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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에 선미술관이 생겨나기까지

나헤석의 자화상
 나헤석의 자화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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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나혜석(1896~1948)과 이응로(1904~1989)다. 나혜석은 우리에게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913년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해 유화를 공부했다. 1918년 3월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미술과 문학 작업에 몰두했다. 1919년에는 도쿄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잠시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1920년에는 <폐허> 등 동인지 작업에도 참여한다. 이때 만난 친구가 김일엽(1896~1971)이다. 그리고 3·1운동 가담자 변호 인연으로 1920년 4월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다.

나혜석은 1927년 남편과 함께 유럽여행을 한다. 그녀는 1928년까지 파리에 머물며 야수파와 입체파에 심취했고, 파리 주재 외교관 최린과 연애도 했다. 1930년 11월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이혼당했고, 이후 화가·작가·사회운동가로 활동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했지만, 프리랜서로서의 생활이 점점 어려워졌고 정신적으로도 쇠약해져 갔다.

복원된 수덕여관
 복원된 수덕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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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말 전시회 실패, 큰 아들의 죽음 등이 겹쳐 그녀는 불교에 귀의하려고 한다. 절친한 친구 김일엽이 여승으로 있던 수덕사를 찾아 만공스님을 만났으나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혜석은 스님이 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절 아래에 있는 수덕여관에 5년간 머문다. 이때 찾아온 사람이 고암 이응로다.

이응로는 이런 인연으로 나혜석이 떠난 1944년 수덕여관을 인수해 부인 박귀희에게 운영을 맡겼다. 1958년 이응로는 이화여대 제자인 박인경과 파리로 떠난다. 이후 박귀희는 남편을 기다리며 수덕여관에서 홀로 살았다. 이응로는 1967년 동베를린 사건 주모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다. 이때 그를 돌봐준 사람이 박귀희다. 1년여 후 프랑스 정부의 항의로 풀려난 이응로는 잠시 수덕여관에 머물다 파리로 돌아간다.

1958년 고암 이응로의 모습(뒷줄 왼쪽 첫 번째)
 1958년 고암 이응로의 모습(뒷줄 왼쪽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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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는 1989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수덕여관을 지키던 박귀희 여사도 2001년 세상을 떠난다. 수덕여관은 그 후 수년간 방치되다 2007년 10월 복원되고, 이를 기념해 수덕여관 복원기념전시회가 열린다. 이때 고암의 미공개 작품 20점, 고암의 편지와 낙관 등 유품, 고암의 제자 금동원의 작품 20여점이 전시됐다. 그리고 2010년 3월 수덕여관 앞에 수덕사 선미술관이 준공되었다.      

이응로의 작품보다 원담선사 유묵이 더 많네

수덕여관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바위에 앉아 있는 두 분의 스님
 수덕여관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바위에 앉아 있는 두 분의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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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열린 개관기념전이 '고암 이응로 화백 선미술관 나들이'다. 당시 전시된 작품으로는 수덕사 전경, 사슴, 해바라기, 배가 있는 풍경, 난, 여치 등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1950년대 수묵담채로 그린 '기도하는 여인상'이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날 성곽 밖 커다란 나무 앞에서 두 손을 이마까지 올린 여인이 기도를 한다.

또 한 작품 '수덕여관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바위에 앉아 있는 두 분의 스님'도 인상적이다. 자연은 동양화풍의 굵은 먹선으로 처리했다. 자연 한 가운데 바위에 자리 잡은 두 스님은 가부좌의 자세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2010년 3월 26일부터 4월 5일까지 열린 전시회를 주최한 수덕사 주지 옹산스님은 '예술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말을 했다.

1953년 고암 개인전 방명록
 1953년 고암 개인전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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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평생 선의 경지에서 그림을 그려보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말을 인용했다. "음식이 몸을 살찌운다면 예술은 정신을 풍성하게 한다"고 말한다. 선미술관이라는 이름 역시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미술관이라는 의미에서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곳 선미술관에는 고암의 작품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수덕사 전경, 난, 사슴 등이 있고, 제목이 적혀있지 않은 작품 몇 점이 더 있다. 이곳 전시실에서 더 눈에 띄는 것은 1953년 서울 소공동 성림다방에서 개최된 '고암 개인전'의 방명록이다. 폭 30cm 길이 8m의 두루마리 형태의 한지다. 이 방명록은 고암 작품 소장자인 홍세영씨가 수덕사 선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기증했다.

최순우, 긴용환, 이봉구의 방명록
 최순우, 긴용환, 이봉구의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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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방명록에서 두 군데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한 군데는 박수근 화백의 스케치다. 탁자를 가운데 놓고 세 사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 세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두 명은 이응로와 박수근일 것이다. 다른 한 군데는 최순우 선생, 김용환 화백, 이봉구 선생의 글과 그림이다. 최순우 선생은 '영원히 새로운 조선미의 고향입니다'라고 썼다. 김용환 화백은 커리커처를 그려 넣었다. 이봉구 선생은 '수덕사의 겨울을 좋아합니다'라고 썼다.
 
선미술관에는 고암의 작품 외에 원담선사의 유품과 유묵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일화'라는 편액이 있고, 금강경을 쓴 8폭 병풍이 있다. 세계일화는 만공선사 글씨와 유사성이 느껴진다. 소월산고정(小月山高靜)이라는 선화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훨씬 더 인상적인 것은 원담선사 인형이다. 완전 미소년으로 표현했다. 원담선사가 동안(童顔)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예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 만들었다. 동그란 이마와 금빛 나는 가사에서 빛이 난다. 

원담스님 이야기

원담선사 인형
 원담선사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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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담(1926-2008)대종사는 덕숭총림 수덕사의 3대 방장을 지냈다.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나 충남 서산에서 자랐다. 1933년 벽초선사를 은사로 만공선사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41년 비구계를 받았으며, 만공선사의 총애를 받았다. 1970년 수덕사 주지를 맡았으며, 1984년 수덕사가 덕숭총림으로 승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6년 벽초선사에 이어 덕숭총림 제3대 방장이 되었다.

원담스님은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서화에 능했다. 특히 글씨를 잘 써 20세기 스님 중 최고의 명필이었다. 그래서 많은 유묵과 현판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1982년에 쓴 대웅전 현판이다. 그 외 수덕사 명부전, 원통보전, 범종각, 보광당, 황하정루, 덕숭총림 등의 현판을 남겼다. 1984년에는 속리산 법주사 주련을 쓰기도 했다. 원담스님은 또한 경허성우선사의 선시를 즐겨 썼다.

원담선사 유묵: 世界一花가 보인다.
 원담선사 유묵: 世界一花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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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과 청산 중 어느 것이 옳은가                  世與靑山何者是
봄날 성 안에 피지 않은 꽃이 없도다.             春城無處不開花
옆 사람이 만일 성우의 일을 묻는다면            傍人若問惺牛事
석녀의 소리 가운데 시간을 초월한 노래로다.  石女聲中劫外歌

지역의 문화예술 전시공간으로 활용

수덕사 선미술관
 수덕사 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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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선미술관은 이 지역 작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도 활용된다. 10월 1일~15일에는 문인화가 신은숙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제목은 '구름이 지나니 달이 선(禪)을 놓다'였다. '청산은 나를 보고', '묵념의 가장자리', '그리움', '조우' 등 채색 문인화 50여점이 전시되었다. 신은숙 화백은 이들 그림을 통해 시서화의 새로운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 '조우'에 신화백은 "고요히 생각하며 무아(無我)를 보노니 울던 새 지는 꽃 모두 고요하누나"라고 시제를 썼다.

신은숙의 '조우'
 신은숙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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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0월 20일에는 옹산(翁山)스님의 저서 <잔설 위의 기러기 발자국>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옹산 스님은 수덕사 선미술관을 개관하는데 큰 힘을 쏟았던 스님이다. 이어서 20일부터 30일까지 '옹산숭담의 선묵유희'전이 열렸다. 이때 전시된 작품은 20여 점의 달마도와 붓글씨다. 붓글씨로는 시거시래(是去是來·이렇게 왔다 이렇게 간다), 반선반농(半禪半農·선 반 농사 반), 방하착(放下着·집착을 버려라) 등이 있었다.


태그:#수덕사 선미술관, #고암 이응로, #나혜석, #원담선사, #옹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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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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