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은 한국 사회에서 크고작은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유난히 많았던 한해였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한-일월드컵이 열렸고, 한국축구는 이 대회에서 사상 초유의 4강신화를 달성했다. 그해 열린 16대 대선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참여정부가 탄생했다.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한국 남자농구가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20년만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각기 전혀 다른 분야의 사건들이지만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을 수 있는 공통적인 키워드는 아마도 '기적'이 아닐까. 이전만 해도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던 상황들. 약자가 강자를 꺾고, 패자가 승자가 되며, 비주류가 주류를 대체하는 등. 이른바 기존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리는 변화가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대중들은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감동을 체험했다.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게도 2002년은 월드컵과 대선에 버금가는 큰 의미가 담긴 한해였다. 지긋지긋한 한국시리즈 20년 무관의 흑역사를 청산하고, 대구구장에 처음으로 우승축포가 울려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삼성 팬들에게 당시의 감동은 월드컵 4강신화나,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도 맞바꾸지 않을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2002년, 대구구장의 기적은 어떤 드라마를 남겼나

 2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1차전 삼성과 두산의 경기 시작 전 관중들이 응원을 하고 있다

2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1차전 삼성과 두산의 경기 시작 전 관중들이 응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라이온즈는 1982년 프로 원년이래 프로야구의 강자로 군림해왔지만 20년간 한 번도 최후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정규시즌에서는 잘했지만 포스트시즌같은 큰 무대만 나가면 번번이 고개를 숙이기 일쑤였다. 이러한 행보는 영호남 라이벌로 꼽히던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무패' 신화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라이온즈 팬들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특히 첫 우승 바로 한 해전이던 2001년 한국시리즈는 라이온즈팬들에게는 가장 잊고 싶은 기억중 하나다. 당시 라이온즈는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하여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화려한 스타급 선수들을 대거 끌어모았고, 순혈주의의 자존심마저 깨며 해태 신화를 이끈 우승청부사 김응용 감독까지 영입했다.

혹자는 '돈으로 우승을 사려한다' '돈성'이라고 질투섞인 조롱을 퍼부었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우승에 대한 욕심과 강팀을 만들기 위한 투자는 당연한 의무였을 뿐이다. 실제로 라이온즈는 정규시즌 내내 1위를 유지하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며 사상 첫 통합우승의 꿈을 부풀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두산 베어스가 올라오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홈어드밴티지에 따라 1,2차전은 라이온즈의 홈, 3,4차전은 상대 원정으로 치르고 5-7차전은 중립구장인 잠실구장에서 치르도록 돼 있었는데, 하필 잠실을 홈으로 사용하는 베어스가 올라오면서 라이온즈는 1위팀임에도 사실상 홈어드밴티지를 상실하게되는 기묘한 상황에 직면했다.

당시 라이온즈팬들은 지방구단의 피해를 극명하게 절감했던 한국시리즈였다. 한국시리즈 직행팀의 홈구장이 2만5000석이 안 될 경우, 5-7차전을 무조건 잠실에서 중립 경기로 치르게 했다. 대신 잠실을 홈구장으로 쓰는 LG나 두산이 진출할 경우, 잠실에서만 너무 많은 경기를 하게 되므로 중립경기없이 4-3(홈-원정경기) 혹은 3-4 제로 치르도록 보완했다.

공교롭게도 이 제도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2001년 한국시리즈였다. 보다 많은 팬들을 확보하기 위한 KBO의 결정이었으나 라이온즈 팬들로서는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우려한 대로 대구구장에서 열린 첫 2연전에서 1승1패로 호각세를 이룬 양팀은 무대를 옮겨 잠실에서 벌어진 3,4차전에서 베어스가 잇달아 승리를 거두며 흐름이 기울었다. 라이온즈는 승부를 6차전까지 끌고 갔으나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또 한 번 고배를 마셔야했다. KBO는 결국 2002년부터 지방-서울팀간 한국시리즈 격돌시 잠실중립경기를 폐지하고 원래대로 환원했다.

절치부심한 라이온즈는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또 다시 서울팀인 LG를 만나게 됐다.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아슬아슬하게 앞선 상황에서 6-7차전이 다시 라이온즈의 홈인 대구에서 열리게 되었다는 것은 2001년과 달리 쫓기는 입장이었던 라이온즈 선수들에게 큰 정신적 위안이었다. 패색이 짙던 6차전에서 운명을 바꾼 이승엽의 동점-마해영의 역전 홈런이 잇달아 터져나올수 있었던 것도 대구구장의 보이지 않는 효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대구팬들이라면 우승이 확정되던 순간의 감동은 영원히 잊을수 없을 것이다. 라이온즈의 신-구 세대 상징으로 꼽히던 양준혁과 이승엽은 부둥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모든 선수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눈물을 쏟아냈다. 심지어 관중석에 있던 팬들과 치어리더마저도. 모르는 사람끼리도 어깨동무를 하고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서로를 축하했다. 대구 팬들조차 좁고 불편하고 낡았다고 언제나 불평하던 대구구장이 그 순간만큼은 마치 천국의 정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대구구장을 가득채운 기류는, 단순히 올해의 승자가 탄생했다는 성취감과는 묘하게 다른 감정이었다. 20년의 세월동안 묵혀왔던 시대적 과제랄까. 한계를 뛰어넘고 오랜 한풀이를 해냈다는 안도감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직감하는 전율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차라리 쉽고 뻔한 우승이었다면 오히려 그 의미가 반감되었을지 모른다. 이후로도 라이온즈는 4회의 우승을 더 차지했지만, 그 어떤 우승도 2002년만큼의 감동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대구구장에서 라이온즈의 우승축포가 터진 것은 2002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005년에는 두산 베어스을 상대로 4-0의 완승을 거두며 대구로 돌아갈 기회가 없었고, 2006년에는 한화 이글스, 2011년과 2012년에는 SK 와이번스를 연이어 만나 모두 중립구장인 잠실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정규리그 1위팀임에도 정작 홈팬들이 최대의 축제인 한국시리즈를 1,2차전 2경기밖에 즐길수 없다는 현실은 아이러니였다.

어게인 2002 혹은 2001? 또 다른 드라마를 기다린다

 오는 24일, 대구구장에서 두산과 삼성이 맞붙는 2013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다.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자료사진) 맞 대결. ⓒ 최유진


올시즌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 재대결은 라이온즈 팬들로서는 어쩌면 기다려왔던 매치업이었다. 넥센 히어로즈가 올라왔다면 올해도 5~7차전은 잠실 중립경기로 치러야했다. 잠실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베어스나 LG 트윈스가 올라와야 1-2,6-7차전이 대구에서 열린다. 두 팀중, 준플레이오프부터 거치며 체력소모가 컸던 베어스는 어쩌면 라이온즈가 가장 기다려왔던 한국시리즈 파트너였는지도 모른다. 대구 팬들은 기왕이면 4승 2패 정도의 성적으로 홈에서 11년만의 우승축포를 쏘아올리는 장면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은 둥글다고, 정규시즌 1위팀이 4위팀을 상대로 안방에서 2연전을 무기력하게 내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베어스는 이제 잠실 3연중중 2경기만 이겨도 우승을 확정짓는다. 홈에서 여유있게 우승을 확정짓자는 라이온스 팬들의 기대는, 이제 살기위하여 무조건 대구까지 승부를 끌고 내려와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바뀌었다.

더욱 팬들을 아쉽게 한 것은 이미 한국시리즈 우승을 5회나 차지한, 그것도 3연패에 도전하고 있는 명문구단 답지 않게 큰 경기 경험이 아예 없는 듯 새가슴으로 돌아가 버린 듯한 라이온즈 선수들의  서투른 플레이였다. 어게인 2002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어게인 2001이 되어가고 있는 분위기다.

이런 상황은 최근의 라이온즈 팬들에게는 분명히 낯설다. 2011년 이후 라이온즈는 언제부터인가 프로야구의 끝판왕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정상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수성하는 위치에서 도전을 받는 입장이 되었고, 이겨야 본전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해태 타이거즈(86-89) 이후 한 번도 달성하지 못한 초유의 통합 3연패에 대한 높은 기대치는 선수들에게도 분명히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2연패 이후 대구 팬들의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했다. 물론 간혹 팀의 경기력에 대하여 분통을 터뜨리거나 다소 부진한 플레이를 펼친 이승엽-류중일 감독 등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라이온즈가 다시 대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격려가 훨씬 우세했다. 수년간 프로야구 최강의 자리를 지켜온 팀과 선수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신뢰였다.

라이온즈 팬들이 꿈꾸는 것은 또 한 편의 드라마다. 2002년 이후 꾸준한 호성적과 우승컵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았던 갈증은 바로 '라이온즈만의 스토리텔링'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처럼 호쾌한 공격야구, 지더라도 한 방으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뒷심, 포기하지 않는 끈기같은 '라이온즈 스타일'의 승리를 바라는 팬들이 아직 적지않다. 뻔한 승리보다는 후회없는 승부. 기왕이면 홈구장인 대구에서 라이온즈의 올시즌의 마무리를 장식해주기를 바라는 팬들의 염원이다.

라이온즈는 출범 30년간 총 14회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역대 프로야구 구단을 통틀어 최다 기록이다. 그런데 이중에 시리즈가 열세에 몰렸을때 뒤집은 경우는 아직 없다. 5회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모두 라이온즈가 1차전을 승리로 장식한 이후 내내 주도권을 놓치않은 상황에서 거둔 우승이었다.

역대 한국시리즈를 통틀어도 1,2차전을 모두 진 팀이 승부를 뒤집은 경우는 2007년 두산에 초반 2연패로 몰렸던 SK가 4연승으로 역스윕에 성공한  한 차례 뿐이다. 그러나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승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라이온즈에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드라마다.

라이온즈 팬들이 바라는 것도 우세한 조건에서의 편한 승리만이 아니라, '역경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라이온즈만의 성장 스토리'가 아닐까. 어느덧 그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대구구장도 주인들의 귀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대구구장에서 우승축포를 쏘아올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기에 더욱 간절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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