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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원숭이 그림자>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작품 무대는 '피스'라고 하는 숲이며, 부정선거로 당선된 숲통령 먹바위 딸과 평화를 염원하는 숲민들의 한 판 대결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숲을 무대로 한 우화소설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저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연재를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필자말

우리에게 평화를!
 우리에게 평화를!
ⓒ 이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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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통령 된 먹바위, 과거 숨기려고 친구마저 죽여

늙은 고라니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먹바위가 원숭이 왕에게 충성맹서를 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눈이 큰 고라니가 답했다.

"예, 어머니. 먹바위가 원숭이들이 피스를 강점하자 원숭이 왕에게 혈서로 된 편지를 보냈는데요. 편지엔 원숭이 나라를 위해 일사봉공(一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것이니 원숭이 군대 장교로 복무하게 해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해요.

당시만 해도 피스 숲민이 원숭이 군대 장교로 입대한 경우는 없었거든요. 원숭이 나라에서 받아주지도 않았고요. 먹바위의 청이 하도 갸륵하고 대견하여 원숭이 왕은 먹바위의 청을 허락했고, 먹바위는 그 길로 이름을 원숭이로 바꾸고는 원숭이 군대 장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원숭이에게 숲을 빼앗긴 후 그 비통함과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피스를 버리고 원숭이나라 숲민이 되고 싶어 안달을 했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로구나."

늙은 고라니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 모든 건 사실이에요. 어머니."

눈이 큰 고라니가 말했다. 

"피스 숲민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숲통령이라며 떠받들어 주었으니 피스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로선 땅을 치면서 화를 낼만도 했겠구나."

"예, 더구나 먹바위가 원숭이 군대 장교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숲민들을 토벌하는데도 앞장섰으니 그럴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놈이 부하에게 총 맞아 죽었을 때 아버지라도 죽은 양 눈물을 펑펑 흘렸으니 나도 참 무지한데다가 한심하기도 하구나. 그것도 부족해 그런 놈의 딸년까지 공주님이라고 좋아했었으니 널 볼 면목이 없구나."

늙은 고라니가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그건 어머니 잘못이 아니라 그런 사실을 철저하게 숨긴 먹바위가 잘못한 거예요. 사실 먹바위가 숨긴 건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먹바위는 원숭이들이 피스를 도망치듯 떠나고 흰머리독수리들이 S·피스를 무단 점령하여 통치하던 시기엔 N·피스의 간첩노릇도 했거든요. 그 일이 들통 나 죽을 위기에 빠지자 먹바위는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엔 숲통령 자리에 오른 거거든요."

"그래? 먹바위가 간첩 질까지 했단 말야?"

늙은 고라니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예, 어머니. 그래도 당시엔 거물 간첩이었다고 해요. 그게 발각되자 주변에 있던 친원파들을 끌어들여서 반란을 일으킨 거지요."
"그런 놈이 N·피스라면 펄펄 뛰는 겨?"

늙은 고라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자신의 과거와 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봐요. 원숭이 강점 시절 숲민들에게 했던 짓이나 해방 공간에서 간첩 질 한 거나 다 죽어 마땅한 일이었는데, 그걸 숨기자니 얼마나 많은 숲민들을 죽이거나 숲감옥으로 보냈겠어요."

"먹바위가 숲통령 할 땐 정말 많은 숲민들이 죽었지.우리 부모님도 휴전선 인근에 먹이 구하러 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총 맞아 죽었으니 먹바위에게 죽은 거나 다름이 없거든."

늙은 고라니가 지난 일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저도 아버지께 들은 이야긴데요. 먹바위가 숲통령 자리에 오르자 N·피스에 고위직으로 있던 친구가 휴전선을 넘어 S·피스로 왔다고 해요. 한때 같이 활동을 했던 친구가 숲통령이 되었으니 축하도 할 겸 만나서 이야기나 하자는 거였대요.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은 먹바위가 깜짝 놀라며 그 놈을 당장 죽이라고 명을 내렸다고 해요.

예전 자신이 N·피스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일 알려질까 두려웠던 게지요. 명을 받은 부하들이 북쪽에서 내려온 먹바위 친구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목을 쳤다는 이야길 아버지께 들었는데요. 그 이야길 들으면서 먹바위라는 놈 정말 무서운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니 얘길 듣고 보니 먹바위가 정말 나쁜 놈이라는 걸 알겠다. 이런 이야긴 나만 알게 아니라 숲민 모두가 다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야 다들 정신을 차리지 않겠니." 

"아유, 어머니도. 제게 들은 이야길 어디 가서 함부로 했다간 큰일 나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니까요.먹바위 딸이 어떤 여잔데요. 애비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거품을 물 걸요."

눈이 큰 고라니 손사래를 쳤다.

"애비 허물이 곧 제 허물일 것이니 그렇겠구나.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를 맘 놓고 할 수 있는 세상이 어서 와야 하는데 걱정이구나. 그래야 숲감옥에 갇혀있는 이들도 싹 다 풀려날 텐데 말이다."

"먹바위 딸만 물러나면 그런 날이 올 겁니다. 그러면 피스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올 것이고, 숲감옥에 있는 분들도 다 풀려날 겁니다. 피스에 평화의 바람이 불면 권력을 가지려고 다투지도 않고 서로 죽이고 죽는 일도 없는 세상이 만들어질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힘이 나는구나. 행여나 숲감옥이 열려 아이와 길이 엇갈리기 전에 얼른 숲감옥으로 가보자."

늙은 고라니가 걸음을 재촉했다.

시위 중 실종된 아이 계곡에서 발견하다

"죽은 자들은 죽음의 강으로 실려 갔고, 살은 자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소."

며칠 전 숲 광장에서 만난 원숭이는 그렇게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죽음의 강에선 아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는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 있다면 필시 숲감옥에 있을 것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늙은 고라니는 지나가는 이에게 숲감옥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가만 있자…… 숲감옥으로 가는 일이 이쪽이던가? 아니 저쪽인가?"

안개가 심했던 탓인지 북쪽 숲에 사는 이들조차 숲감옥으로 가는 길을 되짚지 못했다. 그들은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다가 자신이 가야할 길조차 잃어버리곤 멋쩍게 웃었다.

"다른 길을 찾아보자."

늙은 고라니가 왔던 길로 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짙은 안개는 온 길마저 사라지게 만들어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 늙은 고라니가 주변으로 소리쳐 숲감옥 가는 길을 물었지만, 알려주는 방향이 다들 제각각이라 섣불리 걸음을 뗄 수도 없었다.

"얘야, 어쩌면 좋냐."

늙은 고라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머니, 자작나무가 하나같이 똑같이 생겨서 저도 여기가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눈이 큰 고라니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얘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모든 건 운에 맡기고 한 방향을 잡아 그 길만 따라 가보자."
"어머니, 그러다가 숲감옥이 더 멀어지기라도 하면……."
"운에 맡겨야지 어쩌겠니. 여기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냐."

늙은 고라니는 자작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어머니, 나뭇가지로 뭐 하시려고……."     
"아무리 운에 맡긴다 해도 무작정 갈 수야 없지 않겠냐. 여름엔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부니 바람이 흘러가는 방향을 쫓아가다 보면 숲감옥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늙은 고라니가 나무이파리의 움직임을 살피며 말했다. 안개 때문인지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자 비로소 바람의 세기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얘야, 여길 봐라. 이파리가 한 방향으로 흔들리잖니? 바람이 이쪽으로 불고 있다는 증거란다."
"어머, 정말 이파리가 흔들려요!"
"이 바람을 따라가면 숲감옥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게다. 출발하자."

늙은 고라니는 눈이 큰 고라니를 뒤 따르게 하고 바람을 등지고 길었다. 미로 같던 자작나무 숲을 벗어나자 키 작은 잡목 숲이 나타났다. 잡목 숲을 헤치고 바위 언덕을 한참 오르니 땀을 식혀 줄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동안 숲을 점령하고 있던 안개도 바람이 불어오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안개가 이리저리 떠 밀려다니자 사라졌던 숲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환해지는가 싶더니 늙은 고라니의 눈앞에 바위산이 떡하니 나타났다.

"에구머니나! 앞에 이렇게 큰 바위산이 있었구나."

늙은 고라니가 깜짝 놀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어머니, 저길 보세요. 안개가 걷히고 있어요!"

눈이 큰 고라니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과연 그렇구나."

안개가 걷히자 산과 주변의 풍경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북쪽의 산은 듣던 대로 높고 힘차 보였다. 거대한 바위가 겹겹이 쌓이며 큰 봉우리를 이루었고, 그 아래로는 울창한 원시림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새들의 울음소리가 멈췄어요."

눈이 큰 고라니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또 뭔 일이 생겼나? 그러고 보니 잠깐 사이 새 뿐만이 아니라 매미소리도 멈췄고 동물 울음소리까지 다 멈췄구나."    

늙은 고라니가 먼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숲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요."

눈이 큰 고라니가 귀를 쫑긋 세우며 말했다.

"그러게. 어디서 총소리가 나는 듯한데? 피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늙은 고라니가 코를 벌름거리며 답했다.

"어머! 어머니, 저기 좀 보세요!"

눈이 큰 고라니가 계곡을 향해 소리쳤다. 계곡엔 총을 든 숲경찰이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반대편 계곡에서는 도망치는 자들의 비명과 바쁜 걸음이 느껴졌다. 이어 총소리가 봄날 꽃봉오리 터지듯 펑펑 한참동안 이어지더니 어느 순간 고요해졌다. 늙은 고라니와 눈이 큰 고라니가 고개를 내밀며 계곡을 살폈을 땐 숲경찰이 계곡을 뛰어 넘어 산 정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머니, 피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크게 생겼나 봐요."    

늙은 고라니가 "그래, 뭔 일인지 가보자꾸나" 하곤 조심조심 바위를 탔다. 늙은 고라니와 눈이 큰 고라니가 계곡에 도착했을 때 하늘엔 독수리 떼가 가득했고, 계곡은 피로 흥건했다. 그 주변으로는 숲민 수십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는데, 다들 가슴에 번호표를 달고 있었다. 그 중엔 숨이 끊어진 자도 있고 살아서 신음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어머니, 이 자들은 죄수들이 아니에요?"
"그래, 맞다. 그런데 이들이 왜 여기에 있지?"

늙은 고라니가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 숲감옥을 탈출했다 숲경찰에게 발각된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늙은 고라니가 그렇게 말하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계곡에 쌓인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시신을 뒤적여 내려가던 늙은 고라니가 "세상에나!" 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울음을 왈칵 터트렸다.

"얘야, 얘야, 이리와 보너라. 아이가…… 우리 아이가 여기에 있구나!"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강기희 기자는 소설가로 활동중이며 저서로는 장편소설 <은옥이 1.2>, <개 같은 인생들>, <도둑고양이>, <동강에는 쉬리가 있다>, <연산> 등이 있으며, 최근 청소년 역사테마소설 <벌레들> 공저로 참여했습니다.



태그:#경찰, #폭도, #박근혜, #독립운동가, #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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