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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1942년 7월 16일 아침 6시, 누군가 다급히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프랑스 경찰이었다. 옷을 입고 짐을 챙기라고 했다. 나치에 협력하는 페탱(Philippe Pétain) 정부가 들어서고, 모든 유대인의 신분증에 유대인임을 증명하는 스탬프를 찍어야 했을 때부터 천지사방을 뒤덮으며 악몽에 시달리게 하던 불길함은 바로 이렇게 다가왔다.

파리에 사는 유대인 3000여 명이 일제히 잡혀갔던 그날, 사라의 부모도 나치에 협력하는 프랑스 경찰에 끌려갔다가 도중에 사라만 풀려났다. 사라의 국적이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사라의 부모는 1928년 폴란드에서 파리로 이주했고, 사라는 이듬해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열세 살이던 사라는 당연히 부모와 떨어져서 혼자 살고 싶지 않았다. 경찰이 차 밖으로 밀어내자 사라는 부모와 함께 가기 위해 다시 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가지 마"라고 외마디 말을 던지며 사라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사라의 부모와 다른 유대인들을 실은 버스는 그대로 사라지고 사라만 홀로 거리에 남았다.

그날 이후 사라는 두 번 다시 부모를 볼 수 없었다. 그들은 파리 북부의 드랑시로 끌려갔다가, 결국 아우슈비츠로 옮겨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폴란드에서 함께 내려왔던 이모, 이모부, 사촌들도 모조리 같은 운명을 맞았다. 사라는 일가친척들 가운데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유대인이었다.

살아남은 자들

모든 피붙이들을 떠나보내고 학살될 운명에서 혼자 살아남은 사라. 그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웃들은 고아원에 들어갈 것을 권했지만, 사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부모가 없다면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가고 싶었다. 마침 사부아(Savoie) 지방에 사라 부모의 친구가 살고 있었다.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도 나치에 점령 당하지 않았던 지역이 상당히 있었고, 사부아는 그런 지역 중 하나였다. 사라는 그곳에서 해방될 때까지 숨죽이며 살았다. 성냥공장을 다니며 일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프랑스 경찰이 언제 또 그녀를 찾으러 올지 몰라 이름도 수잔으로 바꿔 불렀다.

3년 뒤, 해방이 되자 사라는 혼자 파리로 돌아왔다. 부모와 함께 살았던 14구의 아파트는 아파트 수위였던 동네 아저씨가 차지하고 있었다. 사라는 집을 되찾고 싶었지만, 아저씨가 떠날 것을 거부해 이웃에 살던 한 언니의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녀는 사라보다 네다섯 살 많았다. 프랑스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막 산달을 앞두고 있었다. 출산을 앞둔 여자는 잡아가지 않는다는 인도주의적 원칙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뱃속의 아이 덕에 살아남은 것이다. 인종 학살의 광기가 유럽 전역을 뒤덮는 와중에도 기적 같은 생존자들을 만들어내곤 했던 것은, 사람들 사이에 불가하게 흐르곤 했던 인류애였다.

파리로 돌아왔을 때, 사라는 열여섯 살이었다. 한참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였지만, 학교엔 가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열두 살부터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페탱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학교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적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라가 다니던 학교 교장은 유대인 차별주의자였다. 해방이 된 파리에서 온전히 홀로 서야 했던 사라를 위해 동네 학교의 교장이었던 마담 뒤피우스가 후견인이 되어 주었고, 그녀의 삶은 다시 파리 한구석에서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산당에서 배웠다"

해방 직후 프랑스 사회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려는 의지로 충만했던, 말 그대로 해방의 땅이었다. 그때 공산당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을 위해 큰 역할을 했던 레지스탕스들이 재건 과정에서 전면에 나섰는데, 그들 다수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재건작업은 교육과 문화 그리고 그것을 정치와 연결시키는 시민교육 차원에서 다각도로 모색되었다. 사라처럼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전후의 프랑스에서, 공산당은 기대어 일어설 수 있는 언덕이 되고 지렛대가 되어주었다. 사라는 곧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녀의 부모도 프랑스 공산당의 지지자였다. 사라가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학교를 가지 못한 나에게는 당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사라는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라고 묻자 사라는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했다.

"모든 것(TOUT)."
"당은 나에게 인생을 가르쳐주었지. 역사, 문화 그리고 노동, 자본, 사회에 대해. 문학, 영화, 오페라 그리고 인간에 대해. 당에는 지식인도 있고, 노동자도 있었어. 나 같이 유대인도 있고, 프랑스인, 이탈리아인도 있었지.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그냥 동지였어.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살찌웠어.

물론 공연장이나 영화관에 가곤 할 때 당에서 돈이 지원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단체였으니까 항상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당시는 아직 상업주의에 물들었을 때가 아니었으니, 물가가 그리 비싸지 않았지.

지금도 기억나,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가 영화화되어 개봉되었을 때 함께 영화관에 갔어. 스물다섯 명이 단체로 영화를 보고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극장 밖으로 나왔었지."

공산당은 암흑 같은 세상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문화와 교육, 토론을 통해 계속 더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며 세상의 주인이 되게 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사라는 거기서 세상을,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했다.

공산당원 모임에 참여한 사라 달루아(가운데).
 공산당원 모임에 참여한 사라 달루아(가운데).
ⓒ 사라 달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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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함께 할 남자, 조셉을 만난 것도 당 활동을 통해서였다. 사라는 열일곱 살, 그는 서른두 살이었다. 두 사람은 금방 사랑에 빠졌고 하루 빨리 결혼하고 싶었지만, 사라가 아직 미성년자여서 후견인인 마담 뒤피우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마담 뒤피우스는 둘의 결혼을 허락해 주었고, 사라가 열여덟 살이 되던 다음해에 두 사람은 시청에서 결혼을 했다.

스무 살의 사라. 남편 조셉, 아들과 함께.
 스무 살의 사라. 남편 조셉, 아들과 함께.
ⓒ 사라 달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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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마누시앙, 한국의 항일운동

조셉은 나치 점령 하에서 '마누시앙(Manouchian)'의 멤버였고, 해방 후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1940년대 프랑스에서 마누시앙 멤버였다는 사실은 80년대 한국에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멤버였던 것, 30년대 일제치하에서 광복군이었다는 것과 비슷한 무게를 갖는다.

마누시앙은 프랑코 독재로부터 탈출한 스페인 사람, 파시즘에 저항하던 이탈리아인,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유대인 등 외국인들이 주축이 된 스물세 명의 공산당 반나치 무력저항조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프랑스 사회에 '붉은 포스터(Affiche rouge)' 사건으로 치명적 인상을 남겼다.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이 이에 대한 시를 쓰고, 레오 페레(Léo Férré)가 이 시를 노래로 불러(L'Affiche Rouge( Aragon)) 역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파리 지역에서 활동했던 마누시앙 멤버들이 단체로 사형에 처해졌던 1944년 2월 21일, 나치는 프랑스 전역에 이 사형수들의 얼굴을 붉은 포스터에 담아 거리에 붙였다. 그들을 잔혹한 범죄집단이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1944년 공산주의 무장항쟁 집단 '마누시앙'의 사형집행을 알리는 나치의 붉은 포스터.
 1944년 공산주의 무장항쟁 집단 '마누시앙'의 사형집행을 알리는 나치의 붉은 포스터.
ⓒ 사라 달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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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살았던 아파트에 여전히 살고 있는 사라의 집 거실 한가운데에는 붉은 포스터가 걸려 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사라는 마누시앙을 네 번이나 언급했고 반드시 그 포스터가 인터뷰에 실리기를 바랐다. 사라의 인생에 마누시앙이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를 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2차대전 중 유대인들이 무력하게 나치에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역할만을 맡지는 않았다는 사실. 바로 그 점을 그녀는 내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마누시앙과 그 조직에 대한 간절한 사라의 태도는 한 강연회에서 내게 스치고 지나간 생각을 상기시켰다. 경기도 이천에서 6년간 도자기를 배우고 프랑스에 와서 한국의 도자기를 전파하고 소개하던 한 프랑스 도자기작가의 강연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한국의 도자기를 설명하기에 앞서 약 20분간 한국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고조선에서부터 시작해 마침내 일제강점기에 이르렀을 때, 한국인들은 1919년 3·1운동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고, 이후 1945년에 해방을 맞았다는 이야기로 설명을 마쳤다. 그녀가 간단하게 축약한 한국역사 속에, 일제강점기 동안 3·1운동이라는 거국적 저항마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럽게 해방을 맞고, 그리고 지금은 어떤 자세로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리게 다가왔다.

승리하지 못하고 만세만 부르다가 3·1운동은 한국인이 일제의 강점을 치욕으로 느끼며 벗어나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단 사실을 그 순간 엄중하게 느꼈던 것이다.

강의가 끝난 뒤, 나는 그녀에게 한국에도 프랑스가 나치 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레지스탕스들이 있었다고, 3·1운동으로 모든 저항이 끝났던 것은 아니었다고.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만들고, 일제강점기 내내 무력으로 저항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해방이 조금만 더 늦게 왔었다면, 한국은 자력으로 구축한 공군까지 포함된 군대로 연합군에 합류하여 스스로 해방을 완수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녀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놀라워했다.

활동가 커플의 충만한 삶

생존자들에게는 나머지 여러 사람들의 몫을 살아주어야 할 운명이 주어진다. 삶과 사랑의 중심에 정치가 굳건히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기서 비롯된다. 그들은 야만적인 세력이 인류의 생명과 존엄을 더 이상 유린하지 못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꺼이 헌신하면서 삶을 살았다.

사라는 공산당원이자 동시에 CGT(프랑스노동총연맹) 소속의 노조원이었으며, 여성운동단체에서도 활동했다. 결혼한 다음해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둘 중 하나는 아이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둘은 매번 번갈아가며 모임에 참석했다. 두 사람에게 정치는 커플의 삶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서로를 더욱 열렬히 사랑하고 격려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였고, 삶의 중심이었다. 둘은 조금도 지치지 않고, 활동가 커플의 충만한 삶을 꾸려갔다.

2주에 한 번씩 열린 공산당원 모임 현장.
 2주에 한 번씩 열린 공산당원 모임 현장.
ⓒ 사라 달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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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들은 2주에 한 번씩 모여서 국내외 소식들을 서로 나누고, 토론하며, 입장을 정하고,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매주 거리로 나가 당시 공산당에서 발행하던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팔았다. 그것이 공산당 조직을 유지시키는 살림의 밑천이었다. 나중에는 당의 기관지인 '위마니테(Humanité)'를 팔았다. 당의 기관지를 1주일에 한 번, 12매씩 팔면서 동네 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주요 이슈에 대한 당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은 공산당 활동가들의 기본적인 활동이다. 

사라는 일흔다섯 살 때까지 이 활동을 계속했다. (지금도 토요일이면 동네 슈퍼마켓 앞에서 '위마니테'를 파는 나이 많은 공산당원들을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과 알제리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반전운동을 했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넬슨 만델라를 위해서도 무수한 집회와 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 인종차별정책) 활동에 참가했다.

물론 활동가로서만 살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피혁제품을 집에서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피혁제품 제조와 판매는 당시 폴란드계 이민자들이 많이 종사하던 직종이었다.

"이브 몽탕이 영화에 나올 때 입고 나오던 그런 옷 못 봤어? 그런 걸 우리가 만들어서 시장에다 내다 팔았지."

이후 사라는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한다. 시장에서 점원으로도 일하고,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도 일했다. 그녀가 사마리텐 백화점에서 해고된 것은 공교롭게도 미테랑 시절이었다. 열성적인 노조활동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사측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오직 살기 위해, 사랑을 택하다

사라는 유대인들이 밀집해 있는 마레 지역에 산다. 유대인들의 교회인 시나고그가 있고, 시온주의자들 특유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 신앙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완벽한 무신론자다.

여전히 이디시어(Yiddish :중앙-동유럽권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유대인이지만, 그녀는 다만 칼 마르크스, 넬슨 만델라같이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 같은 인류의 비참을 빚어낸 틀을 깨부수기 위해 싸운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들과 함께 인류에게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화 그리고 더 많은 인권이 주어지도록 노력했다. 그것이 그녀를 지탱하게 해준 신앙이었다.

사라에게 전쟁과 학살을 온몸으로 관통한 소녀가 돌아온 파리에서 70년 동안 이토록 넘치는 생명력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잡아간 사람들이 나치가 아니라 프랑스 경찰이란 사실을 안다. 부모의 집을 차지하고 끝내 내놓지 않아 결국은 재판을 통해서 집을 되찾게 만든 아파트 수위도, 열두 살의 소녀를 학교에서 내쫓은 교장도 프랑스인이었다.

2차대전 중, 나치에 협력한 페탱 장군의 비시정부는 프랑스의회가 절대권력을 부여한 합법적인 프랑스 정부의 수반이었다. 나치의 광기만을 탓하기엔 거기에 협력한 프랑스인의 수가 너무 많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이토록 건강하게 프랑스 사회에 뿌리박고 살 수 있었을까? 그녀의 가슴 한구석엔 분노와 증오가 이글거리진 않았을까?

"살아야 하니까, 인류에 대한 믿음을 택한 거지. 내가 왜 모르겠어. 내 부모를 데려가고, 고아에게서 집을 뺏어간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런 날 돌봐주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 내 후견인이 되어주고, 또 내가 집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재판을 함께 준비해준 사람들도 프랑스 사람이었지.

우린 계속 배신당하면서 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인류에 대한 믿음을 선택한 거야. 안 그러면 죽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사라는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충만한 사랑을 누린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 사랑이 나를 이렇게 살 수 있게 해주었지."  

그녀가 말하는 그 사랑은 바로 조셉과 나눈 절박하고 열렬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셉은 사라가 서른아홉 살이던 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쉰넷이었다. 일찍 떠났지만 그와 함께한 20여 년의 세월이 그녀를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해준 것이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내 명치끝은 어찌나 아려오던지…….

3년 전 사라 가족들. 사라가 오른쪽에 앉았고, 그 뒤에 아들이 서 있다.
 3년 전 사라 가족들. 사라가 오른쪽에 앉았고, 그 뒤에 아들이 서 있다.
ⓒ 사라 달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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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는 인생의 아카이브

사라를 처음 보았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은 유난히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84세의 나이에도 검은머리가 흰머리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염색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흰머리를 좋아해서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흰머리는 인생의 아카이브야. 내가 살아온 인생이 이 흰머리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야. 그래서 좋아해. 그러니까 염색 안 하지."

흰머리가 두피를 뚫고 우수죽순으로 솟아나 염색을 고민하던 나는, 사라의 말을 듣고 결심한다. 나도 그녀처럼 평생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기로. 감추는 대신 사랑하기로. 사라의 검은 머리 그녀의 활달하고 건강한 분위기와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전자의 고마운 선물이라기보다, 사라의 삶이 그녀에게 베풀어준 훈장처럼 보였다. 

6년 전, 사라는 공산당원으로 60년을 넘게 활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베테랑(Vétéran) 칭호를 받고, 다른 베테랑들과 함께 당사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되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아방가르드'라는 옛 기관지 이름처럼 한때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진보적 정신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였고, 강력한 정치적 대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리 19구에 있는 거대한 당사가 우스꽝스러워 보일 만큼 몰락한 구정치세력이 되어버렸다. 공산당과 인생을 함께한 사라에게, 아프겠지만 이 지점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공산당이 사회당과 계속 손잡으면서 후퇴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녀의 답은 분명했다. 1920년에 창립된 프랑스 공산당. 1940~50대에 눈부신 성장을 하면서 제2의 정당으로 자리매김했으나 어느 순간, 교조주의에서 탈피하지 못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81년도 사회당이 권력을 잡고, 미테랑이 공산당 출신의 장관을 일부 등용하면서, 사회당의 위성정당으로 전락한다. 권력과 손잡으면서, 공산당은 대체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는 당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고, 지지율은 3%대로 폭락했다.

그나마 지난 대선 때 멜랑숑(Jean Luc Melenchon)과 손잡고 좌파전선(Front Gauche)을 형성하면서 11%라는 제법 괜찮은 성적을 얻은 바 있지만, 이미 오래 전 몰락한 공산당의 부활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안타깝고 힘 빠지는 현실이지만, 사라의 당에 대한 시선은 그다지 엄혹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회당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프랑수와 올랑드(Francois Hollande)를 심하게 비판하는데, 물론 나도 그가 하고 있는 정책이 맘에 들지 않지만, 1년 남짓 재임한 그를 너무 성급하게 다그친다"는 생각도 든단다. 그녀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극우파(Front National)의 약진, 오직 그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괴테와 바그너의 나라,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나온 독일 같은 나라마저 썩게 만들었던 인종주의가 득세하는 현상이야말로 그녀를 걱정스럽게 하는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로 바캉스를 떠날까. 언제 바겐세일이 시작되는가. 이런 얘기들만을 화제로 올린다. 예전엔 이웃사람들끼리 눈만 마주치면 정치 얘기를 했는데, 지금은 모두가 정치 얘기를 꺼린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여전히 정치 얘기를 건넨다. 그것이 나의 실천이다."

사라에게 좌파는 인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놓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자본보다 이익보다, 그 무엇보다 사람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신념을 가르쳐주었고, 여전히 같은 신념을 나누고 있는 동지들을 찾을 수 있는 곳이기에, 당의 쇠락에 대해서 그녀는 크게 상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당의 이름은 공산당일수도 있고, 또 다른 무엇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인류가 다시는 서로를 파멸시키는 무서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더 밝은 곳으로 서로를 이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녀는 팔을 벌려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 다만 그녀의 시대에는 공산당이 그런 역할을 했을 뿐이다.

"평생을 바쳐서 당신은 싸워왔다. 그런데 지금 이토록 후퇴한 세월에 대해 당신은 절망하지 않는가?"라는 나의 마지막 질문에, 그녀는 "물론 후퇴했지. 그러나 얻은 것도 많아. 우선 여성들이 낙태할 권리를 비롯해서 더 많은 권리를 얻었지.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여성의 해방이 정말 중요한 거라구. 이거 알아? 나이든 여자가 한 명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거야"라고 말한다.

1969년, 파리 4구의 공산당원들과 함께. 당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도록 자신의 아틀리에를 늘 빌려줬던 이탈리아 당원에게 다른 당원들이 화분을 선물하며 찍은 사진.
 1969년, 파리 4구의 공산당원들과 함께. 당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도록 자신의 아틀리에를 늘 빌려줬던 이탈리아 당원에게 다른 당원들이 화분을 선물하며 찍은 사진.
ⓒ 사라 달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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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녀와 그녀의 동지들이 싸워서 얻은 성과는 무수히 많다. 파업을 해도 잘리지 않고, 1년에 5주씩 유급휴가를 누리며, 거의 무상에 가까운 교육을 대학까지 받을 수 있다. 그래도 그녀가 가장 먼저 꼽은 투쟁의 성과가 여성 해방이란 사실은 놀라운 한편 기뻤다.

스테판 에셀이 그랬던 것처럼, 사라에게도 역시 중요한 건, 우리에게 남겨진 성과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또 인류를 사랑하는 태도를 간직하는 것이다.

지난 17일, 두 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기분은, 제대로 멋진 박물관 하나를 관람하고 나올 때 가슴에 차오르는 뿌듯함 그대로였다.


태그:#목수정, #프랑스 공산당, #생활좌파, #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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