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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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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청소 노동을 하다 사망한 아주머니의 유가족이었다. 비가 많이 오던 여름날, 일을 하러 물에 잠긴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감전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아주머니가 일을 했던 건, 식도암으로 투병하던 남편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공감'의 사무실을 찾아 울음을 삼키며 딸이 꺼내놓은 사진에는 '둥둥 떠다니는 빗자루, 끊어져 있는 전선, 지하실 물을 수시로 퍼내라는 알림판'이 찍혀 있었다. 사진만으로도 처참한 환경임을 알 수 있었다. 월급 80만 원 남짓. 중고령 여성 노동자들의 표준(?) 임금이다. 아주머니는 그 돈을 위해서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일했다. 사망한 후에도 아주머니의 발목을 잡는 게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내용의 '촉탁근무각서'였다.

근무 중 불의의 사고 및 본인의 지병으로 인하여 사망하게 되어도 법률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본인의 귀책사유를 불문, 어떠한 불이익 처분도 감수하겠으며….(<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 136쪽에서 재인용)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무시하는 초법적인 각서였다. 책임을 묻는 딸에게 회사는 각서를 내보이며 면피하기 바빴다. '공감'은 회사 대표, 관리사무소장, 전기계장 모두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의 죄가 성립한다는 취지로 검찰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아파트 전기계장만 처벌받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청소노동자들이 그렇다. 실질적인 사용자가 아니라 용역업체와 계약이 돼 있다. 고용환경 개선에 대한 목소리에 용역업체는 해고 운운하며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실질적인 사용자들은 시킬 건 다 시키면서 책임질 일이 있으면 '자신들이 고용한 직원'이 아니라며 발을 뺀다. '노동자를 사용한 자가 책임도 져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노동관계의 원칙은 깡그리 무시된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 '을'들은 참 많다. 복잡한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을'의 처지에 놓인 경우가 있다. 내가 왜 '을'인지, 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말이다. 약자라서, 여성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성소수자라서, 이주노동자라서, 동등해야 할 권리를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사회는 결코 정의롭지 못하다. 특히 법 앞에선 누구나 평등해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몰라서 당하는 게 법이라. 서글픈 현실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전태일은 "나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혼자서 노동법을 읽었다. 그 고독함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전문가라서가 아니라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따스한 연대가 필요하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더욱 그렇다. 변호사는 그 자체로 공익을 품고 있다. 이 사회는 법률이 지배하고 있지만, 모두가 법률 전문가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변호사가 있다.

<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는 '힘없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로펌'이 되기 위해 '공감'이 지난 10년 간 뛰어온 기록이다.

"누구나 살면서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복지시설에 갇혀 10년간 한 번도 바깥세상에 나가지 못한 장애인도, 공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12시간씩 일하는 이주노동자도, 최저임금도 못 받고 학교 건물을 쓸고 닦는 청소원 아주머니도, 한겨울에 서울역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자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존재로 남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들도 원하는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모두 싫어한다. 이 당연한 사실에 대한 '공감'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염형국 변호사 - <우리는 희망을 변호한다> 214쪽)

<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에는 공익·인권변호사의 역사가 짤막하게 소개돼 있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하고 수임료로 독립운동을 후원했던 항일변호사 김병로, 이인, 허헌이 그 뿌리다. 유신시대에 인권변호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흔들리던 시절, 국가의 폭압적인 인권 유린에 맞선 변호사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이병린, 이돈명, 조영래 변호사가 그들이다. 그리고 이제는 '일상까지 돌보는 공익변호사'의 시대가 된 것이다.

희망을 위한 변론, '공감'

'공감'은 박원순 서울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책에 추천사를 썼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하던 10년 전 사법연수원에서 "공익 전담 변호사는 법조계의 블루오션"이란 취지의 특강을 했다. 새로운 직업 세계를 개척하는 선두주자에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보람과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단 이유다.

강의 후 그는 강의를 들었던 사법연수생에게 이메일을 받았단다. '공익변호사를 하고 싶은데 길을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당장 사법연수생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채용했다. 이메일을 보낸 이가 염형국 변호사였고, 그게 '공감'의 시작이 됐다.

후로 김영수, 정정훈, 소라미 변호사가 합류했다. 사무실은 아름다운 재단 2층 베란다에, 집기는 달랑 책상 네 개. 그게 다였다. 단순히 좋아서, 사람 냄새 풀풀 품기며 활동하다 이제는 각자가 제법 전문분야를 가지게 됐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쩌다 보니' 그리 됐단다. 진심으로 공감하고 일을 했단 반증 아닐까.

작년 12월에는 '아름다운재단'에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으로 독립했다. 변호사 7인과 간사 3명. 조촐한 살림에 기부만으로 버텨가고 있지만 희망이 보인다. 초기 개인 기부 비중은 5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이젠 70퍼센트에 육박한다. 풀뿌리 모금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만큼 '공감'의 행보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단 얘기다.

근거 없는 차별과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이익을 보는 세력은 따로 있다. 피해를 보는 것은 성소수자만이 아니다. 역사에서 지배세력이 국민을 억압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손쉽게 희생양으로 삼아 온 이들이 동성애자였음을 기억하자.(<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 134쪽)

관용이 사라지고 낙인찍기가 횡행하는 사회는 비정상으로 기울어 있다. 먼저 인식을 좀먹고 다음엔 국가가 나선다. 역사의 교훈은 그 이후의 처참함을 잘 보여준다. 분명 비정상적인 사회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공익변호사를 두고 "한 사회의 정상성을 회복하려면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 말했다. 함께 듣고 느끼는 세상, 그런 세상.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억압은 분명 칼날이 돼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우리가 '공감'의 이야기에 '공감'해야 하는 이유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서울대 인권수업>

<서울대 인권수업>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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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법' 수업을 통해 만난 서울대 법학부 학생 6명이 함께 썼다. 수업을 진행했던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감수를 했다. 안 교수는 인권위원장 시절,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에 대한 장악력을 키우자 '인권위의 독립성을 훼손시키지 말라'며 맞서다 항의하며 사임했다.

책에는 인권에 대한 다양한 주제가 들어있다. 모두 흥미로운 것들이다. 신상털기, 양심적 병역거부, 장애인등급제, 다문화, 범죄자의 인권, 성소수자, 동물의 권리, 안락사 등 총 10개의 단락으로 구성됐다.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대립되는 의견들을 소개한다.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쉽고 이해하기 편하도록 쓰였다. 여러 주제를 다루지만,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인권은 어디까지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권의 의의를 어딘가에서 구하려는 시도는 인권이 무언가 더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 사람답게 삶으로써 무언가를 더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대 인권수업> 29쪽)


덧붙이는 글 | <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지음, 부키 펴냄, 2013.12, 1만4천원
<서울대 인권수업>, 정광욱외 5인 지음, 안경환 감수, 미래의창 펴냄, 2013.08, 1만2천8백원



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 - 법을 무기로 세상 바꾸기에 나선 용감한 변호사들 이야기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지음, 부키(2013)


태그:#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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