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 스튜디오 지브리


|오마이스타 ■ 취재/이선필 기자| 어쩌면 숙명일 수도 있고, 기구한 운명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가 그간 여러 논란, 특히 정치·역사적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5년 만에 신작을 내놨다는 점만 생각해도 논란 이전에 구미가 당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지난 기사까지 작품 외적인 논란을 중심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해명'(관련기사: <'바람이 분다', 왜 하필 세계대전 전투기 기술자인가?>)을 들었다면, 이번 지면에선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한 상세한 감독의 설명을 담아보았다.

<바람이 분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팬이 아니더라도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몇 가지 분명한 특징이 있었다. 가상의 인물과 시공간이 아닌 실제 역사적 시공간을 설정했다는 점, 아이들의 관점에서 벗어나 성인의 사랑과 꿈을 묘사했다는 점 등이다. 이밖에도 여러 기술적인 면에서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다.

비행기 설계사 호리코시 지로의 삶에 사랑 이야기를 덧붙였다는 <바람이 분다>를 두고 던진 질문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상세한 설명을 보내왔다.

 영화 <바람이 분다> 공식 포스터.

영화 <바람이 분다> 공식 포스터. ⓒ 스튜디오 지브리


서정적 그림에 담담한 목소리의 결합, "신선함 주고 싶었다"

- 아무래도 이번 작품에서 사운드를 간과할 수 없다. 지진 장면이나 바람이 부는 장면 등 상당 부분의 효과음을 사람의 목소리로 대신했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는지? 과장된 괴음도 있었고, 의식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소리도 표현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이하 미야자키) : "점점 선명해지고 입체화되는 영화 사운드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소리가 정밀해지는 게 과연 좋은 걸까', '작품을 보면서 우린 대체 어느 소리를 들어야할까' 등의 고민까지 왔다. 그런 와중에 인간의 소리를 효과음으로 대체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소리는 객관적인 게 아니다. 큰 소음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때가 있고, 오히려 그런 소음 속에서 희미하게 벌레 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소리는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괴음을 넣는 등의) 작업을 했다."

- 전작까진 전문 성우를 주로 썼지만 이번 작품에선 <에반게리온 신 극장판>으로 유명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을 주인공 목소리로 모셨다. 어떤 생각이었나?
미야자키 : "안노 감독은 나와 30년 된 지인이다. 주인공의 목소리를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하던 와중에 스즈키 토시오(스튜디오 지브리 PD)가 제안을 했다. 그간 전문 성우를 쓰다 보니 신선함이 떨어졌었는데 좋은 생각이었다. 그분이 주인공인 지로의 존재감을 잘 나타낸 거 같다. 존재감 있는 소리를 찾아 떠돌았는데 안노의 목소리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특별히 어떤 연기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잘 판단해 연기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 듯하지만, 난 굉장히 기뻤다."

- 신선함을 위한 의도라지만 사람의 목소리로 효과음을 낸 건 아날로그 방식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지브리 스튜디오도 본격적인 컴퓨터 작업을 시작하게 됐는데, 여전히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작업 부분이 있는지?
미야자키 : "컴퓨터를 사용해 여러 효과를 넣고는 있지만 연필로 그리는 것, 붓으로 그리는 것 등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조건을 지키고 있다."

- <바람이 분다>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장면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미야자키 :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려야만 하는 게 있었다. 군중 장면 말이다. 군중들을 그리는 작업을 기뻐하는 스태프는 거의 없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 있는 주인공은 반드시 그려야 할 것들이다."

 신작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개봉을 앞두고,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26일 일본 도쿄 작업실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신작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개봉을 앞두고,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26일 일본 도쿄 작업실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대원미디어


주인공 지로 외에 주목해야 할 존재, 카프로니 백작의 정체는?

- 작품에서 지로의 꿈속에 등장하는 카프로니 백작이 있다. 특별히 그를 내세운 이유는? (주 - 지브리 스튜디오의 이름이 바로 이탈리아 비행기 설계사인 카프로니가 만든 비행기 이름인 '기블리'(Ghibli)에서 따온 것)
미야자키 : "카프로니는 인생의 선배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의견도 시간이 지나며 변해간다. 처음엔 '비행기는 멋있는 꿈'이라고 했지만 후엔 '비행기는 저주받은 꿈'이라고 한다. 카프로니도 다시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곧 인류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라도 카프로니가 계속 '멋있는 꿈'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선배가 아닌) 악마일 것이다."

- 카프로니와 지로는 모두 결과적으론 전쟁 관련 물자를 만든 인물이다. 특정 인물에 대한 미화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야자키 : "미화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내 신념은 흔들리지 않는다."

- 한국에서는 대중문화나 예술계 인물이 특정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다소 민감하게 받아들여 진다. 이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미야자키 : "목소리를 내야 할 부분에서 내지 않으면, 시대에 휩쓸려 버렸을 뿐 시대를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목소리만 내고 있는 것뿐이라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없다."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 지브리 스튜디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관, 무엇이 영향을 끼칠까

- 그간 감독님은 환경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작품을 만들어왔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등 최근 일본의 환경 문제가 앞으로의 작품에 어떤 영향 줄 것 같은지?
미야자키 : "명암을 가리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현실을) 좀 더 깊게 받아 들여야만 한다. 더욱 근본에 깊게, 깊게 내려가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작품을 만들어 줄 수 없다."

- 감독님은 <온 유어 마크>(1995)처럼 음악과 단편 애니메이션의 결합 등 여러 시도를 해오셨다. 지브리 미술관에서만 상영하는 어린이 단편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이런 단편 작업을 대중과 함께 공유하고 소통할 계획은 없는지?
미야자키 : 지브리 미술관의 작품은 현재까지 9편이 있다. 상업주의나 비용에 관계없이 이런 작품을 갖고 있다는 건 보람된 일이다. 가능한 조용한 공간에서 아이들이 여러 작품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진 궁극적 이념의 표현이다."

- 미국 등 주요 국가의 작품에선 갈등을 가장 중시하는 작법이 유행이다. 하지만 일본, 특히 지브리의 작품은 굵직한 갈등과 대립이 없어도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드림웍스, 디즈니, 픽사와는 다른 지브리만의 스토리텔링 원칙이 있다면?
미야자키 : '악역을 만들고, 악역과 싸우고, 악을 이긴다. 이것을 보고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얻고 만족한다' 이런 패턴들에 우리는 화가 난다. 뭔가 다른 길이 없을지 생각하고 있다."

- 원로 만화가는 한국에도 여럿 있지만 원로 애니메이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의미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존재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독보적일 것이다. 무엇이 감독님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게 하는지?
미야자키 : "애니메이터가 되고 나서 세계의 비밀을 조금 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움직임이란, 빛이란, 감정이란, 육체란, 시간이란……. 난 매우 매력 있는 (세계의) 틈새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 이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의 한 장면. ⓒ 지브리 스튜디오


"논란 이전에 고뇌하면서 성실하게 만들었다고 자신한다"

- 한국에서는 반일감정도 있겠지만 여전히 감독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국 관객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미야자키 : "반일감정은 반한감정도 발생시킨다. 나는 동아시아가 평화로웠으면 하고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다. 유럽은 지나친 전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EU를 만들었다. EU가 현재 고전하고 있지만, 우리가 배워야할 점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 일본의 대표적인 전투 비행기인 제로센과 전쟁기업 미쓰비시의 언급만으로도 <바람이 분다>가 개봉 전부터 한국에선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 관객들이 특별히 이해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지.
미야자키 : "영화를 보든 안 보든 그 문제는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 영화를 어떻게 볼지도 각 개인의 자유다. 분명한 건 난 고뇌하면서 성실하게 이 영화를 제작했다. 이 점만은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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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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