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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스승의 날이 아니라도, 졸업한 제자들이 이따금 학교를 찾아온다. 마치 취직해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내복 사서 선물하듯 취직 '턱' 내기 위해 부러 찾은 '올드 보이'도 있고,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은 한 해 대학생활이 어땠는지 소감을 들려주며, 후배들에게 조언도 할 겸 학교를 찾는다. 여하튼 교사로서 뿌듯하고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물론, 썩 유쾌하지만은 않는 경우도 있다. 일테면 재수를 할 요량으로 대입 원서를 다시 쓰기 위해 오거나, 서둘러 군에 입대하게 됐다며 인사를 하러 오는 경우다. 대개는 대학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잘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교직 경력이 쌓이다보니 요즘엔 굳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먼발치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왜 왔는지 대충 직감할 수 있다.

이든 저든 그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요즘 대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게 돼 그들의 후배인 지금 고등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다. 그런가 하면, 20여 년 전 나의 대학생활 때와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면서 몸과 마음이 한 뼘 젊어지는 걸 느끼기도 한다. 그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게, 어쨌든 알찬 이유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 해병대 간다는 이유가...

ⓒ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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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숫제 한 무리의 제자들이 들이닥쳤다. 2년 전에 졸업한 아이들이다. 고3 때 같은 반 동급생들이었는데, 지금도 연락을 하며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외려 대학에 와서 만난 친구들보다 훨씬 더 친하다면서. 낼 모레 군에 입대한다는 친구를 위로하려고 모인 거란다. 그들 중 다른 한 아이는 이번 학기 마치고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다고 했고, 나머지 둘은 1년 정도 휴학해 이러저러한 자격증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했다.

어떻든 그들 모두는 당분간 학교를 벗어나 있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의 추억담을 이야기 나눌 줄 알았는데, 웬 걸, 두 시간이 넘도록 그들이 다닌 대학의 '뒷담화'만 늘어놓았다. 대화에 낄 수도 없었지만, 굳이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듣기에 조금 불편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의 대화를 통해 본 대학과 대학생의 모습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담하고 처절했다. 모임의 '주인공'이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저 낼 모레 포항으로 들어가요."

해병대에 자원했다는 이야기다. 학창시절 그야말로 '범생이'였던 그다. 체육시간 때도 운동장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단어장을 들고 공부만 하던 아이였는데, 해병대라니. 더욱이 '귀신 잡으러' 가는 사람치고는 결기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아 물었다. 굳이 해병대에 자원한 까닭을.

"어차피 누구나 다 가는 군대, 다른 병과보다 취직할 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더욱이 해병대 출신이라면 끈끈한 전우애를 통한 관계망에다, 사회에 나가서도 나름 주변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사나이'로 인정받는다잖아요. 요즘엔 학군단(ROTC)보다 해병대가 대세라고들 해요."

아뿔싸. 이젠 해병대 근무 경력조차 '스펙'으로 활용하는 시대가 됐다. 고작 대학 2학년인 그는 이미 토익 점수가 800이 넘고, 일본어와 한자, 컴퓨터 활용 능력 자격증 등도 두루 갖고 있다는데, 그 정도로는 불안하다고 했다. 그 정도는 기본이고, 이미 증권투자상담사 등 금융 관련 자격증 몇 개를 딴 친구들도 있다면서.

그 자리에 짐짓 놀라워하는 나만 빼놓고는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덤덤했다. 사범대에 들어간 친구들은 입학과 동시에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경영학과나 금융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면 졸업할 때 관련 자격증 서너 개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맞장구쳤다. 그나마 '지잡대'에 다니는 경우라면, 자격증이 아무리 많아도 별 소용이 없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찾아온 네 명 중 둘은 '인(in)-서울대'에 다니고, 나머지 둘은 '지국대'에 재학 중이다. '인-서울대'란 행정구역 상 서울권에 자리한 대학을 말하고, '지국대'란 지방의 국립대학을 그들끼리 일컫는데, 서열 상 '인-서울대' 바로 아래에 자리한다. '지잡대'란 지방 소재의 이름 없는 대학들을 싸잡아 부르는 말로, 요즘 대학생들에게 '보통명사'처럼 쓰인다고 한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자격증, 이 모든 게 다 불안해서?

그들에게 '구세대'의 대학생활을 들려줬다. 내겐 추억담이었지만, 그들에겐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괜히 거부감이 생길까 싶어, 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탄 연기 뒤집어 써야 했던 '데모'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새내기 시절 즐거웠던 엠티(MT) 이야기와 동아리방과 학생회실을 제 집 드나들 듯 했던 기억, 밤늦도록 세미나를 한 후 가진 뒤풀이 때문에 수업에 빠진 일 등, 제자들 앞에서 간만에 대학시절 추억을 반추할 수 있었다.

손자가 외할머니 무릎 위에서 옛이야기 듣듯 내 말에 모두 귀를 쫑긋 세웠지만, 그들에게는 모든 게 낯설다는 표정이었다. 20여 년이 지나도 또렷이 기억되는 소중한 추억들이지만, 그들은 지금 대학에서 볼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데모'는 '사어(死語)'가 된 지 이미 오래고, '생존한' 동아리와 세미나는 손에 꼽을 정도란다. 취업에 직접적인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한 대학생활을 그대로 옮겨본다.

"'실용 학문'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과조차 통폐합하는 마당에 동아리는 무슨… 아마 영어회화나 자격증 취득을 목적으로 하는 동아리 외에는 거의 사라졌을 걸요. 동아리 수가 줄어든 탓인지, 동아리방이 모여 있던 학생회관 일부가 카페나 휴게실로 리모델링하는 같더라고요. 학생들도 좋아하는 눈치고요."

"작년 초, 과 엠티를 다녀왔는데, 새내기 여섯에 선배들 셋이 전부였어요. 그나마 3, 4학년 선배는 단 한 명도 없고, 모두 2학년이었어요. 썰렁한 분위기에서 하루를 보낸 기억밖엔 없어선지, 올해는 그냥 안 갔어요. 나중에 들으니, 올 초에는 아예 엠티 자체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과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만은 비슷할 걸요."

"학생회장 선거 때 투표함과 투표용지를 옮겨가며 치르는 걸 보고,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어요. 생각해보면 투표율을 높이려는 고육지책이었던 셈인데, 중요한 건 공약은커녕 누가 출마하는지도 모르는데 투표율만 높여서 뭐하나 싶었어요. 모르긴 해도, 재학생들 중에서 현재 학생회장이 누군지 아는 경우는 채 절반도 안 될 걸요."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 임원을 하며 학교 축제를 기획해 본 경험이 있어서, 대학 축제에 대한 기대가 자못 컸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축제를 기획하기는커녕, 남의 잔치의 손님과 관객일 뿐이었어요. 며칠 간 교정 곳곳에서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이벤트 기획사에 공연을 일임한 채 걸 그룹 등 유명 연예인 몇몇 불러다가 '광란의 밤'을 즐기도록 하는 게 전부였어요. 그것도 학생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 사업이라면서."

"고등학교 때 생활과 별반 달라진 게 없어요. 옛날엔 안 그랬다던데, 요즘엔 커리큘럼도 대개 학년별로 정해져 있어요. 그러하니 수강신청도 친구 따라 강남 갈 수밖에 없어요. 강의 듣고, 빈 시간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자격증 학원 한두 곳 다니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에요. 시험 앞두고 벼락치기 하는 것조차 똑같아요."

"하루 일과도 그렇지만, 4년 동안의 과정도 대학생들마다 대동소이해요. 1학년 우왕좌왕 보내다 2학년 때 군대 가고, 3학년으로 복학해 공부에 적응하다 한 학기 정도 어학연수 다녀와 한두 학기 졸업을 미루고 이런저런 자격증 준비하며 취업에 올인 하는 것이 하나의 '공식'이거든요. 선배들이 이미 경험했고, 저희 역시 후배들에게 그렇게 알려줘요."

아이들은 겨우 대학생활 2년 만에 이구동성 대학을 이렇게 규정했다. '오로지 취업을 위한 고액 학원.' 상아탑이고 지성인이고, 모두 옛말이라며 스스로를 폄하했다. 그러면서 한 아이는 지난 2년간 전공과 영어 교재 등 수험서적 외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다른 친구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인지, 아쉬워하거나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한가하게 교양서적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거다. 그 시간에 수험서적을 '파는' 것이 유리하다는 가히 본능적인 판단에서다. 책을 읽고 싶어도 자격증이 눈에 아른거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취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면, 그 무엇이 됐든 '시간 낭비'라며 불안해했다. 요즘엔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못 보던 수험서적만 들고 다니기만 해도 불안하단다.

고등학교 시절 밤늦게 야자를 하는 것도, 방과 후나 주말에 학원과 독서실에 다니는 것도 다 '불안해서'라고 하더니, 어엿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아이는 특히 또래 여학생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독기를 품은 것 같다'면서, 불안해하지 않는 게 외려 이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취업에 가려 정의를 말하지 않는 너희들

곧, 그들과의 대화는 모두 취업으로 귀결되었다. 동아리 활동과 과 학생회 활동이 위축되는 것도, 학생회장 선거에 관심이 멀어진 것도, 학교생활이 획일화 돼 가는 것조차도 모두 대학이 시나브로 '취업 학원'으로 전락하면서 나타난 신풍속도다. 하긴 대학마다 매년 신입생 모집 요강을 발표할 때 앞세우는 게 취업률이고 보면,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그래도 대학생이 우리 사회의 희망이다. 너희들이 '정의'를 말하지 않으면, 누가 이야기하겠느냐?사진은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회원들이 지난 7월 9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원 '셀프개혁' 지시 규탄 및 책임자처벌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
 그래도 대학생이 우리 사회의 희망이다. 너희들이 '정의'를 말하지 않으면, 누가 이야기하겠느냐?사진은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회원들이 지난 7월 9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원 '셀프개혁' 지시 규탄 및 책임자처벌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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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진대, 그들에게 국가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사태나 밀양의 송전탑 갈등,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문제, 최근의 필리핀 태풍 재해 등 굵직한 사회적 이슈들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요구는 연목구어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두 시간여 동안, 대학 2학년생 그 또래들끼리의 대화에서 족히 몇 번은 나왔음직한 그 흔한 연애담조차 들을 수 없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씁쓸한 마음으로 그들의 대학생활을 듣노라니, 얼마 전 읽은 어느 잡지에 실린 글이 생각났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보낸 편지 형식의 글로, 제목이 매우 자극적이었다. '벗들이여, 짓지 않는 개로 살 것인가.' 대학생이 주도했던 민주화의 역사를 예로 들며, 불의가 횡행하는 데도 분노할 줄 모르는 대학생들의 나약함을 지적한 것이다. 제자들의 건투를 빌며, '덕담' 한 마디 건넸다.

"그래도 대학생이 우리 사회의 희망이다. 너희들이 '정의'를 말하지 않으면, 누가 이야기하겠느냐? 과거에도 '취직만 시켜준다면 영혼도 판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취업이 쉬웠던 적은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경제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나. 취업에 가려 '정의'를 말하는 입이 부담스러워지면, 더 이상 대학생이 아니다."

"'삼포 세대'니, '잉여 세대'니 자조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조금도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부정선거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닥쳐도, 양극화로 사회가 갈기갈기 찢겨도 나 몰라라 하는 대학생은 '악의 편'이야."

굳이 그들을 이해하자면, 뿌리 깊은 불안감이 사회적 불신과 무기력함을 낳고, 그들을 불의에 둔감하게 만드는 요인인 듯했다. '덕담'에 그들도 한 마디를 던졌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변명처럼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 솔직히 그런 지적을 들으면 서운하고 불쾌해요. 기성세대들은 정작 우리 사회를 '정글'로 만든 자신들의 책임은 회피한 채, '을'인 저희들이 불안에 떠는 소심하고 나약한 면만 질책하는지 모르겠어요. 취업을 향한 무한경쟁의 전쟁터에서 각자도생의 길은 저희가 '선택한' 게 아니라,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것일 뿐이에요."


태그:#대학생 취업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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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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