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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독일 베를린을 처음 가봤다. 세계대전과 냉전을 기억의 저편으로 넘긴 베를린은 유럽 분단과 냉전의 상징에서 통일독일과 유럽통합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를 가능케 한 힘은 역사의 부정이 아니라 철저한 반성과 청산에 있다는 것을 우리도 모르지 않는다. 분단과 냉전이 현재진행형인 한반도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퍽이나 부럽고도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냉전에서 이겼다"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미국인에게 베를린은 어떻게 비쳐졌을까? 한 미국인의 성찰적 회고는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23년간 미 육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베트남 전쟁과 유럽의 냉전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앤드루 바세비치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그 앞에서 이렇게 회의한다.

"지난 20년간 직업군인으로서 내가 축적해왔던 진실들-특히 냉전과 미국의 대외 정책에 관한-이 어쩌면 완벽한 진실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곤 "브란덴부르크문 발치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천진난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아들을 잃고 더욱 강해진 반전 신념

앤드루 바세비치 지음, 박인규 옮김, 오월의봄
 앤드루 바세비치 지음, 박인규 옮김, 오월의봄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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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거대한 회의와 고백을 안고 바세비치는 군복을 벗고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 냉전에서 그토록 이기고 싶었던 '저들(공산주의자)'도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즉 미국을 "가장 잘 모르고 있었던 것"에 가슴을 치면서 미국의 본질을 파헤쳐보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미국에 대한 회의감은 2001년 9·11 테러와 2003년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절망과 분노로 전환되었다. 세계적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미국과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미친 군벌과 맞먹는 것"이라고 혹평하면서 미국의 본질을 까발려 미국을 바로세우는 데 일조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바세비치는 그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이라크 전쟁에서 외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아버지의 반전 활동을 이적행위로 몰아붙이면서 아들의 죽음에 아버지도 책임이 있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자 바세비치는 아들의 전사 2주 후인 2007년 5월 말에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을 통해 "아들은 군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했고, 나는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며 자신의 반전 활동이 미국의 군사주의를 단번에 역전시킬 수는 없지만 변화의 노력은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워싱턴 룰>은 이러한 아픔을 승화해 군사주의를 딛고 일어서자는 취지로 쓰여진 역작이다. 

필자가 보스턴대 교수로 재직 중인 앤드루 바세비치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부시 행정부 때였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부시의 일방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대외정책을 네오콘의 탓으로 돌렸으나 바세비치는 19세기 말 이래로,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작동해온 미국의 시스템 자체, 즉 "워싱턴의 룰"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 책의 제목을 <워싱턴 룰>로 정하고선 이 룰을 알아야 미국이 보이고 미국을 바로세워야 전쟁 없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고 역설하는 까닭이다. '부시도 네오콘도 없는 미국에서 오바마는 왜 전쟁을 계속하는가?'라는 질문이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미국인의 집단의식에 깊이 박혀 있는 '워싱턴 룰'은 두 가지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미국은 국제사회에 규범을 제시하고 그 규범을 집행할 책임이 있다는 "미국의 신조"이다. 이러한 신조는 두 번째 요소와 만나게 된다. 그건 바세비치가 "성(聖) 삼위일체"라고 표현한 미 군사력의 세계적 주둔, 군사력에 의한 힘의 투사, 현존 위협과 미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세계적 개입주의 등으로 구성된 군사패권주의이다. 필자가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러한 미국의 신조와 성 삼위일체는 끊임없이 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군사주의와 비타협주의

바세비치는 냉전시대에 괴물처럼 커져버린 워싱턴 룰의 뿌리를 "냉전을 선과 악의 대결"로 바라보는 미국의 세계관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편견은 나는 선이라는 오만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이는 적이나 위협과는 다른 맥락을 지닌다. 적이나 위협은 맞서고 해결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 방식은 전쟁에서부터 대화와 협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을 검토하게 한다. 그러나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 비타협주의는 강해진다. 왜? 악과의 대화 자체가 자신의 선을 부정한다는 도덕적, 이념적 결벽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미 군사력에 대한 맹신은 타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자신과 타자의 열망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헤아려볼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한반도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대단히 유용한 지적이다. 북한은 미국과 뭔가를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을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북한이 까불면 군사력으로 누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또 북한의 위협 자체가 자신과 동맹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북한이 거침없이 쏟아낸 "워싱턴 불바다" 발언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미국과 우리는 전시 상태에 있다. 미국인들은 이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은데, 워싱턴에 핵미사일이 떨어질 수도 있는데 미국이 언제까지 우리를 외면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는 심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북한의 이러한 방식에 절대 동의하지도 않았고 또 "거친 입을 다물라"고도 썼다.

'망진자는 호야'와 솔선수범

바체비치는 이 책을 쓴 목적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워싱턴 룰의 기원과 진화를 추적하고, 이 체제의 수혜자와 피해자는 누구이며, 이러한 룰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이유는 무엇이고, 그렇지만 이제 워싱턴 룰은 쓸모도 없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으며, 끝으로 워싱턴 룰의 대안은 무엇이냐는 것들이다.

그는 대안을 찾는 것만이 미국이 살 길이라고 역설한다. 미국이 군사주의에 도취돼 영구전쟁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미국은 파국을 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2019년에 미국 국가부채는 연간 GDP에 맞먹는 21조 달러가 되고, 그 이자만도 연간 국방예산과 맞먹는 7천억 달러 안팎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중국 고사가 있다. '망진자(亡秦者)는 호야(胡也).' 이 고사는 진시황이 진(秦)나라를 망하게 할 자가 호(胡=오랑캐)라는 예언을 듣고서 변방을 막으려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진(秦)나라를 망한 자는 오랑캐가 아니라 그의 자식인 호해(胡亥)였다는 뜻이다. 외부의 위협에만 주목하다가 내부의 문제를 소홀히 하면 망국(亡國)의 길로 빠져들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고사인 것이다. 여전히 '워싱턴의 룰'에 갇혀 있는 미국은 물론이고, 그 룰의 꽃놀이패가 되어온 북한과 그 룰을 너무나도 당연시 하고 있는 한국 모두 되새겨야 할 고사가 아닐 수 없다.

바세비치의 대안은 '솔선수범'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세계경찰이 되어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가능하지도 타당하지도 않은 망상에서 깨어나 온갖 모순과 병폐가 쌓여가고 있는 미국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국민들이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다른 나라들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정원"을 가꿀 때, 비로소 미국도 살고 세계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신조는 미국의 건국정신을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조지 워싱턴 등 건국의 주역들은 "미국이 해야 할 일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미국이 이러한 전통을 창조적으로 복원해야 할 선택의 순간이 왔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미국의 신조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성 삼위일체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군대의 목표는 세계적 개입주의에서 "미국, 그리고 미국의 핵심적 국익을 방어하는 데"로 바뀌어야 하고, 미국 군대의 해외 주둔은 최소화하면서 "기본적으로 미국 국내에 주둔해야" 하며, 군사력의 사용은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 오직 방어 목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바세비치 역시 이러한 전환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워싱턴 스스로가 워싱턴 룰에 대한 재고를 용인"할 것이라는 기대는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 하나"가 바로 이 점이라는 것도 강조한다.

그러면서 변화의 몫은 미국 시민들에게 있다고 강조한다. "워싱턴 룰은 번영과 평화를 약속하면서 실상은 미국을 파산과 영구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배움에 길로 나서야 한다고 역설한다. 20여년 전에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시작된 자신의 배움의 길이 고통스럽고 결코 쉽지 않았지만, "자각한다는 것은 축복"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대단한 축복"이라는 자신의 행복한 경험을 함께 누리자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프레시안 편집위원.



워싱턴 룰 - 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앤드루 바세비치 지음, 박인규 옮김, 오월의봄(2013)


태그:#워싱턴 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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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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