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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뿜는 산,  쎄로 피츠로이

파타고니아에 자리 잡은 안데스산맥을 통틀어 가장 높은 봉우리인 피츠로이에는 두 개의 트레킹 코스가 있다. 종착지가 전혀 달라 보이는 풍경도 다를 테지만 오리엔테이션에서 우리를 맞이했던 가이드의 '운이 좋다면 오늘 같은 날씨에는 구름이 걷힌 피츠로이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우리는 주저 없이 첫 날, 피츠로이를 볼 수 있는 '라구나 로스 트레스(Laguna los tres)' 코스를 선택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산이 고작 마을에서 걸어서 5분이면 진입로에 닿을 수 있는 뒷산이라니
 이토록 아름다운 산이 고작 마을에서 걸어서 5분이면 진입로에 닿을 수 있는 뒷산이라니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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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마을처럼 저마다의 색깔로 채색된 작은 집들을 거쳐 트레킹 입구까지는 겨우 5분이다. 그마저도 수시로 멈춰선 버스에서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풍경 대신 쏟아지는 햇살이 텅 빈 길 위를 채운다. 노랗게 핀 들꽃들은 온통 바람과 얼음뿐인 이 땅을 따뜻하게 채색하고 아직 출발도 않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부추긴다. 어쩌면 이 한가로움이야말로 피츠로이의 매력이라는 생각을 하다 저만치 앞서간 준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평평하게 쭉 뻗은 길을 지나치니 나즈막한 언덕이 나오긴 했지만 '라구나 로스 트레스'로 가는 길은 줄 곳 편안했다. 그렇게 겨우 20분 정도 걸었을까. 우리는 생애에 한 번 볼까말까한 보석 같은 자연이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있는 진짜 '풍경'과 마주쳤다.

피츠로이 만년설 사이로 자리잡은 빙하는 결국 강을 이룬다
 피츠로이 만년설 사이로 자리잡은 빙하는 결국 강을 이룬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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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쌓인 산맥들 너머에 마치 몸을 숨기듯 듯 빙하와 구름 사이에 자리잡은 피츠로이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설령 피츠로이가 없다고 한들, 빙하가 녹아 생겨난 옥 빛 강을 낀 산맥의 모습은 마치 두 팔을 벌려 여행자들은 안으려는 듯 포근하고 따스했다.

한편으로는 너무 과하다 싶었다. 마치 영화가 시작한 지 20분 만에 절정에 달해버린 느낌. 성격이 급한 사람은 이걸로 됐다 하고 다시 산을 내려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행여나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까 두려웠던 나는 한참 경치에 빠져 있던 구와 준을 재촉했다. 영화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 단지 예고편이 좀 과했을 뿐.

일출을 보려는 여행자들을 위한 카프리 호수 캠핑장
 일출을 보려는 여행자들을 위한 카프리 호수 캠핑장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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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구름이 몇 번씩 자리를 바꾸고, 우리는 중간 지점인 카프리 호수에 도착했다. 왕복 8시간이 걸리는 피츠로이 트레킹을 위해 몇몇 사람들은 이곳 카프리 호숫가에 위치한 캠핑장에서 1박을 하기도 한다. 이유는 단 하나. 해가 뜨는 피츠로이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다.

1년에 다섯 번, 그것도 시리도록 추운 새벽에 그 다섯 번의 행운을 잡기 위해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곳에 올라 그 한 때를 기다린다. 영원히 오지 않을 파타고니아의 여름과 같은 그 순간을. 별 수 없다. 사람의 일생이란 원래 기다리고, 만나고, 사랑하는 순간의 반복이 아니던가.

"Excuse me, Are you from Korea?(실례합니다, 한국에서 오셨나요?)"

몇 번의 바람이 훑고 지나간 카프리 호수 위로 떠오른 피츠로이는 여전히 수줍은 듯 구름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 깊숙한 산 중턱에서 유창한 영어를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Korea"란다.

남극과 가장 가까운 마을, 진짜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에서 온 학생이라는 소년은 수줍게 마이크를 내밀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한 무리의 소년들과 그들의 인솔자임이 분명한 중년의 교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관광홍보를 공부하고 있다는 소년들은 외국인의 눈에 비치는 파타고니아의 모습과 느낌을 취재 중이라고 했다.

파타고니아의 느낌이라. 물론 세상에 둘도 없이 멋진 곳이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엄청난 자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객이 현지인의 일상을 비틀지 않은 점이 아닐까. 그보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한국을 아는지가 궁금했다.

"Well, Kangnam Style!(음, 강남스타일!)"

반가움과 놀라움 중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당황한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소년들은 크게 웃음을 터드렸다. 세상의 끝에서 온 소년들과 지구 반대편, '강남스타일'의 나라에서 온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정상에서 다시 만나자며.

겨우 살짝 모습을 드러낸 피츠로이
 겨우 살짝 모습을 드러낸 피츠로이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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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 호수를 지나치자 등산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본격적으로 험로가 시작되려는 그 순간, 또 다시 바람이 마법을 부렸고 그 잠깐의 찰나, 마침내 피츠로이의 봉우리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우리는 1년에 다섯 번 있다는 그 찰나의 순간을 만났다.

그리고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고비의 순간, 낮은 풀과 들꽃이 자리잡았던 주변의 풍경은 어느새 온통 눈과 얼음의 세상으로 탈바꿈했다. 더 이상은 허락할 수 없다는 피츠로이의 저항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빨리 그 정상의 모습을 보고 싶었고, 아찔한 경사와 몸이 잘 가눠지지 않을 정도의 바람을 꿰뚫고 제일 먼저 그 끝에 올랐다.

하얗게 얼어버린 로스 트레스 호수 위를 걷는 것은 겨울 시즌에만 가능하다
 하얗게 얼어버린 로스 트레스 호수 위를 걷는 것은 겨울 시즌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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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도착한 로스 트레스 호수(Laguna Los Tres) 에서 바라보는 피츠로이의 모습에 나는 신음소리와도 같은 비명을 질렀다. 단언컨대 그 모습은 그 전에도 후에도, 앞으로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더 아름다울 수 없을 것 같은 내 인생 최고의 절경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어떤 산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살짝 걸친 구름 사이로 멋을 부린 피츠로이는 당장이라도 나에게 뛰어내리라 외치고 있었고, 나는 이미 얼어버린,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호수 위에 철퍼덕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그리운 그 사람의 이름으로 마음껏 새하얀 도화지를 채웠다. 함께 오지 못한 그리움, 이런 풍경을 혼자서 본 것에 대한 미안함, 그 모든 것을 호수 위에 쏟아 내고는 눈사람을 세웠다. 늦게 도착할 여행자에게는 미안한 행동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어서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파노라마로 촬영한 피츠로이의 모습.
 파노라마로 촬영한 피츠로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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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이 나간 것처럼 피츠로이의 모습을 한 참 바라보던 우리는, 뒤늦게 도착한 우수아이아의 소년들이 얼음 위를 뒹굴기 시작할 때 자리를 비켜주었다. 언제 다시 이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싶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으려니 한 소년이 다가와서는 캠코더를 보여주며 먼저 제스쳐를 취한다. 그렇게 우리는 파타고니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피츠로이 앞에서 <강남스타일>에 맞춰 다같이 말춤을 췄다. 'Fitzroy Kangnam Style(피츠로이 강남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리겠다던 그들은 약속을 지켰을까?

그리고 그날 밤, 지구의 반대편에서 맞는 밤하늘에는 불빛도 잘 없는 엘찬튼 하늘의 우주 쇼가 펼쳐졌고, 나는 한국으로 가는 긴 편지를 썼다. 온 마을을 뒤져, 기억 속에 담긴 피츠로이와 가장 비슷한 모습이 담긴 엽서도 구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꼭 같이 오자는 이야기였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른 생각이 없었다. 본 적 없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겨우 한 장의 엽서와 글로 받아본 느낌은 어땠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내 기분을 전해주고 싶었던 거다. '아… 인생은 살아볼 만하구나' 하고.

가혹한 날씨 속에 숨은 또 다른 빙하, 쎄로 토레

피츠로이는 한껏 높아진 기대감이 두려울 정도로 여행에 대한 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때문에 이튿날 아침,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반대편 방향으로 가는 또 다른 트레킹 코스, '라구나 토레(Laguna Torre)'에 섰다.

흐린 날씨와 바람 때문에 시야가 불분명한 쎄로 토레
 흐린 날씨와 바람 때문에 시야가 불분명한 쎄로 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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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상황은 전날과는 전혀 달랐다. 출발한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잔뜩 성이 난 하늘은 점점 하늘의 푸른빛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중간지점에서 바라본 풍경은 온통 구름에 뒤 덮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고, 세 시간이 지나자 준의 무릎이 말썽을 부렸다. 시간에 맞춰서 하산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버스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무리는 하지 말자고 타일렀지만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최적의 자세를 찾아낸 준은 기어코 끝장을 보고자 했다.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생겨난 파도 때문에 전혀 얼지 않은 토레 호수(Laguna Torre)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생겨난 파도 때문에 전혀 얼지 않은 토레 호수(Laguna To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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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나 토레(Laguna Torre)'는 피츠로이와는 또 다른 신비로움이다. 다만 녀석은 피츠로이와 달리 사납게 몸부림 쳤다. 넓게 펼쳐진 호수 뒤로 자리잡은 빙하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 몸부림에 떨어져 내려온 유빙 조각이 물가에 찰랑인다. 어떻게든 다가가려고 애를 쓰면 한 무더기의 모래알들이 온몸을 덮쳤다. 몇 번이나 날려갈 뻔한 카메라를 부여 쥐고 어떻게든 자세를 잡으려고 하면 이번에는 카메라를 쥔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왜 그리도 혹독한 바람이 불었을까. 구름이 살짝 걷힌, 보지 말았어야 할 피츠로이를 봐버린 대가였을까? 한 걸음을 나서면 다시 한 걸음이 밀려날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부는 길의 끝에서, 구름인지 얼음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뒤엉킨 산맥과 색이 바랜 빙하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벌렸지만 허사였다. 바람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뒤 흔들어 놓았고, 결국 우리는 호수 저 깊숙한 곳의 빙하까지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 순간에 페리토 모레노 빙하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을 하나 더 두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엘찰튼의 푸른 들판과 마을 입간판, 그리고 라구나 토레 너머에 자리잡은 빙하의 모습
 엘찰튼의 푸른 들판과 마을 입간판, 그리고 라구나 토레 너머에 자리잡은 빙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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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에 이어 왕복 6시간의 트레킹을 끝낸 뒤에도 두근거림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기껏 산에서 눈을 떼면 엘찰튼의 포근한 들판이 고개를 들고, 그마저 외면하면 엘찰튼의 화려한 간판이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작정 머무르고 싶은 엘찰튼. 그때에는 저 아름다운 뒷산을 마음껏 오를 수 있겠지.

그렇게 돌아가는 버스를 눈앞에 두고, 구부정한 자세로 무릎을 움켜지고 있는 준에게 나는 진심 어린 사과와 감사의 말을 동시에 전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파타고니아를 지나쳤을 테니까.

버스는 산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목을 길게 뺀 채, 그 산에 끌려가고 있었다. 더 이상 그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 생생한 기억 위에, 다른 그림을 얹을 준비가 아직 되지 않은 것이다.

너와 나는 결국 만날 운명이었던 것일까, 피츠로이. 차오(Ciao, 또 만나자), 엘찰튼.

기타여행정보
피츠로이 트레킹은 아래 두 가지로 나뉜다.
라구나 로스 트레스(Laguna Los Tres) : Cerro Fitzroy를 보기 위한 코스. 왕복 7시간.
라구나 토레(Laguna Torre) : Cerro Torre와 만년빙하를 볼 수 있다. 왕복 6시간.
(모든 입장료는 무료, 2012년 10월 기준)

라구나는 '호수', Cerro는 '봉우리'를 각각 뜻하며, 두 코스 모두 거의 평지에 가까운 길이 대부분이라 특별한 장비가 전혀 필요 없는 산행이다. 다만, 라스 트레스 코스의 마지막 90분 정도는 1년 내내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경사진 곳으로 주의가 필요하다.

저녁8~9시 사이에야 해가지는 엘찰튼의 특성상 오전 내에만 출발하면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마을로 내려올 수 있기 때문에 엘 칼라파테에서 오전에 버스를 타고 엘찰튼에 도착하자 마자 트레킹을 출발하는 사람이 많다. 두 코스를 모두 둘러보기 위해서는 엘찰튼에서 1박을 해야 하며, 일출을 보기 위한 카프리 호수의 캠핑은 무료지만 장비는 마을에서 빌려야 한다.

한편, 피츠로이의 고도가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날씨가 좋으면 두꺼운 한겨울 옷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정상에서 체온유지가 가능하다.

좀 더 자세한 피츠로이 트레킹 코스 분석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0862925



태그:#엘찰튼 트레킹, #피츠로이트레킹, #세로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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