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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주관하고 서울시가 후원한 '서울역사산책 - 남산, 권력에 억눌린 역사를 되새기다' 답사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더운 날씨에도 약 3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이날 답사는 남산 일대를 돌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식민지배 흔적을 눈으로 보고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전통 혼례 장소 '한국의 집'에 숨겨진 비밀  

이날 강사를 맡은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첫 번째 행선지인 '한국의 집'으로 가는 도중, 충무로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뻗은 도로를 가리켰다. 창덕궁으로 향하는 도로였다. 이 소장은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이후 '새로운 권력'인 남산 총독부와 '옛날 권력'인 조선 국왕의 거처를 잇는 도로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경술국치 이후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순종 황제는 매년 새해마다 창덕궁에서 이 길을 따라 총독부 관저로 와야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총독을 통해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 천황에게 '신년하례 전보'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치욕을 줄 목적으로 일제는 계획적으로 창덕궁과 남산을 잇는 도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직후부터 '옛 권력의 중심' 창덕궁과 '새 권력의 중심' 총독부를 잇는 도로를 만들어 조선의 옛 지배층을 통제하려 했다. 그 결과 충무로 '한국의 집' 앞과 창덕궁을 잇는 이 도로가 만들어졌다. 순종 황제는 매년 새해마다 이 길을 통해 총독부로 와서 일본 천황에게 '신년하례' 전보를 보내야만 했다.
▲ 충무로 '한국의 집' 앞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 일제는 조선을 병합한 직후부터 '옛 권력의 중심' 창덕궁과 '새 권력의 중심' 총독부를 잇는 도로를 만들어 조선의 옛 지배층을 통제하려 했다. 그 결과 충무로 '한국의 집' 앞과 창덕궁을 잇는 이 도로가 만들어졌다. 순종 황제는 매년 새해마다 이 길을 통해 총독부로 와서 일본 천황에게 '신년하례' 전보를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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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첫 행선지인 한국의 집으로 향했다. 한국식 전통 혼례를 치르는 장소로 인기 끄는 장소로만 알고 있던 한국의 집, 이곳이 조선 총독부의 '2인자'였던 역대 정무총감들의 관저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당시 건물만 없을 뿐, 정무총감 관저 공간을 그대로 이어받아 해방 이후 한국의 집이 들어선 것이다. 당시의 흔적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집 뒤쪽에 있는 비밀 방공호 흔적이었다. 이곳은 현재는 김치 저장고로 쓰이고 있었다.

바로 옆쪽에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은 예전에 학교에서도 몇 번 방문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 이 자리에 옛 수도경비사령부(아래 수경사, 현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옥 마을 입구로 들어와 약간 언덕을 오르다가 구석에 있는 표석을 봤다. 표석엔 이곳이 옛 수경사 자리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 소장은 이곳에 수경사가 들어서기 이전엔 일제의 한국 주차군 사령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주차군 사령부는 1904부터 1908년까지 존재했다. 러일전쟁 당시 이곳에서 한국의 무력 점령, 치안 확보, 방비 등이 획책되었다.

이 소장은 이곳 주변의 당시 이름을 일제가 '장곡천정(長谷川町)'이라 붙였는데, 이 '장곡천'은 제2대 조선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기리고자 붙인 이름이라 한다. 심지어 수경사 표석이 있던 잔디밭 일대는 당시 '호도원(好道園)', 즉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이름이 붙은 정원이었다 한다. 주차군 사령부가 있던 자리를 이승만 정권 당시엔 헌병대 사령부가 썼고, 그 이후엔 수경사가 그대로 썼다고 한다. 이 소장은 "이곳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과거에 쓰던 자리를 거의 그대로 우리나라 군대가 썼던 일들이 많다"고 했다.

"정보부 가는 길,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렸으면..."

다음 동선(動線)은 남산의 옛 중앙정보부 관련 흔적들을 돌아보는 길이었다. 더운 날씨에 힘겨워하며 길을 가던 중, 좌측에 한 터널이 보였다. 이순우 소장은 바로 이 터널이 과거 정보부에 체포된 사람들이 끌려가던 길이라며, 이 터널을 지나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터널은 알록달록 채색이 되어 있었지만, 낮 시간임에도 뭔가 서늘하고 음침한 느낌이 들었다. 중앙정보부가 그들 입장에선 '위치 선정'을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국가정보원이 위치한 서초구 세곡동도 대모산 기슭의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있다.

현재는 서울 유스호스텔이 들어선 위치. 이곳이 바로 옛 중앙정보부 본관이 있었던 자리다.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고통에 시달렸던 곳, 바로 그 현장에서 당시 고초를 겪었던 민주화 운동 원로 이해학 목사의 체험담을 들었다. 전망이 탁 트인 유스호스텔 옥상에서 이 목사의 이야기를 약 50분 가량 들었다. 이 목사는 1973년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여러 활동을 하던 중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실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해학 목사는 두 번째로 다시 중앙정보부에 끌려올 때 "차라리 내가 타고 정보부로 가는 차가 교통사고 나서 나도 죽어버리길 바랐다"며 당시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 답사 참가자들에게 체험담을 들려주는 이해학 목사 이해학 목사는 두 번째로 다시 중앙정보부에 끌려올 때 "차라리 내가 타고 정보부로 가는 차가 교통사고 나서 나도 죽어버리길 바랐다"며 당시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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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벗어!" 하면서 팬티까지 다 벗깁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두들겨 패는데, 그냥 패는 게 아니라 침대목으로 패는데, 온몸을 시퍼렇게 짓뭉갰습니다. (중략) 군홧발로 막 걷어차고, 짓이겨져서 바닥에서 벌벌 기는 겁니다. 그때 이 사람들히 했던 말들이 "너 여기서 죽여도 아무도 몰라!" 공포감을 줍니다. 그리고 아주 치욕스러운 얘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기를 갖다가 각목으로 쿡쿡 찌르면서 "이것 가지고 뭔 일 하겠냐?" 이러면서 온갖 모욕적인 말들을 했습니다.

이 목사는 그 해 말에도 유신반대 투쟁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에 다시 연행되었다. 그는 다시 끌려오던 당시의 공포감을 이야기하면서, '차라리 지금 나를 싣고 가는 (중앙정보부의) 이 차가 중간에 교통사고가 나서 나도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끌려갔을 때는 고문을 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같은 해 10월 19일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이후 의문사 당한 최종길 당시 서울대 교수 '덕분'이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최 교수가 그렇게 끌려가서 죽고 난 직후라,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고문을 실시하긴 힘든 상황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목사의 이날 체험담엔 당시 독재 정권에 의해 느껴야했던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를 열망했던 한 종교인의 심정이 절절이 담겨 있었다.

'경술국치' 있던 날, 데라우치의 일기에 쓰인 'ㅋㅋㅋ'

이곳에서 이완용 총리 대신과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통감에 의해 '한일병합조약'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 통감관저터 비석 이곳에서 이완용 총리 대신과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통감에 의해 '한일병합조약'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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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유스호스텔 바로 아래에 옛 통감. 총독관저 터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즉 일제에 의한 한국 강제병합이 이루어진 곳이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가 완전히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현장인 것이다. 조선이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통감은 '총독'으로 지위명이 바뀌었다. 이 소장은 당시 조약에 서명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조선 통감의 그날 밤 일기 내용을 이야기했다.

"데라우치가 뒤에 한 꼭지에 덧붙이길, '합병문제는 여차히 용이하게 조인을 완료했다'고 하고, 뒤에 두 글자를 덧붙였습니다. 표현상으로 가가(呵呵)에요. 이게 뭐냐면 '가가대소(呵呵大笑)'란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주 기분이 좋아서) 깔깔깔 웃는 표현이거든요? 오늘날로 비유하면 'ㅋㅋㅋ' 같은 건데, 당시 '합병조약'을 조인하고 난 데라우치의 기고만장함과 기쁨이 표현된 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터 구석에 '통감관저터'라고 쓰인 비석이 있었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던 해인 2010년 8월 29일 한일 양국의 시민단체 141곳이 같이 세운 비석이다. 글씨는 성공회대 신영복 석좌교수가 썼다. 비석엔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일행은 침통하면서도 숙연한 기분을 안고 이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관저터 바로 옆엔 하야시 곤스케(林 權助) 주한 일본공사의 동상이 있던 터가 있었다. 하야시는 1899년부터 7년 동안 주한 일본 공사로 있으면서 1904년 한일 의정서 체결, 다음 해 을사조약 체결 등에 직접 관여한 '조선 침략의 흑막'이었다. 공터에는 하야시의 동상 기반석이 있었다.

하야시 곤스케는 1899년부터 7년간 주한 일본 공사로 있으면서 일제의 조선 침략에 관여했다. 그의 동상 기반석엔 여전히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 상'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 하야시 곤스케 동상 기반석 하야시 곤스케는 1899년부터 7년간 주한 일본 공사로 있으면서 일제의 조선 침략에 관여했다. 그의 동상 기반석엔 여전히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 상'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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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고 나서 하야시의 동상은 고철상으로 넘어갔으나, 이 기반석은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이대로 쓰러진 채 방치되었다고 이 소장은 설명했다. 기반석엔 지금도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 상(男爵林權助君象)'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느 분노한 시민의 손에 의해서인지, '남(男)'자 부분은 훼손되어 있었다.

바로 근처의 남산 애니메이션 센터 내엔 이곳에 조선 총독부 청사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었다. 1926년부터 약 2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조선 식민지배 수뇌부'가 있었던 곳이다. 이 소장은 "이 일대는 오늘날로 치면 총독부의 '정부종합청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비유했다.

하기야 총독관저, 총독부 청사, 주차군 사령부, 헌병대 사령부, 일본 적십자사 등이 총집결했으니 정부종합청사가 아니고 뭐라 부를까. 이미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하고 이 위치에 왜성을 쌓아 1년간 주둔하기도 했었다. 일제의 입장에선 자신들 조상의 '발자취'가 남은 이곳을 '행정타운'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일제 '행정타운'된 남산, '신'까지 모셨다

일제는 이 일대에 행정관청 및 군사령부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神)'도 모셨다. 여러 개의 대규모 신사(神社)를 만들어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고 했다. 그 신사 중 하나인 노기 신사(乃木神社)의 흔적이 남은 장소로 향했다. 이 소장은 리라초등학교를 지나서 그 뒤편의 남산원이라는 사회복지시설 내에 그 흔적이 있다고 했다.

이곳에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바자회가 열리고 있어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남산원 입구 바로 옆에선 몇몇 사람들이 바비큐를 굽고 있었는데, 그 바로 뒤에 이곳이 신사의 손 씻는 곳이었음을 알리는 반석이 있었다. 10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인데도 이 반석의 글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노기 신사의 주인공이었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일본 입장에선 '군신(軍神)'과도 같았던 인물로, 러일전쟁 당시 여순전투 등의 승리를 이끌며 명장으로 추앙 받았다. 1912년 일본 천황이었던 메이지(明治)가 사망하자, 그 뒤를 따라 할복할 정도로 '천황의 충신'이기도 했다. 일본 입장에선 '군신이자 충신'이었던 노기를 기리고자, 이곳 남산엔 그를 기리는 신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리라초등학교 뒤 사회복지시설 남산원 입구 바로 옆에 남아 있는 노기신사의 흔적. 신사로 들어와 참배를 하기 전 일본식 전통에 따라 손과 입을 씻던 시설이다.
▲ 노기신사의 흔적 리라초등학교 뒤 사회복지시설 남산원 입구 바로 옆에 남아 있는 노기신사의 흔적. 신사로 들어와 참배를 하기 전 일본식 전통에 따라 손과 입을 씻던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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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간 곳은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었던 자리였다. 조선신궁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하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설 중 하나였다. 일본 천황가의 시조라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함께 모셨던 곳이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만들면서 조선시대 때 남산의 수호신을 모시던 국사당(國師堂)이 신궁을 내려다 본다는 이유로 이전했다.

현재는 조선신궁의 직접적인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현재 남산을 둘러싸고 있는 남산순환도로 중 신궁터 근처의 길이 바로 신궁의 동참도(東參道), 즉 신궁 참배길이었다는 것을 이 소장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렇게 길이 널찍하게 된 것도 당시 일제가 이 길을 참배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현재 이 일대에선 서울성곽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일제 침략의 흔적을 없애고 다시금 우리의 옛 모습을 살리고자 하는 듯해서 기뻤다.

남산 거닐다 한 번쯤 아픈 역사 떠올리길...

마지막으로 간 곳은 용산도서관 바로 옆을 지나는 도로였다.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후암동은 한때 '해방촌'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곳 한가운데에 'CCS'라고 쓰인 건물이 보였다. 이곳은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학교인 센테니얼 크리스천 스쿨(Centennial Christian School)이었다.

이 소장은 이 CCS 건물이 있던 위치에 태평양 전쟁 수행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 군인들을 모시는 '호국신사(護國神社)'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본 군인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젊은이들 또한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신사의 '신'으로 모셔졌다. 1940년대 당시 조선엔 두 개의 호국신사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 곳 후암동 CCS 자리에, 또 하나는 한반도 북단 함경북도 나남(현재의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에 있었다. 이날 답사에서 시간 관계상 직접 가보지는 못 했지만, 후암동엔 지금도 호국신사로 올라가는 108계단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은 해방 직후부터 '해방촌'이라 불렸다. 사진 한가운데 'CCS'라 적힌 곳은 한때 일제에 의해 '호국신사'라는 신사가 들어선 곳이다. 호국신사는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현재 호국신사가 있던 공간엔 센테니얼 크리스천 스쿨(Centennial Christian School)이라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학교가 들어섰다.
▲ 후암동의 전경 이곳은 해방 직후부터 '해방촌'이라 불렸다. 사진 한가운데 'CCS'라 적힌 곳은 한때 일제에 의해 '호국신사'라는 신사가 들어선 곳이다. 호국신사는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현재 호국신사가 있던 공간엔 센테니얼 크리스천 스쿨(Centennial Christian School)이라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학교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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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날 답사를 통해 남산 일대가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해 철저히 '식민지배의 중심'으로 둔갑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일제에 의해 뿌리 박힌 지배의 흔적들은 지금 이 순간도 뿌리가 완전히 뽑히지 않고 조금씩, 그러나 곳곳에 남아있다. '식민지배의 중심'은 군사독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 의해 '공작정치의 중심'으로 그 성격이 이어졌다. 그 흔적들을 모른 채 남산을 방문하는 것과, 알고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남산에 남겨진 그리 멀지 않은 치욕의 흔적들을 보면서 역사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나마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


태그:#민족문제연구소, #경술국치, #조선총독부, #조선신궁, #중앙정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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