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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겉표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겉표지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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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관행처럼 굳어진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에 대해 반감을 가지거나,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그 자체로 숭고하고 거대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천문학이 그랬고 칼뱅의 시대에 종교가 그랬다.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지금도 이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경제학이나 경영학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주장은, 우리나라 특유의 이분법으로 재단되고 그 결과에 따라 누군가는 '빨갱이'가 된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를 쓴 김상봉 교수는 철학자다. 철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기업의 부조리는 경영학이 품고 있는 근원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금기에 가까운 물음을 던졌다. "왜 경영자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

현실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권력을 외부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운동방식과 시장의 작동방식 그리고 기업의 경영이 외부적으로 어떻게 통제되어야 할지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또 변화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이다.(51쪽)

기업에서 나타나는 권력의 부당한 사유화

저자는 먼저 권력의 성질에 대해 고찰했다. 그리고 단언했다. 권력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왜냐하면 권력의 정의는 타인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타인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인데, 어떤 사람이 타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상황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타인의 의지에 의해 규정됨을 의미한다. 요컨대, 권력은 사람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권력의 성질을 고려할 때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단 얘기다.

하여 우리는 권력이 누구의 것이냐는 것을 물을 수는 없고, 오로지 권력이 '정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만을 문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권력의 속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는 소유권이 아니라 정당성이다.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은 사물적 존재자 그 자체, 또는 사물적 존재로 교환될 수 있는 권리이지만,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이고 또 권력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소유의 대상이 되면서 이 엄중한 구분이 무의미해져 버린다. 자본가들이 기업을 사사로이 소유하게 되면 노동자들이 기업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131쪽)

그렇다면 현대 기업에서의 근로계약이 정당한 것일까. 물론 표면상으로는 일견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현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사실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실업'이 존재하는 한, 노동자는 여러모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노동자들이 그런 계약에 도장을 찍고 회사에 출근하는 까닭은 기업에 취직하지 않고서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없다. 이처럼 불평등한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계약인 까닭에 고용계약은 자유로운 것도 대등한 것도 아니다. 거기다가 직장이 한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이 늘어가면서, 단순한 직장에서의 계약은 노동자의 삶 전체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리로 확장됐다.

여기서 문제되는 사실은, 이처럼 부당하고 부도덕한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으로 소유된다는 데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권력은 한 개인의 점유물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이 세상을 집어삼킨 세상은, 기업에 이를 가능케 했다.

기업이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아무리 부당하다 하더라도 경영권은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어떤 권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130쪽)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

우리는 지금 '슈퍼갑질'의 폐해를 목격하고 있다. 기업마다 제왕이 존재하고, 노동자에 대해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모두는 자신이 기업의 주인이고, 동시에 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권리를 갖는다는 부조리한 발상에서 시작된다. 야기하는 폐해의 정당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생각은 옳을까. 이를 따져보기기 위해서, 우리는 주식회사와 주주, 그리고 경영인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주식회사는 나의 집이 나의 소유물이듯이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 귀속하는 사유재산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누구에게 속하느냐는 물음은 단순히 사유재산권에 기초해서 주식회사의 주인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 절대 아니다.(135쪽)

주식회사의 주주는 자신이 투자한 금액만의 '유한책임'을 가진다. 또한 언제든지 자유롭게 주식시장에 자신의 지분을 팔고 살 수 있는 '양도자유'를 갖는다.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이런 주주의 유한책임과 주식양도자유의 원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역되는 결론이다. 주주들이 일일이 기업의 경영에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식회사의 소유권은 주주에게 있지만 경영은 주주들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주주는 그 전문경영인을 선택한다.

자,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자.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주식회사의 경우 발기인이 단 1주를 가지고도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고 반대로 주식의 전부를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주식을 한 주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제3자에게 경영권을 위임할 수 있다. 물론 전문경영인이 주식을 소유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말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경영학자들이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설명하면서 드는 근거는 '현대의 거대 기업에서 주식분산이 잘 이루어지고 주주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항상 변동하기 때문에 주주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없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를 저자는 사실문제와 권리문제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라 주장했다.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회사의 본질상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누군가가 주식회사를 소유하고 있다면, 경영권이 그에게 귀속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경영권이 기업의 운영권이라 한다면 그것은 사용권의 일종으로서 소유권 속에 포함되는 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식회사의 소유권이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었더라면 경영권 역시 명확하게 규정될 수 있었을 것이며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된다고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소유권 자체가 어떤 근원적 불안정성 속에 있기 때문에 경영권 역시 동요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법학자들과 경제·경영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주식회사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말을 남용하고 더 나아가 주식을 소유한다는 것과 주식회사를 소유한다는 것을 마치 같은 일인 것처럼 구별하지 않으며, 그 결과 때로는 아예 직설적으로 주주를 가리켜 주식회사의 소유주라고 말하기까지 한다.(171쪽)

주식회사는 자본의 결합체라고 간주될 때는 사물이 될 수 있지만, 법인이라고 간주될 때는 사물이 아니라 엄연히 권리와 의무의 주체인 인격체이다. 그 인격체를 누구의 소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주식회사의 오너(owner)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지금껏 진행된 논리는 주식회사에서 주주들이 주인이 아님을 말해준다. 따라서 경영권도 '당연히 주주의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도 재고를 촉구한다. 그렇다면 경영권은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가. 저자는 기업의 폴리스(polis)화를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경영자를 선택할 수 있는 일종의 '대의민주주의'를 기업 안에서도 실현시키자는 생각이다.

노동자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해서 이것이 노동자 경영권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으며, 국민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를 거부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46쪽)

이렇게 된다면, 기업이 더 이상 기계적 조직이 아닌 인간적 조직의 원리에 입각해 작동할 수 있다.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돌아가는 기업에서 노동자가 주인이 되고,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 단절된 '홀로주체'들이 아니라 더불어 보다 높은 하나 속에서 결속된 '서로주체'로서 '우리'로 거듭난다. 경영자의 경영권 역시 타자로서 노동자에게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보편적 의지와 활동의 표현이며 실현이 되리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주장에 대해 한편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업의 자산을 모두 소모해버릴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저자는 그런 비판에 대해서는 이렇게 응수한다.

도리어 대다수 창업주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에 투철한 사람들이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므로(이것은 비난이 아니다. 나는 애덤 스미스 이래 전승된 자본주의의 전도사들이 믿는 신조에 따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널리 주주들을 통해 자본을 모집하면서도 기득권을 잃을 염려가 없다면, 주식회사 제도를 악용하여 어떤 불의를 저지를지 알 수가 없다.(251쪽)

결론적으로 저자는 주장한다. 누구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줄 필요도 없고, 상법에 단 두 개의 법률조항만 있으면 된다고.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한다.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급진적이다. 나 역시 한참 모자란 지식으로 섣불리 주장에 동조하거나 비판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새롭다. 지구가 돈다는 주장도 당시에는 한낱 소수의견에 불과했다. 속단하지 말자. 저자는 치열한 연구결과와 논거를 통해 묻고 있다. 이제 주류 경제학자와 경영학자들이 이 책에 답할 차례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학문은 발전하고 세상은 나아간다.

내가 아는 한, 여러 목소리들이 모아져 숙의의 과정을 지나 세상을 진보시키는 것이 민주주의다. 우리에게 지금의 부조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선택지가 하나 늘어나는 것, 그 하나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 나쁠 것 없잖은가.

덧붙이는 글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지음, 꾸리에 펴냄, 2012.03, 1만5천원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김상봉 지음, 꾸리에(2012)


태그:#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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