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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을 떠나기 전 이틀 동안은 '여기가 런던 맞나' 싶을 정도로 날씨가 쾌청했다.
 런던을 떠나기 전 이틀 동안은 '여기가 런던 맞나' 싶을 정도로 날씨가 쾌청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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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될만한 내 생애 동선(動線)은 섬에서 섬으로 이어졌다. 서남해 외딴 섬 흑산도에서 태어나 무슨 연유의 운명인지, 나는 또 섬에서 섬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일어서려는 '제국의 섬' 잉글랜드에서 슬픈 '저항의 섬' 아일랜드로 가는 길. 런던 히드로공항에서 나를 태운 '브리티시 에어웨이(BRITISH AIRWAY)'는 아이리시해(Irish Sea)를 건너고 있었다.

옥빛과 잿빛이 뒤섞여진 바다 색깔은 지구 북반부에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파고(波高)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 군데군데 하얀 물거품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차고 거친 바람이 간간이 모래를 일으키듯 포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런던을 떠나기 전 이틀 동안은 '여기가 런던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쾌청했다. 묵은 빨래를 했고, 다하지 못했던 산책을 했다. 보기 좋게 키가 자란 플라타너스나무 아래를 느리게 걷는 것은 런던살이의 작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간혹, 우산 같은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을 쳐다보며 '언제 다시 런던에 올 수 있을까' 묻곤 했다. 아무도 모를 일이었으니 서로 아무 대답 하지 않았다. 우리는 런던의 어느 거리에서 운명처럼 잠시 스쳤을 뿐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무언가를 기약하기엔 서로 갈 길이 멀었으므로.

집주인 로건을 믿었던 이유

셰어하우스에서 짐을 빼던 날, 상냥했던 집주인 로건은 나를 공항까지 바래다주며 "그리스에도 집이 있으니 휴가 때 놀러오라"고 했다. "네가 그리스에서 휴가 보낸 집을 블로그 등을 통해 소개하면 한국의 네 친구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하게 해주겠다"는 잇속이 깔린 말이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흔한 장삿속 말로 치부하기엔 그의 눈동자엔 짠한 아쉬움이 채 가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건은 나이 스물셋에 스리랑카를 떠나왔다고 했다. 영국으로 건너 온지 20년이 넘은 지금 그는 런던과 그리스에서 셰어하우스를 몇 채 굴리며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속속들이 알진 못한다. 다만 내가 로건을 신뢰하게 된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내 옆방에서 사는 60대 초반의 아주머니가 로건의 집에서 10년 넘도록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간 살이 하는 사람이 남의 집에서 10년이 넘도록 산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대개는 온전히 나를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생길 때 가능한 일이다. 그니까 이것은 집주인이냐 아니냐를 떠난 신뢰의 문제라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싫은 내색 한 번하지 않았던 로건의 친절 때문이다. 공동화장실과 공동욕실을 낯선 이들과 함께 써야 하는 이국의 셰어하우스 생활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사용하다보니 인터넷 무선망은 과부하가 걸리기 일쑤였다. 난방 개념이 희박한 곳이다 보니 추위는 일찍 와 이불이 더 필요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로건을 찾았지만 그는 한 번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곧장 달려와줬다. 친절은 베푼 만큼 신뢰를 쌓아준다.

"왜 하필 아일랜드로 가냐?"

런던 히드로공항 출발 게이트 벽면에 '잘 가라'는 인사가 쓰여 있다.
 런던 히드로공항 출발 게이트 벽면에 '잘 가라'는 인사가 쓰여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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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신뢰는, 그 어떤 종교나 정치이념보다 낮고 미세한 단위에서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조차 스스로 헛갈려하는 종교는 믿음을 팔거나 강요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정치는 거꾸로 입만 열면 신뢰를 강조하는 것일 테다.

로건의 차를 얻어 타고 히드로공항 가는 길,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로건이 물었다. "왜 하필 아일랜드로 가냐"고. 그러게, 왜 하필 나는 그 많은 나라들을 놔두고 아일랜드로 갈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800년이 넘도록 영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민족. 처절한 투쟁으로 독립을 이룬 후에도 영토의 한 덩어리를 영국 땅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나라. 바로 이 때문에 아직도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이 끝나지 않은 땅. 스스로를 '가장 슬픈 나라'라고 불렀던 아일랜드에 왜 나는 가고 있는 것일까.

한국을 떠나오기 전 이 질문을 스스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공책에 적어둔 대답은 소풍 가기 전 아이의 마음처럼 예쁘게 포장돼 있었다. 짧은 다리로 걸어야 할 굴곡진 길은 생각지도 않고 구름 한 점 없는 높고 파란 하늘만 그렸던 아이의 일기장처럼 말이다.

'슬픈 나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일까' 생각해본다. 독일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는 자신이 꿈꾸는 나라는 "안에서건 밖에서건 좋은 이웃들의 나라"라고 말했다. '좋은 이웃들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대한민국은 '좋은 이웃들의 나라'일까. 빌리 브란트는 왜 그냥 '좋은 이웃들의 나라'라고 하지 않고 '안에서든 밖에서든'이라는 말을 앞에다 명토박았을까.

'좋은 이웃'을 얻기 위해선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돼야 한다. 나라 밖에서 '좋은 이웃들의 나라'이고 싶다면 우리나라가 먼저 '좋은 이웃들의 나라'여야 한다. 

한국은 '좋은 이웃들의 나라'인가

영국 런던 히드로공항에서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까지 나를 태워간 '브리티시 에어웨이' 비행기의 휘어진 날개 꼬리. 이를 '윙렛(winglet)'이라 하는데 비행 중 공기 흐름을 개선해 와류 현상을 감소시켜 연료 절감 효과를 가져온다.
 영국 런던 히드로공항에서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까지 나를 태워간 '브리티시 에어웨이' 비행기의 휘어진 날개 꼬리. 이를 '윙렛(winglet)'이라 하는데 비행 중 공기 흐름을 개선해 와류 현상을 감소시켜 연료 절감 효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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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더블린 공항 전경.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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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선택권이 훼절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를 정치 민주화라고 하던가. 또 안에서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차별당하거나 서러운 꼴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를 사회적 평등이라고 하던가. 재벌이든 중소기업이든 시장 안에서는 똑같은 룰을 적용받아야 한다. 이를 경제민주화라 하던가.

한 나라의 정보기관과 군대가 선거판에 끼어들어 주권자의 권리를 방해하는 댓글 전쟁이나 하는 나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선진국'같았으면 사달이 나도 크게 났을 일이다. 하지만 중대범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수사가 권력에 의해 치졸하게 방해받고 있는 나라. 밖에 대고 '국격' 운운하며 '좋은 이웃들의 나라'라고 나발 불기엔 염치가 없다.

똑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도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차별받는 나라. '삼성'의 제복을 입혀놓고 실컷 일은 부리면서 처우는 '삼성 맨'으로 하지 않는 나라. 골목에서 빵장사까지 하며 돈을 갈취하는 재벌을 '기업하기 어려우니 세금 깎아주겠다'고 먼저 나서는 정부가 있는 나라. 밖에 대고 '좋은 이웃들의 나라'라고 으스대기엔 낯부끄럽다.

잠시 후 더블린공항에 도착할 것이라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물끄러미 내다본 비행기 유리창 너머로 해안 절벽으로 여지없이 치달아 달려가 부서지고야마는 파도가 보인다. 물거품이 돼버린 파도의 잔해를 바람이 마냥 푸른 초원에 부려놓는다.

초원과 초원 사이 제주도 산담 같은 돌담이 점처럼 이어진 풍경이 조금씩 뚜렷하게 잡혀오고, '구궁'…. 비행기는 연착륙에 성공했다. 무슨 운명이고, 어떤 인연일까. 마침내, 아일랜드에 온 것이다.

"이슬 젖은 꿈에서, 내 영혼아, 깨어나라
사랑의 깊은 잠에서, 죽음으로부터,
자 보라! 나무들도 한숨 가득하여
잎들이 아침을 일깨운다.

동쪽에서 서서히 새벽이 밝아
부드레 타는 불꽃들이 나타나니,
잿빛 금빛 거미줄 얽힌
온갖 베일이 바들거린다.

감미롭게, 조용하게, 은밀하게,
아침의 꽃 종들도 꿈틀꿈틀 깨어나고
요정의 신비로운 합창이
(무수히!) 들리기 시작하나니."

- 제임스 조이스 <이슬 젖은 꿈에서>, 김천봉 번역

아일랜드 더블린 전경. 더블린 시내를 관통하는 리피 강은 더블린항에서 아이리시해와 만난다.
 아일랜드 더블린 전경. 더블린 시내를 관통하는 리피 강은 더블린항에서 아이리시해와 만난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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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런던 히드로, #더블린, #아일랜드, #삼성,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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