왕을 성실히 보좌하고 왕의 뜻을 잘 실현시켜주는 이였다.

군주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참모를 찾는다. 군주는 자기와 똑같은 장점을 가진 참모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태종과 세종은 태조 이성계에 비해 머리가 영리했다. 그래서 태종과 세종은 머리 좋은 참모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런 군주들에게는 정도전이나 한명회처럼 머리가 비상한 참모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했다.

황희는 정치적 대세를 읽는 능력은 부족했지만, 입이 무거워서 비밀을 잘 지키고 주군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시키되 주군을 위협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특성을 잘 파악해서 주군의 판단을 보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왕조의 안정이 급선무였던 태종과 세종 시대에는 황희 같은 참모가 필요했다. 그래서 태종과 세종은 황희의 인간적 약점에 개의치 않고 그를 핵심 참모로 활용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황희를 기용한 일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황희의 '내조' 덕분에 태종과 세종이 500년 왕업을 위한 초석을 좀 더 쉽게 구축했는지도 모른다.  

(* 다음에는 수양대군의 책사인 한명회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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