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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8월 3일 아침, 별장에서 무심히 신문을 집어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왕세자 전하의 사진과 나란히 있는 것은 틀림없는 나의 사진이었다. 이 왕세자 전하와 내가 약혼했다는 주먹만 한 활자가 내 이마를 쳤다. (중략)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휭휭 돌고 눈앞이 어지러워져 활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신문을 들고 있는 손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에서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지식공작소 펴냄)의 '이 마사코'는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한국 이름 '이방자' 여사(1901.11.4.~1989.4.30)다.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 지식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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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황족의 딸로 태어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의 왕세자 이은과 정략결혼을 해 양국의 '경계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녀는 영왕(영친왕, 책 내용을 참고로 이하 영왕으로 씀) 이은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처럼 회고한다.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조선의 왕세자 이은의 처지를 몇 번 들은 적은 있었지만,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흘려 들었다. 게다가 일본 황실의 제의로 결정을 했을 것임에도 뉴스를 접하기 전까지 부모님은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뉴스를 통해 자신의 결혼 사실을 알게 되어 경악하고 만 것이다.

우리에게 '영친왕'으로 많이 알려진 영왕 이은은 고종 황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의 후사가 없자 왕세자에 책봉되고, 1907년에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11세인 왕세자를 끌고 간 명목은 '조선 왕세자의 근대식 교육', 즉 유학이었다. 하지만 실은 인질로 끌고 간 것이었다.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어린 왕세자 이은은 조선에서 이미 다른 집안의 규수와 약혼까지 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본 황족의 딸인 마사코와 1920년 4월 28일에 정략결혼을 한다.

"훨씬 후에 안 일이지만 내 결혼은 일본의 군벌들이 정한 일이었다. (중략) 나는 아이를 못 낳을 체질이라 하여 선·일 융화의 미명 아래 이은 전하의 배필로 정했다한다. 내가 아이를 못 낳으니까 조선 왕가에 보내 조선 왕가의 손을 끊어놓자는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자 나의 불임설을 주장했던 전의 세 명이 모두 처형당했다고 한다."
-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에서

영친왕(영왕) 부부.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 중
 영친왕(영왕) 부부.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 중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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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의 한국 방문시 돌연사한 첫째 아들 '진'을 보고 있는 영친왕 부부.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중.
 1922년의 한국 방문시 돌연사한 첫째 아들 '진'을 보고 있는 영친왕 부부.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중.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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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는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파란만장한 삶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이다. 그런 만큼 영왕 이은의 일본에서의 생활을 가장 잘 알려주고 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지만,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고 피하려고 하는 대신, '인질로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나 일본에 끌려온 영왕 전하의 곁에서 애정과 위로로 따뜻한 친구가 되어 드리겠다'고 다짐한다. 이미 많이 알려진 것처럼 평생 영왕의 곁에서 헌신했음은 물론이다.

책에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시대와 역사의 희생자인 영왕 부부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럼에도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한 부부의 사랑, 조선의 왕세자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남편의 조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여 평생 두 개의 조국을 섬겨야 했던 이방자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대적 순서에 따라 펼쳐진다.

강용자씨는 더구나 회고록을 연재할 당시 특별 인터뷰(기자 주: 연재 마무리 후 이방자 여사와의 인터뷰)에 담지 못했지만 일부 사람들이 "그 일본 여자 얘기를 왜 쓰느냐?", "일본 황족의 딸이고, 우리의 피를 더럽히고, 영왕을 망친 요물 아니냐?"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연재가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 "역사를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우리역사가 너무 많이 왜곡, 축소되었고 근세사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며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현실에 대해 답답함과 울분을 느꼈다고 <왕조의 후예>(강용자)에서 술회하고 있다. 가까운 과거사도 쉽게 망각하는 오늘의 우리가 귀담아 들을 이야기다.
-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엮은이의 말에서

이 책의 바탕은 강용자씨가 <경향신문>에 연재한(1984년) '세월이여 왕조여'다. 당시 이방자 여사의 구술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당시의 글을 <한겨레>과 <시사저널>의 편집기자로 일한 바 있는 김정희씨가 엮어 책으로 냈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요즘의 문법으로 바꾸거나 독자의 이해를 위해 특정 용어나 사건, 인명 등의 설명을 각각의 페이지에 덧붙이고, 이방자 여사의 별세 그 후 이야기 등을 넣는 등의 형태로 다듬어 출간했다고 한다. 참고로 한때 기자로 활동하며 '최은희 여기자상(1986년)'을 수상한바 있는 저자 강용자씨는 올 6월에 별세했다.

1922년 한국에서의 결혼식 당시 이방자 여사가 올렸던 가채.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에서.
 1922년 한국에서의 결혼식 당시 이방자 여사가 올렸던 가채.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에서.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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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으로부터 반환받은 영친왕 일가 복식 유물 일체 전시(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
 이본으로부터 반환받은 영친왕 일가 복식 유물 일체 전시(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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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조국의 불운 때문에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가련한 우리나라 마지막 황태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영친왕 부부를 국립고궁박물관의 한 전시회(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에서 유물로 만나며 적잖은 아쉬움을 느꼈다.

영친왕의 삶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조국에서보다 일본에서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만큼 영친왕에게는 일본의 것들(풍습이나 문화 등) 더 많이 스며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온 것에 대한 후회'의 아쉬움이었다. 때문에 좀 더, 제대로 알고 싶었었다. 하지만 마땅한 경로가 없어서 막연한 아쉬움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터였다. 

"1940년은 일본 기원 2600년이 되는 해였다. 이해 11월 10일에 기념식이 거행되는 것을 기회로 그동안 전하가 '조선'을 전부 '한국'으로 고치도록 노력하고 건의한 것이 이뤄졌다. 조선은 이미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는데도 일본에서는 계속 조선으로 불리고 있었다. 또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을 조센징이라고 얕보는 말투를 써서 전하는 늘 이것을 싫어했다. 또 이것을 계기로 도쿄의 이왕직 장관 관사를 한국 여자 유학생들의 기숙사로 개방했다. 이 계획도 오래전부터 전하가 노력해 온 것인데 일본 기원절을 기념한다고 명목을 세워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중략) 전하는 이와 때를 같이해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조국의 장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어. 젊은이들을 잘 교육시켜야 돼"하고 늘 말했다. 우리는 한국인 유학생 중에 머리는 좋으나 집안이 가난한 사람을 몇 명씩 뽑아 한 달에 몇십 원씩의 장학금을 주었다. (중략) 이들은 지금도 가끔 나를 찾아온다. 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때 전하의 기뻐하던 모습을 회상한다.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아야 했던 전하의 입장에서 한국인 학생들만을 위한 이런 일을 벌이는 데는 많은 고통이 따랐고 큰 모험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하가 해방 후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에 18년 만에 찾아왔을 때는 이미 의식이 없던 때라 이 학생들의 성장한 모습을 알아보지도 못했으니 전하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고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에서

이런지라 이 책은 매우 인상 깊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조국을 위해 무언가 하려고 늘 노심초사했던 영왕에 대한 이야기나, 일본에서 이유 없이 희생당하는 조선인들을 조선인인 영왕과 일본인인 이방자 여사가 같은 공간에서 바라보며 흘려야만 했던 눈물과 마음고생 등을 회고하는 부분은 매우 안타깝고 아프게 와 닿았다.

외에도 ▲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일본 여성의 시각 ▲ 영왕 이은처럼 일본으로 끌려가야만 했던 덕혜옹주나 이강왕 등의 일본에서의 생활 ▲ 한일병합 전후 일본의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정책과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 ▲ 원유회, 순종 장례식 등과 같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왕실의 풍습과 행사 모습 ▲ 임시정부요원들의 영왕 납치 사건의 전모 ▲ 일본 여성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과 조선의 풍경 ▲ 일본에 휘몰아쳤던 국수주의와 그로 인한 조선인들의 희생 ▲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의 희생, 그 실상 ▲ 우리의 해방 직전 일본의 상황 ▲ 이승만 대통령의 왕족들에 대한 정책 ▲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삶 등을 들려주고 있어서 영왕 부부의 삶은 물론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우리의 실상을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된 책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 강용자, 김정희 (엮음) 지음 | 지식공작소 | 2013.08.01 |13500원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마사코입니다

강용자 지음, 김정희 엮음, 지식공작소(2013)


태그:#영친왕, #이방자 여사, #마사코, #일제강점기,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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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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