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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이 차고 큰 배추를 김장용으로 골라내고 있다.
 알이 차고 큰 배추를 김장용으로 골라내고 있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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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수요일, 낮이 되어도 영하의 날씨는 여전하고, 눈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하더니 김장을 시작하기로 한 오후 2시가 가까워오자 눈발이 점점 더 거세어진다.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느라 하늘 한 번 쳐다보고는, '어쨌거나 하는 거지 뭐'하는 마음으로 공양간 앞으로 내려간다.

배추 준비하는 모둠, 쪽파 다듬는 모둠, 갓 씻는 모둠, 무 자르는 모둠 등으로 나눠서 일을 시작했다. 각 모둠은 1,2,3학년이 고르게 나누어지고, 그동안 우리 학교에서 두 번의 김장을 해본 3학년들이 주로 주도하며 일을 진행한다. 폭풍에 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치고 들어오고, 천막의 기둥이 날아가려 해서 기둥을 잡느라 애쓰면서 첫날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눈보라 속에서 뽑아온 쪽파는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깨끗이 씻고 다듬고나니 기분이 좋다.
 눈보라 속에서 뽑아온 쪽파는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깨끗이 씻고 다듬고나니 기분이 좋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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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 김장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눈보라 속 김장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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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추위에 반팔과 슬리퍼로 맞서는 청춘들이 있다! 잘 챙겨 입으라는 말을 가끔 하기도 하지만, 그런 말이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였고, 또 이렇게 지내도 생각만큼 아이들이 아프질 않는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 이후로는 별로 걱정하질 않는다. 젊음의 특권이려니. 나 역시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은 맘으로 그냥 부러울 뿐.

먼저 마친 모둠이 배추 자르고 절이는 작업까지 하고나니 날은 어둑해지고 칼바람은 여전하다. 추위에 한나절을 애썼는데, 작은 가정(아이들 4~7명이 선생님들과 함께 밥 해먹고 사는 집) 아이들이 다시 집에 가서 밥 해먹기가 힘들까봐 모두들 학교에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밥 먹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칠흙같은 어둠에 칼바람에 길도 조금 언 듯하고 갈 길이 멀다. 밥을 해먹더라도 조금이라도 일찍 집으로 보내는 게 나았으려나 싶지만, 이미 늦은 일. 조금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더니 아이들은 집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첫째날의 눈보라를 지나고 나니 여전히 춥지만 상당히 평화로운 둘째날을 맞았다.
 첫째날의 눈보라를 지나고 나니 여전히 춥지만 상당히 평화로운 둘째날을 맞았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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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둘째 날 오후, 전날 절여놓은 배추를 씻었다. 여전히 춥지만, 다행히 폭풍과 눈은 멈춰서 감사한 마음으로 씻는 일을 하였다.

"앞치마 끈 묶어줄래?"
"나 뒤에 모자 좀 빼내줘."

"모자 좀 빼줘", "응. 알았어" 앞치마를 하고, 이제 배추 씻을 준비를 한다.
 "모자 좀 빼줘", "응. 알았어" 앞치마를 하고, 이제 배추 씻을 준비를 한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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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물을 만지는 작업을 해야 하는 날이어서 모두들 앞치마와 고무장갑으로 무장을 했다. 비닐 속에 있는 절여진 배추를 꺼내서 3단계의 씻는 과정을 거치고, 다 씻어진 것은 평상으로 옮겨 물기 빼는 작업을 한다. 전날의 날씨가 하도 강력해서였는지 추운 물 작업을 하는 와중에서도 아이들은 군소리 없이 즐겁게 일을 한다. 둘째 날부터는 김장의 재미가 조금씩 생겨난다. '간이 잘 배었나?' 하면서 한잎 뜯어 먹어보는 배추의 맛이 감동이다.

깨끗이 씻은 배추는 이렇게 경사진 평상에서 하루 동안 물기를 뺀다.
 깨끗이 씻은 배추는 이렇게 경사진 평상에서 하루 동안 물기를 뺀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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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셋째 날 오전. 이틀 동안 실상사의 김장을 돕느라 함께 못했던 언니네(고등학교 과정) 선배들도 올라왔다. 이날은 김장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양념 버무리는 날. 운반조가 배추와 양념을 날라다 주면, 탁자에 모둠별로 앉아있는 우리는 먹음직스럽게 그것을 버무린다. 대부분이 실내 작업이라는 것도 좋고, '맛이 괜찮나?' 하며 한 입 먹고 먹여주는 맛도 꽤 쏠쏠하다. 그리고 조금 있다 우리들의 밥상에 오를 수육 삶는 냄새가 행복감의 정점을 찍어준다.

오전 9시부터 점심시간 즈음까지 할 거라 생각했던 일이 오전 11시도 되기 전에 마무리되자 엄청난 함성이 공양간을 가득 채운다. '우리 모두 너무 수고했어!'라는 기운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뿜어내며 마무리를 한다. 이제 쉬고 놀다가 수육 먹는 일만 남았구나.

"아~ 한 입 먹어봐~!"
 "아~ 한 입 먹어봐~!"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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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모두들 원없이 고기를 흡입했고, 나는 비계 덩어리 몇 개를 골라냈다. 몇 달 전, 앞집에서 진돗개 한 마리를 주셨는데, 대인기피, 애정결핍, 폐쇄공포 등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우리 집으로 왔다. 많은 애정과 손길이 필요한 생명인 것 같은데, 그닥 개를 예뻐하는 편이 아닌 나에게 온 것이 잘못된 인연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의 작은 애정만으로는 안 되겠고, 아이들의 집단적 애정에 기대어봐야겠다 싶어서 얼마 전부터 출퇴근을 같이 하고 있다. 며칠 안 되었지만, 집단적 애정의 힘이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출퇴근을 같이 하면서, 나와의 애정도 조금씩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고기를 좀 챙겨주었더니 진돌이(내가 한동안 이름을 짓지 않고 그냥 있으니 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이 이렇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성의없음의 극치'인 작명이다)도 폭풍흡입을 했다. 김장의 혜택이 우리 진돌이에게도 미치는구나.

또, 지난 일요일에 광주에 있는 대안학교인 지혜학교 중학교 3학년 세 명이 우리 학교에 탐방을 와서 금요일까지 함께 지냈다. 김장 일정이 그 기간에 포함돼 있어서 우리와 함께 김장 과정을 온전히 같이 했다. 집에서 김장 담그는 것을 조금 도왔던 경험은 있지만, 이렇게 대규모의 김장은 처음 해본다고 한다. 지혜학교에서는 식당 선생님들이 김장을 담그신다고 한다. 애썼다고 엄청 큰 통에다 김치를 담아서 가져가라고 하니, 대중교통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이들은 그냥 됐다고 웃으며 사양한다. '고생했으니 이건 꼭 가져가야 한다'며 웃으며 그러나 비타협적으로 주시는 선생님 때문에 아마도 그 세 친구는 광주까지 가는 데 힘 꽤나 썼을 것 같다.

이렇게 우리들의 겨울 축제, 눈보라 속에서 천막의 기둥을 부여잡아가면서 진행되었던 과정이 결코 쉽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김장이 끝났다. 졸업하는 친구들은 이 김치의 맛을 조금 보다가 이곳을 떠날 것이고, 이제 내년에 입학하는 친구들이 이 김치를 1년 동안 먹게 될 것이다.

"이 정도 쯤이야 가볍죠~!" 무거운 배추 박스, 김치 박스를 너끈히 들어 옮기는 일꾼들의 팔뚝이 멋있어 보였다.
 "이 정도 쯤이야 가볍죠~!" 무거운 배추 박스, 김치 박스를 너끈히 들어 옮기는 일꾼들의 팔뚝이 멋있어 보였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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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추수, 김장 등은 작은학교가 1년의 살림을 준비하며 모두가 함께 해내는 연례행사이자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축제는 무슨?"이라며 반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그러나 서로의 앞치마를 묶어주고 장갑을 끼워주는 모습 속에서,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김치 맛을 느끼며 무거운 배추 상자 나르는 일에 빼지 않고 나서는 아이들의 믿음직한 팔뚝을 보면서, '아, 우리는 지금 축제를 벌이고 있구나!'라는 느낌으로 행복해진다.

우리가 먹을 것을 우리 스스로 준비하는 일, 그리고 그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 마음들, 그리고 추위에 얼어붙은 속에서도 피어나는 웃음꽃들.

이 정도면 우린 축제 중인 거 맞지 않나?

우리가 기른 배추, 잘 자라준 배추에게 경배를~!
 우리가 기른 배추, 잘 자라준 배추에게 경배를~!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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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장응모글



태그:#실상사작은하교,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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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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