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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연극 줄거리가 들어있습니다.

"까칠한 식구들이네" "그러게, 쯧쯧쯧"...목소리만으로도 노년에 접어들었음직한 여성 관객 두 사람이 혀를 차며 나누는 이야기가 중간중간 들려온다. 무대 위 2남3녀 자식들이 어찌나 정신없이 소리지르고 싸워대는지 그럴만도 하지 싶다.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칫하면 몸싸움이 벌어질 기세다. 계속되는 소란 속에서 각자의 사정이 드러난다. 물론 아직 어머니는 모르는 일도 있다.

허랑방탕한 남편때문에 속이 속이 아닌 큰딸, 동업자의 사기로 길에 나앉게 생긴 큰아들 부부, 등단할 날을 고대하며 글을 쓰고 있는 서른일곱 둘째딸, 미혼 직장인인 셋째딸은 덜컥 임신을 했고, 막내아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오토바이며 친구에 정신이 팔려있다.

연극 제목이기도 한 '959-7번지'는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집의 주소. 예전에는 모두 '우리집'이라고 했을 그곳을 이제 누구는 친정, 누구는 본가, 아니면 엄마네집이라 부른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홀로 다섯 자식 길러낸 늙은 어머니는 40년 넘게 살아온 집만큼이나 주름지고 하루가 다르게 고부라져가고 있다. 그래도 어머니 칠순이라고 아이들이 모여 가족사진도 찍고, 잔치를 하네마네 떠드는 품이 웬지 뿌듯하다.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손사래를 치기는 하지만.

포스터
▲ 연극 <959-7번지> 포스터
ⓒ 연극하는 사람들 무대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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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자식, 형제 자매간이란 이런 것일까. 가장 가까우면서도 쌓인 감정의 켜가 너무 두꺼워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좋을 때는 별 문제 없지만 갈등이 생기면 꼭 그 문제가 불쑥 튀어나와 서로를 할퀴고 아프게 한다.

거기다가 고생하며 살아온 부모님 생각을 하면 또다른 고민이 생길 수 밖에. 아무 것도 필요없다면서도 자식들의 마음 씀씀이가 그저 고마운 어머니는 칠순잔치를 차려준다는 자식들을 자꾸 자랑하고 싶다. 자기 코가 석 자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식들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간다.

큰딸은 어머니 칠순잔치 하나 딱딱 알아서 주관하지 못하는 장남을 채근하고, 장남은 자기 사정을 알만한데도 잔소리를 해대는 누나가 야속하다. 돈벌이 못하는 딸과 막내아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고, 직장 다니는 딸은 자기 문제 해결하기도 벅차다.

그나저나 어머니는 칠순잔치를 하셨을까, 못하셨을까. 답은 직접 연극을 보면 알게 될 것이고, 연극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오남매가 대성통곡을 하다가 다같이 찍은 가족사진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제 어머니마저 떠나신 그 집에는 남은 자식들이 살다가 언젠가는 그들 또한 떠나겠지. 돌아가시면서 자식들에게 뒤늦은 후회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끈끈한 정을 가르쳐주셨던 어머니처럼,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이 집도 각자의 추억 속에 자리잡고 앉아 옛일을 들려주겠지.

자식들의 고성과 다툼과 대성통곡으로 귀가 다 얼얼했던 그날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 떠나신 어르신의 빈소에 다녀온 날이었고, 그 전날은 집안 어른 생신 축하 모임이 언짢은 가운데 끝나 마음이 무겁던 차였다.

정말 내가 다 쥐어박고 싶을만큼 못난 구석이 있는 자식들이지만, 그저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새끼'라고 보듬어주는 무대 위 늙고 쪼그라든 어머니를 보며 현실의 윤기나는 생활도 그리 즐겁게 여기지 않는 분이 떠올라 가슴이 쓰렸다.

자식들의 관심과 정성이 늘 성에 차지 않아 내쳐버리는 그분에게 상처 받는 내가 딱하고, 사람마저 멀어지게 만드는 바람에 점점 외로워지는 그분이 또 딱해 마음이 아팠다. 이 또한 영영 해결되지 않은 채 연극에서처럼 서로 헤어져야 비로소 눈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되려나. 노년의 삶과 관계는 이렇게 연극과 현실, 무대 위와 무대 밖을 가리지 않고 내게 밀려들곤 한다.  

덧붙이는 글 | 연극 <959-7번지> (김정숙 작, 연출 / 출연 : 권지인, 김광용, 안혜영, 백호영, 홍자연, 양상아, 이빛나, 송승석)
~ 1월 2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태그:#959-7번지, #구오구-칠번지, #노년, #어머니,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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