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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
적(敵)이란 해면(海綿) 같다
나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문어발 같다

흡반 같은 나의 대문의 명패보다도
정체 없는 놈
더운 날
눈이 꺼지듯 적이 꺼진다

김해동(金海東)―그놈은 항상 약삭빠른 놈이지만 언제나
부하를 사랑했다
정병일(鄭炳一)―그놈은 내심과 정반대되는 행동만을
해왔고, 그것은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였다
더운 날
적을 운산(運算)하고 있으면
아무 데에도 적은 없고

시금치밭에 앉는 흑나비와 주홍나비모양으로
나의 과거와 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
"적이 어디에 있느냐?"
"적은 꼭 있어야 하느냐?"

순사와 땅주인에서부터 과속을 범하는 운전수에까지
나의 적은 아직도 즐비하지만
어제의 적은 없고
더운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고
더워진 날처럼 어제의 적은 없고
(김수영의 시 <적> 1962. 5. 5)

수영은 늘 스스로 자신의 '적'을 만들어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주변에 '적'들이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적'을 말하던 그 시절은 사방천지에 '적'이 넘쳐났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적은 한국의 정당과 같은 섹트주의가 아니라 우리들 대 이여(爾餘) 전부이다. 혹은 나 대 전 세상이다."(<김수영 전집 2 산문> 241쪽 중)

수영에게 '적'은 세상 전부였다. 그에게는 '적'이 한두 부류가 아니었다. '적'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었다. <사령>(死靈)에서 보이는 '적'은 '자유'를 말하지 못하는 시인 자신이었다. 죽은 영혼(사령·死靈)의 주인공인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다시 한 번 그려진다.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는 시인의 옹졸과 비겁은 '정서'처럼 고질적이었다. 그만큼 시인은 그 자신의 '적스러움'을 아파했다.

어딜 가든 만날 수 있는 '적'

시인 김수영. 이미지는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전집>에 실린 것임을 밝힙니다.
 시인 김수영. 이미지는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전집>에 실린 것임을 밝힙니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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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도 시인은 "해면(海綿) 같"(1연 2행)은 '적'에게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문어발 같"(1연 4행)은 '적'은 "나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1연 3행)다. 언뜻 '적'이 시인을 도발하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인 스스로 '적'에게 굴복하고 있다. 시인과 적은 한통속으로 묶인다. 왜 그런가.

'적'은 정체가 없다. "흡반 같은 나의 대문의 명패"(2연 1행) 또한 정체가 없다. 그래서 '나'는 '적'과 똑같다. '적'과 '나'는 정체도 없이 그 자신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적' 노릇을 한다. 그 자신의,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다.

'적'의 정체의 모호성은 '적'의 평범성과 일상성으로 이어진다. '적'은 어디에도 없다. 동시에 '적'은 어디에나 있다. "적을 운산(運算)하고 있으면 / 아무 데에도 적은 없"(3연 6·7행)다. '김해동' '정병일'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에도 없는 가상의 존재다. 동시에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진짜'이면서 '가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순 덩어리다. "항상 약삭빠"(3연 1행)르지만 "부하를 사랑"(3연 2행)하는 인간적인 직장 상사다. "내심과 정반대되는 행동만을 해왔"(3연 3·4행)지만, "그것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였"(3연 4행)다. 가슴 따뜻한 가장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적'은 "운산(運算)하고 있으면 / 아무 데에도 적은 없"(3연 6·7행)는 존재가 된다. 아무 데에도 없으므로 아무 곳에나 있다. 그들이 비범하면서 평범하고, 특별하면서도 일상적인 이유다.

'적'의 일상성과 평범성은 시인을 공포에 빠뜨린다. "적이 어디에 있느냐?"(4연 3행)는 의문문은 결코 단순한 의문문이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적'이 주는 공포에 대한 단말마적인 외침을 담는다. 그것은 순도 100퍼센트의 감탄문이다.

"적은 꼭 있어야 하느냐?"(4연 4행) 또한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물음의 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은 어디에나 있다"는 진실문의 수사적 표현이다. '적'이 어디에나 있으니 두렵다는 또 다른 감탄문적 표현이다. 그만큼 '적'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순사'와 '땅주인'과 "과속을 범하는 운전수"(5연 1행) 등등의 모습으로.

시인은 왜 '적'에게서 공포를 느끼는가. '적'의 얼굴은 결코 악하지 않다. 모질거나 잔혹하지도 않다. '적'은 성실하고 근면하다. 심성은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집에서는 다정다감한 '아버지'다. 회사에서는 자기 책무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모범사원'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이며, 동네 주민들과 흉허물 없이 어울리는 시민이다. 선배와 동기와 후배에게는 믿음직스러운 후배나 동기·선배다.

평범한 사람들은 '적'이 되고...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중략)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태인 학살을 총괄한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상속의 그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처럼 무지막지한 일을 저지르게 됐을까. 아렌트가 말하는 아이히만의 "철저한 무사유"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다.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생각하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동정과 연민, 공감의 결여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결코 '괴물'이나 '악'이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괴물'이자 '악'이었다.

이 시대의 '아이히만'들은 누구인가. 출세에 눈이 먼 아이히만처럼, 그들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이익에 몰두한다.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자장은 결코 고려되지 않는다. '나'만 존재하는 세상에 다른 이가 살아가는 현실은 없다. '나'의 삶의 기준은 오로지 '나' 자신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타인은 없다.

이 가공할 '무사유'는 '문어발'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빨아먹는다. 이 세상에서 정의는 사라진다. 평범한 사람들은 스스로 '적'이 되고, '적'의 포로가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거대한 '악'의 일부가 된다. 세상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없는 "정체 없는 놈"들로 넘쳐난다. 그곳은 온통 '적'들 천지이면서도 '적'이 없는 기괴한 곳이 돼버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상은 진정한 '적'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정의와 진실은 사라진다. 불의에 저항하는 "나의 양심과 독기"는 '적'의 '흡반' 아래서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 곳에서 시인은 무력하게 다음과 같이 무력하게 외치지 않았을까.

'적이 없는데, 아무리 봐도 적이 없는데,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돼버린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적>, #김수영,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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