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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결혼식 축의금에 대한 TV 토크쇼를 보았다. 한 출연자가 결혼식을 치른 다음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준 축의금 액수가 떠오르면서 대접도 그에 따라 달리하게 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인간관계가 축의금 액수로 오염되는 현실에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세태를 반영하는 솔직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가의 "명품 패딩"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전 대통령의 손녀가 입어서 더 유명세를 탔는데, 한 벌 가격이 100만 원을 훨씬 넘는다. 이걸 사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도 많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부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도 만연하는 "명품 열풍"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제는 '보통'의 사람들이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집에 살면서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 불과 50-60년 전까지만 해도 천국에서나 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새해 인사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선거철이면 "더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경제공약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곤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논의의 시발점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처입고 분열된 현대인의 내면세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는 산업자본이 부추기는 소비의 욕망, 소비가 끝난 후 찾아오는 결핍감과 가벼워진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노동, 주머니가 채워진 후 다시 타오르는 욕망과 함께 소비가 되풀이되는 동안 우리의 내면이 상처입고 병들어 간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다.

'소비의 자유'... 알고 보면 '돈에 대한 복종'

모피코트는 과거에 부의 상징이었지만 질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기는 비윤리성이 알려지면서 모피에 대한 시선은 많이 변했다. 동물학대를 멈추기 위해 모피에 각인된 기호를 벗겨내는 한편 지각있는 소비를 촉구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 모피코트의 잔인성을 알리는 포스터 모피코트는 과거에 부의 상징이었지만 질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기는 비윤리성이 알려지면서 모피에 대한 시선은 많이 변했다. 동물학대를 멈추기 위해 모피에 각인된 기호를 벗겨내는 한편 지각있는 소비를 촉구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우하는 사람들(P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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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는 이전 사회보다 많은 자유와 기쁨을 선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주위에 널린 풍요가 그림의 떡에 불과한 사회에서 자유는 삶의 자유가 아닌 "소비의 자유"일 뿐이다. 자본가가 아닌 사람이 소비의 자유를 누리려면, '돈'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인, 그 자체로는 별로 즐겁지 않은 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 소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돈에 대한 복종"을 수반한다. 

그런데 산업자본주의에는 끝없이 소비를 창출하고 잉여가치를 획득해야만 존속할 수 있다는 아킬레스건이 있다. 만약에 소비자들이 구입한 물건을 전부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쓴다면" 공장은 문을 닫아야 하며 산업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산업자본주의는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인간의 허영심을 자극해서 극복했다. 산업자본은 기능적 측면이 기존 제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신제품에 '행복' '상류계급' 등을 암시하는 '기호가치'를 불어 넣어 차별화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타인과 구별 짓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허영심을 부추겨 구매를 유도하고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방식으로 존속해왔다.

다시 말해서 산업자본주의 발달의 핵심에는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을 자극해서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소비의 논리"가 있다. 예를 들어 삶에 꼭 필요하지도 않고 다른 제품으로도 얼마든지 보온효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사람들이 고가의 밍크코트로 자신을 과시하는 이유는 패션자본이 각인시킨 "부의 상징"이라는 기호에 유혹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구매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그러나 산업자본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고 지금 모습 그대로 자부심을 느끼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이 옷을, 이 자동차를, 이 집을 구매하는 당신이 상류계급"이라는 신화를 끝없이 유포한다.

그리고 이런 신화는 선택받은 소수에 속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욕망과 결합한다. 산업자본은 타인의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허영심을 간파하고, 그것을 증폭시키고 길들였다.

프랑스어로 "비계투성이 간"을 의미하는 푸아그라는 오리나 거위의 식도에 호스를 끼우고 엄청난 양의 사료를 강제로 먹여 지방으로 가득한 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절제를 모르는 탐욕이 빚어낸 동물학대 때문에 본토에서는 혐오식품으로 퇴출되고 있지만, 그런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상류층 요리"라는 기호로 포장되어 미식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 푸아그라의 잔인성을 알리는 포스터 프랑스어로 "비계투성이 간"을 의미하는 푸아그라는 오리나 거위의 식도에 호스를 끼우고 엄청난 양의 사료를 강제로 먹여 지방으로 가득한 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절제를 모르는 탐욕이 빚어낸 동물학대 때문에 본토에서는 혐오식품으로 퇴출되고 있지만, 그런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상류층 요리"라는 기호로 포장되어 미식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우하는 사람들(P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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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면...

저자는 산업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한 가지 현실적인 대안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에서 추진한 생산-소비 협동조합과 '미래화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내에서 진행되는 LETS 운동을 소개한다.

변화의 움직임은 아직 미미하지만, 저자는 사람들이 상처의 심각함을 통렬하게 느끼고 치유의 의지를 갖는다면 변화를 위한 실천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구체적인 대안이나 해법을 제시하기 보다는 자본주의 때문에 상처받은 삶을 묘사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변화는 오랜 논의와 시간을 거쳐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욕망이 정말로 나의 것인지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자세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실천 가능한 방법 중 하나다.

아무리 "부자되라"고 외쳐도 사회 구성원 절대 다수가 명품패딩을 부담없이 구매할 수 없다면, 필요 이상의 소비는 우리를 고단한 노동으로 내몬다.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을 비싼 물건으로 치장해 남들의 부러운 시선에서 행복을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교훈도 되새겼으면 한다.

아무리 산업자본이 유혹해도 '욕망'이라는 밑 빠진 독을 '소비'로 채우기보다는 애초에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일상의 철학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프로네시스(웅진)(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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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강신주, #상처받지 않을 권리, #프로네시스 , #허영,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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