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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생활과 정신문화에 영향을 미친 것 중에 돌만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삶과 죽음의 문제, 신앙에 이르기까지 돌과 우리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생명력으로 치면 쇠보다 질기고 보드랍기로는 나뭇결을 능가한다. 겉으로는 쇠처럼 차가우나 속은 훗훗하여 수천 년 사랑을 받아왔다.

수천 년을 함께 한 돌문화

돌을 사용하는 문화(石器文化)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선사시대의 갈판과 갈돌은 지금 돌확으로 이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친 보리나 붉은 고추를 갈려면 돌확을 이용하였다. 돌확에 고추나 보리를 간 뒤, 쭉 허리를 펴며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고 하시던 우리 어머니들과 선사시대에 곡식과 열매를 갈판에 갈며 생활한 여인네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돌확은 갈판의 최신형 모델인 셈이다.

몇 년 전까지도 우리 어머니가 쓰던 돌확이다
▲ 돌확(확돌) 몇 년 전까지도 우리 어머니가 쓰던 돌확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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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관련한 문화로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이 수천 년 잠에서 깨어 부활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무덤이다. 지하에 안장시설을 하고 봉분 대신 너럭바위를 굄돌 없이 얹었다. 굳이 유형을 따지자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개석식 고인돌이다.
 
고인돌이 부활하였다
▲ 노무현대통령무덤 고인돌이 부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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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통치자의 무덤을 고인돌로 한다는 생각이 한 사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나왔는지 모르지만 돌을 신성시하고 경외하여 돌무덤을 꾸몄던 문화적 단면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민중의 얼굴인 돌장승과 민불

민간신앙인 돌장승이 조선후기에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돌장승의 연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2000년 이상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게 자리 잡은 민간신앙의 한 조형물인 점은 분명하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이나 경계표지로 그 의미가 축소되긴 하였지만 사라지지 않고 불교와 적절히 타협하며 민간신앙으로서 비중을 유지하여 왔다.

18세기 민중의식의 성장과 함께 민중의 수호신으로 돌장승이 대거 출현한다. 민중과 함께하는 민간신앙으로 돌장승이 부활한 것이다. 이때에 불교의 중흥과 맞물려 사찰장승의 유행도 이때 이루어진다.
 
할아버지얼굴을 하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 창녕관룡사 돌장승 할아버지얼굴을 하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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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장승의 얼굴은 둥근 눈망울, 합죽한 입에 주먹코를 한 당시 조선인의 얼굴, 민중의 자화상이었지만 분노하면 언제든 바뀌는 게 민중의 얼굴이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둥근 눈을 부릅뜬 채 주먹코는 분노에 벌름거리게 된다.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보이는 장승이 어떤 때는 무섭게 보이는 게 이런 이유일 게다. 이런 이중적 얼굴에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요즈음처럼 어지러운 세상에는 어떤 얼굴을 한 장승이 나타날까 궁금하다.

이런 민중적 얼굴은 이 당시 조성된 불상에서도 나타나는데 불교가 민중에 다가온 케이스다. 이는 민간신앙의 장승과 선돌문화와 불교문화가 결합하여 나타난 토착화된 민중의 얼굴, 민불(民佛)이다. 절에 세우지 않고 절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세웠다.

화순 벽나리 민불이 대표적이지만 전국 곳곳에서 발견된다. 충남 금산 계진리에 절에서 한 참 떨어진 느티나무 밑에 석불이 서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를 미륵이라 부른다. 이 미륵을 절로 옮기려 하자 마을에 재앙이 닥쳐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일화가 방송을 타서 화제가 되었다.

민불은 민중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는 민중들의 의지가 담긴 석불이다
▲ 충남금산 민불 민불은 민중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는 민중들의 의지가 담긴 석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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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장옷을 뒤집어 쓴 채 두 손 모아 간절히 비는 젊은 처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석불 앞에서 간절히 비는 민중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으로 법당에 근엄하게 앉아 신자를 기다리지 않고 과감하게 민중의 곁으로 다가온 민불이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석장승과 민불은 두 차례에 걸친 전란 이후 기존의 기득세력과 종교로는 피폐해진 자신들의 삶을 구제받지 못한다는 자각 아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민중 스스로 위안을 찾으려는 민중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

축석, 기술인가 예술인가?

우리 민족은 돌을 쌓는 데 천부적 소질을 갖고 있다. 돌로 성과 담을 쌓고 다리와 굴뚝을 만들고 돌을 쌓아 다랑논을 만든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서 된 것은 아니고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려는 절박함에서 오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재주가 몸에 배기도 했다.

테트리스게임에서 모양이 다른 블록을 맞추듯 자연석으로 절묘하게 쌓았다
▲ 축성(築城) 테트리스게임에서 모양이 다른 블록을 맞추듯 자연석으로 절묘하게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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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논은 우리의 숙명적 결과물이다. 숙명은 절박함으로 다가온다. 남해가천마을의 '다랭이 논'은 삶에 대한 절박함 속에 인간의 노동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예술품이다. 축석기술을 논하기에 앞서 노동예술로 인식되어야 한다. 거기엔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 있었다. 논에서 나는 벼 한 톨, 마늘 한 알은 물론 돌 하나하나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락논은 인간이 절박감속에 만들어낸 위대한 노동예술이다
▲ 남해 다랭이 논 다락논은 인간이 절박감속에 만들어낸 위대한 노동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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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뭐니 해도 석축의 백미는 불국사석축이다. 토함산 자락에 평지사찰처럼 지어져 위대한 석축을 낳았다. 자연괴석과 잘 다듬은 장대석을 적절히 배분하고 자연석이 상하지 않도록 인공석을 다듬어 짜 맞춘 석축을 보면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느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감동이니 최순우 선생이 불국사 대석단을 보고 "숨 가쁘도록 내 가슴에 즐거운 방망이질을 해준다"고 한 말이 이 석축을 보고 있으면 딱 들어맞는다.

 이 석축을 보고 있으면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 불국사 석축 이 석축을 보고 있으면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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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서쪽 회랑 밑 석축은 기술이라기보다는 석축예술이다. 현대식 건물의 철제빔처럼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둥과 보를 만들고 그 사이에 막돌을 채워 쌓았다. 지세(地勢)는 그대로 두고 경사 따라 장대석 길이를 다르게 하였다. 평행사변형, 직사각형, 꺾임형 등 그 모양도 다양하여 최순우 선생이 말한 '장단 맞춰 쌓았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돌결의 미

돌 쌓는 기술이 있으니 돌을 깎고 다듬고 쪼는 기술이 없을 리 없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어린애 같은 미소며, 석굴암본존불의 숭고한 미소는 떡 반죽으로도, 도화지에 연필로 데생을 하더라도 그렇게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떡 반죽과 연필로는 돌결의 부드러움과 울림을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돌에는 독특한 결과 울림이 있기 때문에 삼존불의 미소를 연필이나 떡반죽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 서산마애삼존불 돌에는 독특한 결과 울림이 있기 때문에 삼존불의 미소를 연필이나 떡반죽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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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사본존불의 숭고한 미소는 그렇다 치더라도 결가부좌한 다리 밑에 보이는 부채꼴 모양의 주름은 태고적 마그마가 주름져 흘러 만들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재주는 불상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돌로 뭐든지 만들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다. 정림사지오층석탑은 목 건축의 공포처럼 옥개받침을 곡선으로 하고 옥개석 끝을 살짝 세워 나무보다 더 경쾌하게 처리하였다. 잘 다듬은 돌결은 나뭇결보다 보드랍고 훗훗하여 자꾸 만지고 싶어지고 껴안고 싶어진다.

스케일 면에서 뒤지지 않는 우리의 돌문화

우리에게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돌문화만 있는 게 아니다. 먼 산을 배경으로 논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강릉 굴산사터 당간지주는 힘차고 장엄하고 당당하다. 선돌마냥 막돌 두기를 세웠는데 당간의 꼭대기를 쪼아낸 것을 빼놓고는 가공하지 않아 기운이 대단해보인다.

논 한가운데 우뚝서있는데 기운이 대단해 보인다
▲ 강릉 굴산사터 당간지주 논 한가운데 우뚝서있는데 기운이 대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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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당당하면서도 뽀얀 살결을 가져 세련미가 있는 경회루 돌기둥은 또 하나 우리의 자존심이다. 경회루를 이고 있는 돌기둥을 보고 있으면 한 왕조를 지탱해온 힘이 느껴진다. 아랫동아리는 굵고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민흘림기둥으로 곱게 다듬은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24개의 바깥 사각기둥과 안쪽의 원형기둥의 주열이야말로 소박한 문화에 길들여지고 스케일에 자존심이 상해왔던 우리에게 힘이 되고 큰 위안이 된다.

경회루 주열을 보고 있으면 한 왕조를 지탱해온 힘이 느껴진다
▲ 경회루돌기둥 경회루 주열을 보고 있으면 한 왕조를 지탱해온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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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생활의 도구로 때론 신앙의 대상으로 수천 년 우리와 함께해왔다. 그리고 앞으로 또 수천 년을 함께 해갈 것이다. 18세기에 세워진 돌장승의 얼굴은 그 당시의 조선인의 자화상이었다. 지금 우리가 장승을 만든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18세기의 민중의 자화상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겉은 편안해보이지만 내면은 분노에 찬 얼굴. 몇 백 년 흐른 뒤 우리가 만든 장승의 내면의 얼굴을 해석하는 것은 후손들이 역사적으로 판단할 문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돌문화, #돌, #돌확, #석축, #석조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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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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