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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는 분을 위한 <어떤 약속> 지금까지 줄거리
한 소년이 거울을 들고 유엔군 병사의 면도를 도와주고 있다(1950. 8. 22.).
 한 소년이 거울을 들고 유엔군 병사의 면도를 도와주고 있다(1950. 8. 22.).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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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화자 박상민은 2007년 2월 하순, 미국 워싱턴 근교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사진을 검색했다. 어느 날 한 인민군 포로가 미군 포로신문관 앞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사진을 찾고는 그 포로가 매우 어린데 놀랐다. 박상민은 그 순간 어린 시절 자기 고향 구미에 흘러온 인민군 포로 김준기 아저씨가 떠올랐다. 

남 주인공 김준기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평북 영변군 용문중학생으로 조선인민군에 입대했다. 여 주인공 최순희는 서울 적십자간호학교 학생으로 인민군 서울 입성 후 의용군에 입대했다. 이들은 낙동강 다부동전선에서 위생병 사수 조수로 만났다. 

이들은 1950년 8월 하순부터 유엔군 총공세로 날마다 다부동 유학산 일대에 쏟아 붓는 미군 B-29 폭격기의 폭탄 세례를 견디지 못해 최순희는 조수 김준기에게 전선을 탈출하자고 꼬드겼다. 두 사람은 한밤중에 전선을 탈출하여 낙동강을 건넜다. 이들은 한 민간 집에서 숨어지내면서 서로 정을 통했다. 최순희는 탈출 중 헤어질 것을 대비하여 김준기에게 전쟁이 끝난 뒤 8월 15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후 탈출 도중 김준기는 유엔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로 갔다. 그는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휴전을 앞두고 남이냐 북이냐를 결정 순간을 앞두고 어머니냐, 순희냐의 선택에 몹시 갈등을 느꼈다. 그는 포로송환을 묻는 기표소에서 먼저 떠오른 얼굴에 따라 'S'(South, 남)와 'N(North, 북)'을 택하기로 작정했다. 준기는 기표쇼에서 순희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 마침내 'S' 쓰고 반공포로로 남녘에 남았다.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 김준기는 포로수용소에서  천만 뜻밖에도 헌병들의 안내를 받으며 수용소 철조망을 통해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그런데 준기는 그렇게 그리던 바깥세상에 나왔건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준기의 실망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래도 준기는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최순희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포로 석방 일주일 뒤 국군에 입대했다. 그는 군 복무 중에도 약속한 날 대한문에 갔으나 끝내 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준기는 강원도 화천의 한 국군부대 의무실에서 복무한 뒤 제대하고는 곧장 본격으로 순희를 찾아 나섰다. 

그는 순희와 첫 정사를 나눈 구미 형곡동을 찾아갔으니그의  행적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정착하여 가축병원 수의사 조수로 근무하다가 대전의 한 대학 부속가축병원으로 옮긴 뒤 결혼하여 딸까지 뒀지만 파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대전을 떠나 서울 동대문시장으로 왔다. 그는 동대문시장에서 지게 일을 하다가 군복무 때 군의관을 만나 인천의 한 병원에서 사무장으로 지냈다. 그런 가운데 준기는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8월 15일이면 순희와 약속한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 찾아갔다. 이 사연이 한 신문의 사회면 톱기사로 실렸다.

김영옥

2007년 3월 3일, 워싱턴 용문옥 특실에서 점심을 나누며 시작한 김준기의 이야기는 그날 저물녘에도 끝나지 않았다. 김영옥 지배인이 특실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어머니가 곧 도착하신다고 전화가 왔어예."
"뉴욕에서 발쎄(벌써)? 지배인, 어서 들어와 인사하라. 이분은 박상민 선생으로, 네 고향 분이시디. 어린 시절 구미 원평동 장터 오거리에서 살아대서. 아마 네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선배가 되실 거야."
"아, 네. 저는 김영옥이라고 합니다. 해방 후 구미국민학교 34회라예."
"나는 13회지요. 반갑습니다."

김준기는 나와 동행한 고동우까지 소개했다.

"그리고 저분은 메릴랜드 주 락 빌에 사시는데 오래전부터 우리 집 단골 고 선생이시디."
"아, 네. 저도 우리 가게에서 몇 번 뵌 것 같아예. 이렇게 만나다니 반갑습니데이."
"반갑습니다."

고동우도 반갑게 답례를 했다.

워싱턴 기념탑
 워싱턴 기념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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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노을

영옥은 나와 고동우에게 깊이 고개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정말 세상 좁구만요."
"네. 참말로예. 우리 집 단골 고 선생님이 이렇게 연결될 줄은 정말 몰랐서예."

영옥이가 매우 살갑게 대답했다.

"나두 외롭기도 하고, 몇 해 전 한국에서 아이엠에프 외환위기로 어렵다고 하여 딸아이를 미국으로 불러들였디요. 지금은 워싱턴 농문옥의 지배인 일을 보고 있디요."
"아, 네. 부인이 뉴욕에서 오신다는데, 그럼 저희는 일어나겠습니다."
"일없어요. 기낭(그냥) 앉아 계시라요."
"아닙니다. 부인이 먼 곳에서 오시는데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셔야지요. 제가 출국 일까지 일주일은 남아있으니까 대신 다시 한두 번 시간을 더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능하면 부인도 함께 만나 직접 살아온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기럼, 이렇게 하자우. 내레 집사람 오면 오늘 우리의 만남 이야기를 하가시우. 본인이 좋다고 하면 이담에 같이 만나고, 굳이 싫다면 우리끼리 다시 만나 밀린 정담을 나눕세다. 나이가 드니께로 넷(옛) 일이 새록새록 생각나고 그리웠는데 이번에 아주 잘 되었수다래.  늘그막에는 추억에 산다고 하더만 지난 세월을 곱씹는 게 아두 돟구만. 박 선생,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 자주 만납세다."
"좋습니다."
"그때 고 선생님도 꼭 동석해요."
"별일 없으면 그러지요."
"기럼, 안녕히 가시라요."
"잘 대접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나와 고동우는 김준기 그들 부녀의 배웅을 받으며 용문옥을 떠났다. 저녁 노을이 워싱턴 하늘을 빨갛게 물들였다. 한국에서 보는 저녁 노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맥아더기념관
 맥아더기념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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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기념관

맥아더기념관은 버지니아 주 남쪽 항구도시 노퍽(Norfolk)시에 있었다. 이번 3차 미국 출국 전에 이호선 출판사 대표가 나에게 맥아더기념관에 한국전쟁 사진이 많이 소장돼 있다는 정보를 귀띔해 주었다. 그래서 3차 조사기간 중 어느 하루 맥아더기념관을 꼭 찾아가기로 했다. 미리 인터넷으로 맥아더기념관을 검색하자 월요일은 휴관이라고 하여, 화요일인 2007년 3월 6일 방문하기로 날을 잡았다.

노퍽은 워싱턴에서 약 200마일 정도의 거리였다. 고동우는 노퍽까지 당일로 갔다 오려면 아침 일찍 떠나야 한다고 부쩍 서둘렀다. 고동우는 조금 늦게 출발하면 워싱턴디시 일대가 출근 시간으로 교통 체증이 심하다고 그날 아침도 거른 채 출발했다. 고동우가 타고 온 승용차는 새 차로 승차감이 좋았다.

맥아더기념관 부속 공연장(Theatre).
 맥아더기념관 부속 공연장(Theatre).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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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장거리이기에 얼마 전에 딸이 새로 산 차를 빌렸습니다. 한국 차인데 성능이 미제나 일제에 결코 뒤지지 않아요."
"놀랄 일이지요. 미군이 폐차한 지프 엔진에다가 드럼통 두들겨 시발택시를 만들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자동차 종주국에 오히려 수출을 하다니 천지개벽만큼이나…."
"그럼요, 전자제품 매장에 가면 한국산 제품이 날로달로 인기가 치솟고 있어요. 그래서 이곳 동포사회에서는 흔히 농담 삼아 대한민국을 '기술은 일류, 기업은 이류, 기업가는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말해요. 아직도 한국 정치계는 대한제국 때나 비슷해요.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기업가를 불러 몰래 검은 돈을 받고 있으니, 그 아래 사람들의 부정부패는 오죽 심하겠어요."

"그새 정권이 바뀌어도 백년하청으로 달라진 게 없더군요."
"술집마담이 그런다면서요. 접대 손님 얼굴만 바뀌었을 뿐 돈 내는 물주는 똑같다고요."
"미국시민들이 고국사정을 더 자세히 아시는군요."
"요즘은 한국과 동시간 방송을 보는데다가 중요인사들이 수시로 미국으로 도피차 오기에 오히려 더 빠른 면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직도 한국사회는 시민의식이 부족한 탓입니다. 한 자리하면 으레 그럴 거라고 쉽게 면죄부를 주거나, 자기는 예외라고 그 부정부패를 답습하는데 문제가 있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원인은 바로 내 탓이더군요. 우리 기성 세대 대부분은 그런 부패문화에 무좀균처럼 쩔어 있어요. 제가 항일유적지 답사 때 베이징의 한 독립지사가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나라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시더군요."
"그럼요. 대한제국 시절에 우리나라가 힘이 없었기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한국을 집어삼킨 일본은 미국과 소련에게 힘이 달리니까 토해 놓은 셈이죠. 그걸 미소 양 대국이 반반씩 나눠 꿀꺽 자기네 영향권에 둔 거지요."

고동우는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 근현대사에 정통했다.

300여 명의 정치범들이 처형되었다(대전, 1950. 10. 4.).
 300여 명의 정치범들이 처형되었다(대전, 1950. 10. 4.).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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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논리와 정의

"미국에 사시면서도 저보다 더 우리 역사에 밝습니다."
"참, 이상하대요. 한국이 싫어서 떠났는데 막상 미국에 오니까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나라의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또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더라고요. 그래서 틈만 나면 한국 역사 관련 책을 구해 읽지요. 우리 동네도서관에 가면 한국 책도 많습니다."
"아, 네."

우리는 도로 사정을 생각하여 부쩍 서둘러 출발했는데도 그새 노퍽으로 가는 길에는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워싱턴디시의 외곽 순환도로인 495번 고속도로를 벗어나 리치먼드로 가는 95번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그제야 다소 한가했다. 미국은 온 국토가 숲으로 뒤덮였다.

넓은 국토가 마냥 부러웠다. 왜 이런 넓은 나라가 극동의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애착을 가질까? 이는 아흔아홉 섬을 가진 부자가 백석을 채우기 위해 한 섬 가진 가난한 자의 재물을 빼앗는 탐욕과 다름이 없지 않는가. 하긴 가진 자의 처지에서는 그게 힘의 논리요, 정의라고 말하리라. 그 힘의 논리와 정의는 과연 마땅할까. 승용차의 속도계 계기판의 바늘은 70마일을 넘고 있었다.

워싱턴DC에서 리치몬드로 가는 95번 고속도로(2007. 3.).
 워싱턴DC에서 리치몬드로 가는 95번 고속도로(2007.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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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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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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