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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가 민주노동당 가입 혐의로 기소된 현직교사 134명에 대해 파면 및 해임하기로 한 가운데 지난 2010년 5월 28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정진후 전교조 위원장,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양성윤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전교조 조합원들이 전교조 지키기를 위한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민주노동당 가입 혐의로 기소된 현직교사 134명에 대해 파면 및 해임하기로 한 가운데 지난 2010년 5월 28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정진후 전교조 위원장,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양성윤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전교조 조합원들이 전교조 지키기를 위한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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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그 테리오는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30여 년간 부두노동자로 일한 육체노동자다. 그가 쓴 책 <노동계급은 없다>(실천문학사)를 추석 연휴 동안에 감동적으로 읽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현장 육체노동자가 자신의 손으로 노동과 노동운동의 경험을 직접 글로 써서 남기는 예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전에 민주노총 부산본부의 김진숙 지도위원이 써낸 <소금꽃나무> 정도가 제법 알려져 있다.

테리오의 책에는 저자가 노동현장에서 직접 겪은 노동의 경험과 노동운동을 통해 얻은 지혜가 두루 담겨 있다. 노조 활동의 기본 원칙이나 조합원 관리, 파업 국면에서의 투쟁 지침이나 방식 등 노동운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팁'도 아주 많다. 나는 대한민국의 노동조합(노조) 간부들이 이 책을 통해 정체에 빠진 우리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암시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책에 담긴 인상적인 예화 한 토막을 보자. 저자는 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ILWU)의 평조합원을 거쳐 부대표를 역임할 정도로 성실하고 열성적인 노조 활동가였다. 어느 날, ILWU의 상근 간부인 교섭위원(사측이나 고용주와의 교섭을 담당하는 간부 노조원) 한 명이 임기를 마치고 현장으로 복귀한다. 그는 교섭위원으로 있으면서 강경 노선을 취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사측에서는 그가 현장에 그대로 복귀하는 게 못마땅했다. 그래서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그가 현장에서 작업을 맡지 못하게 만들었다.

ILWU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한다. 그들은 미국 서부 연안 전체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직의 힘을 가동했다. 그리하여 한 명의 노조 활동가를 위해 서부 연안의 주요 항구에 피켓라인을 설치한 뒤 대대적으로 파업을 벌인다. 파업으로 미국 서부 연안에 있는 주요 항구는 그 기능이 순식간에 마비된다. 사측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애초 지침을 즉각 철회한다. 이 싸움은 대동 단결한 노동자와 원칙에 충실하고 노련한 지도력을 갖춘 노조의 완벽한 승리였다.

210일 만에 '협박적 최후통첩' 날린 고용노동부

전교조
 전교조
레그 테리오가 이 일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사측의 부당한 노동 탄압에 노동자와 노조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개 약진하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없다는 진실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상 현장의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만큼 중요한 노조 업무는 없다.

테리오의 일화를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고용노동부가 해직자를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조합 규약을 고수하고 있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최후통첩'을 내렸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전교조에게 한 달간의 유예 기간을 주면서 강제하고 있는 것은 해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규약에 대한 시정 명령이다. 이 시정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시행령' 제9조 2항에 따라 전교조에 '노조 아님' 통보를 하겠다는 것이다.

전교조를 '법외 노조'로 만들겠다는 속셈은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2월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 2월 27일, 이곳 <오마이뉴스>에 '전교조, '마녀 사냥'의 표적이 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 정부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때 나는 비판의 구체적인 근거로 조합원 자격 규정과 관련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 학계 일반의 견해, 국외 사례 등을 들었다. 이들에 따르면, 고용노동부의 행태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나는 교원노조의 조합원 자격을 임용된 교원으로 보는 교원노조법상의 관련 규정이 해고당한 교원을 일반 교원 및 다른 산별 노조의 노동자와 차별함으로써 헌법상의 포괄적인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점, 규약 개정 거부를 이유로 노조에게 법외노조를 통보하는 것이 과잉금지의 원칙에 어긋나는 점도 지적했다.

당시 고용노동부의 고위 관계자는 "전교조에 충분한 기회를 줬다"며 "조만간 법에 따라 30일간 더 시정을 요구하고, 이 기간에도 규약을 개정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노조가 아님을 통보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30일의 7배나 되는 210일을 미적대다 다시 '협박적인 최후 통첩'을 날리고 있다. 지난 2월 말, 어수선한 학년 말 분위기 속에서 금방이라도 법외 노조를 만들어 버릴 것 같은 고용노동부의 살벌한 기세에 벌벌 떤 것을 생각하면 분통만 터진다.

전교조, 조합원 내치는 일 절대 하지 말길

고용노동부는 왜 지난 2월의 '유예 기간 30일'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까. 그들은 왜 추석 직후에 전격적으로 '협박'을 하고 있는 걸까. 언론 보도를 보면, 고용노동부는 지난 5월과 6월에도 전교조와의 면담을 통해 규약 개정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 그들은 '전격적인 협박'이 무슨 말이냐며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번 '통첩'과 관련하여 "그동안 자율 시정 기회를 충분히 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위법 상태를 시정하지 않으면 법령에 따라 '노조 아님' 통보를 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지난 2월, 고용노동부 고위 관계자가 내놓은 발언과 거의 똑같은 멘트다.

방하남 장관과 고용노동부에게 분명히 전하고 싶다. 전교조는 규약을 절대 개정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 말대로 전교조에게 이미 충분한 시간과 기회도 주었다. 그동안 나온 엄포나 협박, 통첩도 충분했다. 그러니 더 이상 전교조 교사들 가슴을 오그라들게 하지 말고 즉각 '전교조 노조 아님' 통보를 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해고된 노동자를 조합에서 내쫓아야 하는 무시무시한 노동 관련 법령을 가진 나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전교조 집행부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전교조가 법외 노조가 되면 '거친 광야'에 서게 될 것이다. 조직의 힘이나 영향력도 확연히 줄어들 게 뻔하다. 노동조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느니, 교육부나 교육청으로부터 지원받는 사무실 임대료도 받지 못한다느니 하는 것들은 어찌 보면 차라리 사소하다. 하지만 정부와의 단체협약체결권을 상실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전교조의 목소리를 내고 철학을 실현할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를 잃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교조가 규약을 개정해 해고 조합원을 내치는 일은 절대 하지 말기 바란다. 지금 정부는 전교조를 파렴치한 이익집단쯤으로 몰아가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정부 부처와의 단체 협약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노조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와의 '화해'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마침 이번 주 토요일(28일)에는 전교조의 하반기 사업을 결정하는 대의원대회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전교조 대의원들의 단단한 결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노조는 모순

일부에서는 몇몇 해고 조합원을 위해 조직 전체의 명운을 결정하는 선택을 내리는 게 가당키나 하냐며 반론을 펼치기도 한다. 소탐대실을 우려하는 전형적인 실용(?) 논리다. 나는 이들에게 레그 테리오가 소개한 글머리의 사례를 들려주고 싶다. 노동자가 먼저 있고 노조가 있는 것이지 노조가 먼저 있고 노동자가 있는 게 아니다. 이 자명한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노조의 존립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사람'과 '인권'을 중시하지 않는 노조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노조는 모순이다. 노조가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것은 노동 윤리나 도덕의 측면에서 보아도 결코 정당하지 않다. 전교조가 고용노동부라는 외부의 부당한 힘에 휘둘리느니 '광야'에서라도 꿋꿋이 버텨내야 하는 이유다. 그 '광야'에서 와신상담하고 절치부심하는 것도 정체된 전교조가 팽팽한 긴장과 새 활력을 얻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전교조, #법외노조, #고용노동부, #방하남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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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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