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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견학교 구내식당 앞 잔디 언덕 계단 앞에서 보행하는 풍요와 아빠
 안내견학교 구내식당 앞 잔디 언덕 계단 앞에서 보행하는 풍요와 아빠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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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비온 뒤 갬

시각장애인 안내견 풍요와 맞이하는 첫날 아침이다. 익숙해진 거센 빗줄기 소리가 새벽잠을 깨운다. 여기가 어디지? 고개를 들어 둘레둘레 주변을 휘둘러보는 시야에 풍요의 낯선 눈망울이 잡혀온다.

"얘야, 넌 누구니? 여긴 또 어디고..."

그런 말을 입밖으로 내뱉으려는 순간, 어제의 일들이 제빠르게 머리를 스친다. 아! 그렇구나 여기는 안내견 학교 기숙사이고, 저 아이는 나의 새로운 운명, 새로운 사랑, 풍요지….

"풍요야 안녕, 잘 잤니?"

어느새 새벽 잠에서 깨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녀석이 자못 안쓰럽다.
애써 밝은 미소와 명랑한 음성으로 풍요에게 새아침 인사를 건네보려 하지만, 지난 밤의 불면과 눈물로 잠겨버린 목에선 천식 환자의 쉬어버린 낯선 음성이 새어나올 뿐이다.

그래도 쫄래쫄래 달려와 내 손에 키스하는 녀석이 정겹기 이를 데 없다. 순간 다시 울컥, 눈물이 솟는다. 이 아침, 저쪽 견사에서 홀로 낯선 아침을 맞으며 눈물 짓고 있을 슬기의 애처로운 눈망울이 가슴으로 날카로운 비수가 돼 찔러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길이 그녀와 나, 모두를 위한 새 삶의 길이기에, 눈 한 번 크게 깜빡이고, 새로운 다짐으로 내 앞의 풍요를 바라본다. '그래! 이제 슬기는 내게서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오직 풍요 너만이 나와 함께할 현실이요, 새로운 사랑인 것이다.' 자꾸만 내 안으로 오그라드는 손을 뻗어 풍요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어 본다.

"풍요야, 너도 지금 내가 많이 낯설지? 나도 실은 네가 좀 낯설어. 내겐 슬기라는 아주 이쁘고 착한, 그러면서도 또 정말 총명한  언니가 있었거든. 그러나 그 언니는 이제 은퇴해서 새로운 가정으로 가기 위해 저쪽 견사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며, 새로운 앞날을 준비하고 있단다. 그 아이도 오늘 이 아침이 몹시 낯설고 의아할텐데... 그리고 앞으로의 하루하루는 그 아이에게 더욱 많이 힘들기도 할 것 같고..."

다시금 목이 메여,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젖혀, 쏟아지려는 눈물을 목구멍 뒤로 넘겨본다.

"아빠, 그런 걱정일랑은 하지도 마세요. 우리 리트리버종 가족들은 환경 적응력이 어느 동물보다 월등히 뛰어나답니다. 슬기 언니는 곧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제빨리 변신해, 적응해갈 거예요..."
"정말 그럴까? 정말 그렇게 우리 슬기도 나를 추억으로 쉽게 잊어갈까?"
"에이, 아빠도 참, 어떻게 그렇게 금방 지금까지의 운명적인 사랑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옛추억으로 잊어갈 수 있겠어요... 다만 언니도 부단히 노력할 것이란 말이지요. 아빠의 행복과 새롭게 현실로 다가들 언니의 새 가정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렇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삶에 제빨리 적응해야 가슴 앓이도 덜 하고, 새 행복을 마음껏 누려갈 수 있는거겠지....."

그러나, 차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정한 내 가슴으로 회오리 같은 아픔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간다.

"그래, 내가 어떻게 도와줄 방법도 없을 바에야... 잊어주는 게 차라리 그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어떻게... 정말 어떻게 그 아이를 잊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나설 수 있을지..."

착잡한 마음의 아픈 상처로, 아릿한 통증을 후비는 긴 한숨이 스쳐지난다.

"풍요야, 우리 하루빨리 서로에게 더욱 친숙해지도록 열심히 노력해보자. 네가 내게 바짝 다가서야, 내가 슬기를 가슴 속 깊이 고이 묻어갈테니까... 알았지? 우리 서로 함께 노력해서 오늘부터 시작된 우리의 날들을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로 풍성히 맺어가보자고... 자, 화이팅..."

살랑살랑 꼬리치는 풍요를 다시 힘껏 끓어 안아본다.

"풍요야 사랑해..."
"히히... 아빠, 저도요..."

안내견학교 기숙사 자기 요 위에 누워 카메라를 바라보는 풍요
 안내견학교 기숙사 자기 요 위에 누워 카메라를 바라보는 풍요
ⓒ 김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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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에 풍요의 아침식사를 차려주고, 기숙사 뒷편에서 용변을 뉘이는 것으로 오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풍요는 다행히도 내게 별다른 거부감 없이 소변과 대변을 모두 손쉽게 본다. 9년 전, 슬기는 낯을 가려 좀처럼 용변을 보지 못해 내 애를 무척이나 태웠었는데 말이다.

잠시 후, 오전 8시에 직원용 구내식당에서 담당 선생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물론 구내 식당까지 잘 이동하도록 능숙하게 풍요가 앞에서 나를 안내해해줬다. 그리고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내 식사가 끝나기까지 한치의 동요도 없이 기다려주는 녀석이 참으로 대견하다. 오전 수업으로 풍요와 교감하는 여러가지 행동 언어들과 조심해야할 수칙들을 배운다. 9년여 전과 달라진 몇가지 주의사항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워 듣고 숙지한다.

잠시 후, 풍요에게 비옷을 입히고 나도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용 비옷을 입은 채, 빗속 보행을 시도해본다. 빗속에 처음 보행을 시도하는 게 약간은 부담스러웠지만, 앞으로 빗속 보행도 따로 연습해야 하기에, 그저 아무 말 없이 지도 선생님의 지시에 순종한다. 슬기와 비를 맞으며 걸을 때, 나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우비나, 기타 어떤 장비도 없이 그저 그녀와 걸으며, 함께 비를 맞았다.

혹자는 왜 비 속을 꼭 견인이 함께 걸어가야 하느냐고 물어보겠지만, 항상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지 않는가. 빗속에 출퇴근도 해야 하고, 빗속에 급한 볼일도 보러 다녀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9년 전에도 슬기와 함께 빗속 보행을 따로 훈련했던 것이다.

그간 슬기와는 익숙한 보행이었지만, 이제 풍요와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방식의 보행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빗속에서도 보폭이나 보행 속도, 기타 많은 것들에서 내가 잘 따라갈 수 있도록 한 풍요의 안내가 능숙하다.

잠시 그렇게 걷자니 이내 비가 그치고 무지개의 아름다운 환영을 받으며 햇님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포시 내민다. 실로 오랫만에 맞이하는 햇살이 반갑기 그지 없다. 그렇게 오전 보행 연습을 잘 끝내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풍요의 요의를 해결해 준다.

오후에는 더욱 복잡하고 난위도가 높은 용인 시내의 도로들을 풍요와 함께 걸어본다. 도로 곳곳의 장애물이나 시내의 많은 사람들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며 나를 인도하는 녀석이 자못 신기하기까지하다.

"그렇지... OK... 우리 풍요 잘하네, 우리 풍요 정말 잘 한다. 아자아자, 풍요 화이팅..."

담당 선생님의 칭찬과 추임새에 한껏 고무된 풍요의 발길이 사뿐사뿐 날개를 달았다. 덩달아 신나 나붓하게 흔들어대는 갈색 꼬리 끝에서 비구름을 뚫고 나온 햇살의 화려한 입자들이 영롱한 보석처럼 찬란히 부서져 빛난다.

"풍요야, 힘 안 들어? 아빤 이렇게 온몸이 구슬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는데... 아무래도 옷에 땀을 좀 짜내고 걸어거야 할 것 같다."
"에이, 아빠도...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세요? 저도 엄청 덥고 목도 마르지만, 우린 지금 훈련중이잖아요...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이란 말 모르세요?"
"하하하... 아빠가 풍요한테 한방 맞았구나. 맞아요. 더욱 강한 훈련이 안전한 실생활을 보장해주지. 저쪽 길을 돌아서면,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있으니, 조금만 더 참자."
"네..."

뜨거운 숨결에 묻어 기쁜 탄성이 터져나온다. 그렇게 두 시간에 가까운 보행 훈련을 잘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서도 풍요의 체력은 지치지 않는다. 방 안에서도 젊은 패기의 뜀박질은 멈출줄을 모르고 피곤에 지쳐,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나를 쫓아다니며 장난을 걸어오는 것이다. 참으로 젊음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나도 20대 때에는 저렇듯 활기 넘쳤겠지? 아니, 우리 슬기도 9년 전엔 저렇게 혈기왕성하고 재기발랄했었지...

"아빠... 이제 제 저녁 주셔야 해요. 오늘 땀을 좀 뺐더니, 목도 마르고 배도 많이 고프네요. 어서 제 식사 차려주세요..."
"그래, 풍요야... 오늘 정말 수고 많았고, 고맙다. 네 덕분에 아무 생각 없이 훈련에만 열중할 수 있었구나. 잠시만 기다려, 아빠가 얼른 밥상 차려올 테니..."

바쁜 걸음으로 사료방으로 뛰어가는 내 발길에도 미래에 대한 가벼운 흥분으로 설렘이 어려온다. 그렇게 오늘 훈련은 마치고, 꿀 같은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풍요야 오늘 정말 네 안내 솜씨는 대단히 훌륭했어... 그 누구도 너를 쉽사리 따르지 못할거야 내일도 열심히 해보자 알았지?"
"네... 걱정마세요. 아빠."

힘차게 꼬리치는 풍요의 갈색 털 위에서 빨간 노을빛이 잠시 머물러 반짝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홈피 noulpoet.kr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풍요, #새출발, #안내견, #운명,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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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시인으로 10년째 한국문인협회 회원과 '해바라기'동인으로 활동하고있으며 역시 시각장애인 아마추어 사진가로 열심히 살아가고있습니다. 슬하에 남매를 두고 아내와 더불어 지천명 이후의 삶을 훌륭히 개척해나가고자 부단히 노력하고있습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탈시설만이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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