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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일이다. 면담 차 처음으로 학교에 간 적이 있다. 담임을 만났는데 내가 한 얘기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다. 그는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알고 봤더니 청각장애가 있단다.

가정통신문에도 자기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꼭 문자로 해달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청각장애가 있는데도 일반학교의 교사가 되었구나.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꽤 큰 위안을 받았다. 왜냐면 나도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담임은 나보다 더 많이 안 들리는 듯 했다.

아이의 담임을 만나고 온 이후 나는 의기양양해졌다. 청각장애가 있어도 당당하게 일반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청각장애 6급) 장애를 가지고 못 할 일이 무엇이냐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 의지는 곧 취업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갑자기 귀가 잘 안들리기 시작했다

영화 <글러브> 한 장면. 청각장애 학생을 위해 수화로 음악 수업을 하고 있다.
 영화 <글러브> 한 장면. 청각장애 학생을 위해 수화로 음악 수업을 하고 있다.
ⓒ 시네마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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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갑자기 청력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친 것도 아니고 맞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 정신적인 쇼크 때문인지 소리가 정확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을 보고 얘기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보지 않고 얘기 하면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전화 통화는 불가능하다.

갑자기 생긴 일이라 부모는 물론 나 역시 충격을 받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세월을 잘 안 들리는 귀로 살아왔다. 다른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중·고등학교, 대학, 대학원까지의 수업을 들을 때는 엄청난 불편이 따랐다. 앞에서 말하는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옆자리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친구들에게는 이 자리를 빌어서나마 고마움을 전한다.

어쨌든 나는 잘 안 들리는 귀를 가졌지만, 누구보다 씩씩하고 밝게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사람으로 살았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다양한 활동도 했다. 문제는 경제활동에서 생겼다. 학부 시절에 방학 때가 되면 친구들은 곳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도 질세라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는데 3일을 못 넘기고 그만 두어야했다.

대부분이 커피숍이나 햄버거 가게 서빙을 하는 것인데 주문을 한 번에 받지 못하고 두어 번 더 물어서 겨우 알아들으니 손님들이 짜증을 냈다. 주인이 그 상황을 보고 그만 나올 것을 요청했다. 다른 데 알아보라고 하면서…. 그 이후에도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1주일을 넘긴 적이 없었고 그때마다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사회에 나오니 역시나 같은 일이 생긴다. 동기들은 때맞춰 취업을 해서 이제는 거의 20년 가까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반면 나는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졸업 후 장애인단체에서 일을 했었다. 장애가 있기도 했고 학교 다닐 때 장애인 친구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장애인 문제에 민감했다. 마침 <한겨레> 구인광고에서 그 단체가 사람을 뽑는다는 걸 보고 무작정 찾아 갔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곳은 장애인들이 모여서 장애인 문제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 문제라는 걸 알리는 일을 했다. 장애 때문에 차별받는 것을 반대하고 모든 교통수단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설치물을 달아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지금 각 지하철역에 놓여 있는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는 그때부터 목숨 걸고 싸워서 이루어 낸 것이다. 당시에 그런 단체에서 일하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지금도 큰 자부심을 느낀다.

오랜 시간에 걸려 대학원을 졸업하고 쪽방 밀집지역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주민들을 조직하고 빈곤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의 대표가 친구였는데,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을 해서 일을 시작했다.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나를 인정해 주었고 청각장애가 있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활동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주민들은 나하고 대화하기가 힘들었다는 걸 알았다. 삶의 여유도 없는 절박한 주민들이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도 바쁜데 나 같은 활동가를 만나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무력해지기 시작해서 활동을 그만두었다. 그게 2009년부터 2010년 말까지의 일이다.

서류 전형은 늘 통과, 문제는 면접

비록 2년 동안이었지만, 내 인생에서의 전성기라고 할 만큼 많은 일들을 겪었고 배우기도 했다. 그 활동을 발판 삼아 장애를 잊고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고자 활동가 구인 사이트를 찾았다.

이력서만 보면 경험도 있고 학력도 빠지지 않으니 서류 전형에서는 문제없이 통과한다. 문제는 늘 면접에서 발생한다. 세상 두려울 것 없이 뻔뻔하게 살아왔던 탓에 면접관 앞에서도 언제나 당당하게 말했던 나는 가끔 잘 못 알아들어 두 번 물어보는 일이 있다. 그러면 면접관은 "잘 안 들리세요?"라고 말한다.

"아, 네에~ 제가 청력이 좀 안 좋아서 입모양을 보고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사투리를 쓰시면 더 못 알아들어서요."
"네에~ 그렇군요. 하지만 경력도 많으시고 공부도 많이 했으니 잘하실 거예요. 좋은 일을 참 많이 하셨네요. 힘들진 않으셨어요?"
"좀 불편하긴 했습니다만,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면접 당시엔 질문에 대답도 잘하고 내 의견을 솔직하게 말했다. 면접관들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좋은 점수를 주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어쩌면 붙을 수도 있겠구나' 기대하며 면접장을 나왔다. 그러나 며칠 후 결과를 알리는 문자에는 "아무래도 저희 업무가 전화 업무가 기본이라서 힘들겠습니다.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에 뵙지요"라는 메시지가 왔다.

믿을 만한(?) 단체이거나 소개로 면접을 보게 된 곳도 마찬가지다. 겉모습과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은데 전화를 못 받는 게 꼭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올해만 해도 ○○노조를 비롯해 장애인○○센터, ○○노동자 지원센터 등 수 없이 면접을 봤지만, 취업이 되지 않았다. 사회복지를 전공했으니 복지관 등에 취업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지만 마찬가지다.

내가 면접을 봤던 곳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회사도 아니고 약자의 편에 서서 차별에 반대하기 위해 활동한다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까지 경미한 청각장애인과 일하기를 꺼려한다는 현실에 부닥치니 힘이 빠진다.

내가 바보인가?

활동가가 일하는 곳은 좀 낫겠지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인가? 이만한 장애를 가진 사람은 평생 경제활동을 하지 말라는 건가? 배울 만큼 배웠는데도 제조업이나 3D업체에 취업해야 하나? 그딴 걸 싫다고 하는 내가 아직 배가 부른 건가? 돈 잘 버는 배우자를 만나서 집에서 가사노동만 하며 살라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다른 건 몰라도 집에서 가사노동에만 전념하며 남은 인생을 살 생각은 전혀 없다.

요즘 같이 스마트한 시대에 전화 통화 못하면 문자로 하면 되고, 말이 길어지면 메일로 하면 될 것 아닌가. 그것도 안 되면 내 튼튼한 두 다리로 뛰어가면 되고, 더 스피디하게 움직여야 하면 운전경력 14년으로 무장된 실력으로 질주하면 되지 않은가.

훌륭한 아버지를 만나 좌절 한 번 겪어보지 않은 내가 꺾어진 나이에 이런 좌절을 겪으니 삶의 의욕이 없어진다. 지금 내게 가장 반가운 사람은 일자리를 주는 사람이다. 나도 밖에 나가 일하고 싶다.


태그:#청각장애, #일자리, #차별, #사회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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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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