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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KBS)에서 피디(PD)로 일하는 제자가 하나 있습니다. 2011년, 김인규씨가 한국방송 사장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한국방송 사내에서는 수신료 인상 논란이 거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김 전 사장은 방송을 관제 특집프로그램으로 도배했다는 안팎의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전대미문의 야당 도청의혹 사건이 터졌습니다.

2011년 6월 23일, 민주당은 한국방송 수신료 인상에 관한 대응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당 최고위원·문방위 의원 연석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나온 발언 내용이 그 이튿날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민간인 불법 사찰 문제로 정국이 온통 들끓고 있던 때였습니다.

도청의 유력한 주체로 한국방송이 지목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습니다. 하지만 의혹의 핵심 당사자인 한국방송에서는 사장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책임 있는 해명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의 제자도 포함되어 있는 한국방송 29기~35기(입사 2~8년차) 피디 148명이 '도청의혹 해명'을 요구하며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2011년 7월 25일이었습니다.

제자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외 알바로 독학하다시피 하면서 언론학을 공부한 녀석이었습니다. 스스로 땀 흘려 챙긴 돈으로 외국 연수를 나가는 당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당당하게 한국의 '대표 방송'인 한국방송 피디가 되었습니다. 제자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피디 생활을 통해 맘껏 보람을 찾기를 바랐습니다. 꿈을 펼치는 데 주저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성명서'라니요. 중견 직원도 아니고 '막내'뻘 피디에 불과한 제자에게는 벅찰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전화 통화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몇 개의 문자 메시지를 통해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별 일 없다는 목소리와 문자는 흔연했지만, 제 마음은 여전히 왠지 불안했습니다. 김 전 사장은 사내게시판 통제를 강화하면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글을 삭제하거나 징계를 했습니다. 그는 그전 2월에 벌어진 <추적 60분> '4대강' 편 불방 사태의 여파로 한국방송 노조로부터 '징계 중독증'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불똥이 정의감 넘치는 제자에게 튀지 말란 법이 없었습니다.

그 해 연말엔가, 서울에서 1주일짜리 합숙 연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시간 짬을 내어 여의도로 향했습니다. 반갑게 제자를 만났습니다.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제자가 먼저 회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싶었습니다. 힘들어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먼저 묻지 않았는데도 자조와 냉소의 분위기가 넘치는 당시 사내 분위기를 전해줬습니다. 굳세게 맘 다잡고 지내라는 말을 뒤로 한 채 떠나오는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허두가 턱없이 길었습니다. 난데없이 저의 제자 이야기를 꺼낸 까닭이 있습니다. 예의 성명서 끝에 새겨진 한 문장 때문입니다.

'사장님 힘내세요. 수신료를 꺼내기에 앞서 언론이 먼저입니다.'

제자와 그의 동료들은 위기 속에서도 재기발랄했습니다. 지난 1999년,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검찰청 건물 현관에 도열해 있던 <중앙일보> 기자들이 '피의자' 회장을 향해 '사장님 힘내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언론사에 부끄러운 이야기로 길이 남을 그 외침을, 2011년의 한국방송 막내 피디들이 이렇게 멋지게 비틀어 외친 것입니다.

저는 2011년에 제 제자와 그의 동료들이 힘주어 외친 이 한 마디를, '종박방송'과 '김(K)비(B)서(S)'(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자임하는 한국방송을 조롱하는 신조어-기자 주)가 되고 있는 한국방송을 향해 돌려주고 싶습니다. 난데없는 수신료 인상 방안 발표 때문입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0여개 단체는 11일 오전 KBS 본관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사회적 합의 없이 날치기 처리한 수신료 인상안을 즉각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0여개 단체는 11일 오전 KBS 본관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사회적 합의 없이 날치기 처리한 수신료 인상안을 즉각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 유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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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한국방송 이사회가 774차 이사회를 열어 현재 월 2500원인 수신료를 4000원으로 인상하는 내용의 '텔레비전 방송 수신료 금액 조정안'을 의결했습니다. 현재 수신료 2500원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1년에 책정된 금액입니다. 33년간이나 동결됐으니 수신료 인상을 말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신료 인상안이 발표될 때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신료 인상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한국방송 전체 재원의 40퍼센트가 되지 않는 수신료 비중을 높여 광고 비중을 줄이겠다는 '건전한' 계획을 내세워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수신료 인상이 절대악이서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왜 수많은 국민이 한국방송의 수신료 인상에 대해 '결사 투쟁'하듯 반대 목소리를 높일까요.

어제(11일) 한국방송 길환영 사장이 수신료 인상안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서 '수신료 현실화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한국방송 신관에 마련된 기자회견장 단상 전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펼침막이 걸렸습니다. 그 펼침막 속에 답이 있습니다.

수신료 현실화 건강한 공영방송의 시작입니다

길 사장이 밝힌 논리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33년간 묶인 비현실적인 수신료가 문제다. 올해는 광고수입마저 줄어들어 창사 이래 최악의 재정난에 빠져 있다. 제작비가 삭감되고 있다. 프로그램의 공영성과 경쟁력이 약화한다. 총체적인 위기로 확대된다. 이런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적책무 수행마저 어려운 위기다.

요컨대 수신료를 올려주면 재원이 튼실해질 테니 그때부터 건강한 공영방송을 시작하겠다는 취지가 아닐는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인상'을 '현실화'로 호도하는 말법부터가 솔직하지 못합니다. 정녕 '현실화'인가요. 그렇다면 '종박방송'이니 '김비서'니 하는 식으로 조롱받는 한국방송의 '비현실'적인 위상을 '현실화'하십시오.

지금 많은 국민의 정서는 수신료 인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오죽하면 수신료 인상은커녕 형편없는 현재의 프로그램 수준에 맞춰 수신료 인하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비아냥이 나오겠습니까. 최근 언제 한국방송이 공영방송다운 면모를 갖추려고 노력했습니까.

수신료와 건강한 공영방송의 선후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난제가 아닙니다. 한국방송은 방송법상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돼야 한다는 길 사장의 말을 원용해 돌려 드리면, 방송법상 공영방송의 위상과 역할에 걸맞게 공정하고 합리적인 보도와 프로그램 제작에 헌신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법 조항을 빌려, 돈이 없으니 맡은 바 책무를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돈이 없어 학교 운영을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학교를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한국방송 수신료는 전기요금에 포함돼 강제 징수하는 방식으로 거둬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국민은 수신료 인상은커녕 이런 강제 징수 방식에 대해서까지도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수신료를 아예 내지 않겠다는 국민들도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저희 집입니다.

지난 봄, 저는 국번없이 '123번'을 눌러 '한전고객센터'에 전화했습니다. 곧이어 '상담원 연결 41번'을 눌렀습니다. 짤막한 문답이 이어졌습니다. 핵심 용건인 "집에 티브이가 없으니 한국방송 수신료를 없애 주세요"를 말함으로써 수신료 거부 과업을 완료했습니다.

'공영방송쟁취를위한범국민운동본부'와 '좋은사회를위한 참여시민연대' 명의로 만들어진 '매국방송 KBS 수신료 절대 안 내도 되는 길라잡이'(인터넷에 검색하면 쌔고 쌨습니다!)는 10단계에 걸쳐 한국방송 수신료 거부 방법을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애초 구닥다리 아날로그 티브이를 새 디지털 티브이로 바꾸자는 아내와 큰딸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장의 권위(?)로 거세게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김비서' 같은 지금의 한국방송이 미운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집안의 터줏대감 자리를 치명적인 '바보상자'에게 내줌으로써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별로 갖지 못하는 점도 고려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티브이를 없앤 지금 심정, 한 마디로 후련합니다.

길 사장께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수신료를 인상하고 싶으시다면 티브이를 없애고 수신료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저와 같은 국민들을 설득하십시오. 저는 우리나라의 대표 공영방송인 한국방송이 '권력의 나팔수'니 '김비서'니 하는 부끄러운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박방송'이라는 비아냥은 얼마나 모욕적인지요.

한국방송이 그 모든 것에서 떳떳하기만 하다면, 저는 수신료를 4000원이 아니라 1만 원, 2만 원까지도 낼 의향이 있습니다. 티브이가 없지만, 아내와 딸과 함께 전자제품 가게로 가 좋은 티브이도 한 대 사겠습니다. 공영방송이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이 아니라 '하늘'이자 '주인'인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데 그깟 돈 1, 2만 원이 아깝겠습니까.

길 사장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의 기자회견에서 대하드라마를 1년에 1편 제작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책무라고 말씀하셨더군요. 제 우둔한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대하드라마와 공영방송 간의 상관 관계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국방송의 본질인 '공영성'의 철학을 다시 한 번 점검하십시오. '공공재'로서의 한국방송의 위상을 각별히 인식하십시오. 그제 국회에 내민 수신료 인상안은 당장 거둬들이십시오. 대신 여야 정치권을 향해 한국방송의 제도적인 메커니즘이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법적 정비를 해 달라고 당당히 요청하십시오.

잘 아시다시피 지금 한국방송을 좌지우지하는 인적 제도 메커니즘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입김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국방송 사장은 여당과 야당 추천 인사가 7 대 4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방송 이사회의 추천을 통해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한국방송 이사를 추천하는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또한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사장 추천·임명이나 이사 추천과 관련한 제도 개선 없이는 공명정대한 공영방송은 헛구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열혈의 젊은 피디들이 자조와 냉소에 빠져 있는 한국방송 내부를 향해서도 혁신의 메시지를 전해 주셔야 합니다. 길 사장 본인의 목을 걸고 보도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십시오. 현장을 뛰는 기자와 피디들이,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뉴스를 마음껏 취재하고 편집해 방송할 수 있도록 힘을 실으십시오. 권력이 견제하고 핍박을 가하거든 국민에게 달려오십시오. 그런 제2, 제3의 '깨어 있는 길환영'이 나올 수 있도록 건강한 토론과 상호비판의 문화를 한국방송 안에 자리매김하는 일에 힘을 쏟으십시오. 2011년에 제 제자를 포함한 한국방송의 젊은 피디들이 외친 그 한 마디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장님 힘내세요. 수신료를 꺼내기에 앞서 언론이 먼저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KBS 수신료 인상, #공영방송, #공공재, #길환영 사장, #'김(K)비(B)서(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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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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