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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탄생하고 정부가 수립되었던 1948년에 태어난 나는 올해 만 65세, 어느덧 노인 연령에 접어든 나이다. 바람 같고 유수 같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뼈아픈 기억들도 주저리주저리 많다. 우선 우리나라 민주주의 성장 과정 안에 처참하게 도사린 수난사를 돌아보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고 눈물겨워지기도 한다.

내 청년 시절의 암울한 기억

제18대 대통령선거 날인 2012년 12월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언주중학교에 마련된 삼성2동 제3투표소에서 유권자가 기표를 마친뒤 기표소를 나서고 있다.
 제18대 대통령선거 날인 2012년 12월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언주중학교에 마련된 삼성2동 제3투표소에서 유권자가 기표를 마친뒤 기표소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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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년이 되어 처음으로 국민주권을 행사했던 1969년 10월의 '삼선개헌 국민투표'를 시푸르게 기억한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논산훈련소 제28교육연대에서 대기병 생활을 할 때 동료 대기병 4명과 함께 투표에 참여했다. 공개투표였다. 인사과 막사 안에서 장교들과 하사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표를 해야 했다.

동료 대기병들은 모두 힘차게 찬성 쪽인 ○에다 기표를 했지만 나는 그 짧은 시간에 깊은 고민의 과정을 거쳐 과감하게  ×쪽에 기표를 했다. 평생 동안 나 자신의 비겁함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어, 미친놈 보게!"라는 소리를 들었고, 큰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후 '사건'을 겪었다. 어느 날 아침을 먹고 식판을 들고 바삐 뛰어가는 나를 불러 세우는 이가 있었다. 내 '사제(私製)' 이름을 부른 이는 연대장 문아무개 대령이었다. 그는 내게 말없이 배구공을 튕겨 보내며 토스를 유도했다. 그와 몇 번 배구공을 주고받다가 중대로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의문에 시달렸다.

연대장이 이등병인 내 이름을 어찌 알며, 왜 바삐 뛰어가는 사병을 불러 세워놓고 배구 토스를 하자고 한 것일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끈질긴 의문에 몰두한 끝에 나는 그날 밤 2500여 명 연대병력 중에서 삼선개헌 국민투표에 반대를 표시한 사람은 나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 또 연대장의 그런 행동은 나를 인정한다는 무언의 표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세 차례나 '파월지원'을 한 끝에 파월특명을 받았는데, 부대를 떠나던 날 연대장이 불러서 연대장실로 들어갔다. 연대장인 문 대령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월남에서 대대장을 하다가 왔기 때문에 너를 월남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이나 네게는 파월특명을 내주지 않았는데, 네가 세 번이나 지원을 하고, 나도 국방대학원에 입교를 하게 돼서 결재를 했다. 너는 월남에 가면 말단 소총부대 전투병으로 갈 텐데, 부디 몸조심하고 몸성히 돌아오기 바란다."

그러며 연대장은 내게 봉투 하나를 주었다. 연대장실에서 나와 봉투를 열어보니 3천원이 들어 있었다. 내가 첫 번째 파월지원을 했다가 특명을 받지 못했을 때 집에 편지를 하여 3천원을 송금 받아서 인사과 김아무개 병장에게 주었던 '뇌물'과 똑같은 금액이었다.
(나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인사와 관련하여 뇌물을 쓴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군대시절 파월지원을 하면서 인사과 병장에게 준 3천원이 유일하다.)   

나는 논산훈련소 조교와 파월 백마사단 도깨비연대 전투병, 중동부 전선 제15사단 철책선 부대의 분대장을 거쳐 1972년 5월 제대를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시월유신' 국민투표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유신헌법에 찬성을 해야만 나라를 발전시키고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다며 식사 때마다 시월유신을 옹호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 국민주권을 행사하게 된 누이동생을 설득하여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전국적으로 93% 이상의 유권자가 찬성을 한 가운데 우리 지역에서는 97%라는 찬성표가 나왔다. 나는 그 사실에 큰 공포를 느껴야 했다. 놀라운 찬성율도 무서웠지만 고작 3%인 반대쪽에 우리 남매가 속했다는 사실에서 정말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체제를 살아오면서 북한의 김일성 체제와 뭐가 다른가라는 의문에 시달려야 했다. 국민의 90% 이상이 기계적으로 찬성을 하는 나라, 절대 권력자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하면서 마음대로 인권을 탄압할 수 있는 나라, 민주주의의 원칙을 철저히 파괴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할 수 있는 나라는 결코 온전한 나라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온 가슴에 새기곤 했다.

그게 다 박정희 공이다?

그 당시 절대 권력자 박정희의 입에서는 '몰지각한 일부 국민'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곤 했다. 나는 '몰지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박정희를 경멸하곤 했다. 몰지각한 사람은 일부 국민이 아니라, 바로 박정희 자신이었다. 그의 몰지각함 때문에, 그의 몰지각한 탐욕과 잔혹함 때문에 온 나라가 병영국가가 되어 있는 형국임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박정희로부터 유래하는 '몰지각'은 그때로부터 40년이 흐르고 있는 지금에도 도도한 강물을 이루고 있다. 비겁하고 치사하고 졸렬한 소인배들의 공작정치, 무지막지하고도 추악하기 짝이 없는 패거리정치가 이 나라의 정치를 농단하고 있는 현실을 두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2012년 12월18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박정희, 육영수 사진을 들어보이며 박 후보를 응원하고 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2012년 12월18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박정희, 육영수 사진을 들어보이며 박 후보를 응원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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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를 모방한 전두환의 12·12쿠데타와 5·17쿠데타 이후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얻어진 대통령 직접 선거에 참여하면서 1987년의 제13대 대선 때는 서산군 '공명선거 감시단'의 태안 대표로, 또 1992년의 제14대 대선 때는 태안군 '공정선거감시단' 상임의장으로 활동했다. 내 돈 쓰고 온몸으로 뛰면서 동네 어깨들과 싸우느라 눈물겨운 상황들을 겪기도 했다.

1997년 제15대 대선 때는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의 감격을 누렸고, 2002년 제16대 대선 때는 민주세력의 놀라운 응집력을 확인하며 민주주의의 발전과 통일에 대한 희망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7년의 제17대 대선과 지난해 2012년의 제18대 대선을 치르고 오늘에 이르는 시간 속에서는 민주주의의 후퇴와 심각한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후퇴 현상, 노골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내 마음 상태를 다시 한 번 다독이지 않을 수 없다.

내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청년 시절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 찬성표를 던지고 시월유신 국민투표 때 93%의 찬성 쪽으로 휩쓸려버렸던 관성을 지금도 곱다시 유지하고 있다. 대체로 깊은 통찰의 눈과 '생각의 힘' 쪽으로는 연마의 기회를 갖지 못한 듯하다. 그저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반추하며 민생을 살린 박정희의 공을 옹호하는 쪽으로만 기를 쓴다.

오늘 민주니 인권이니 양심 따위를 찾는 것도 다 먹고 살만 하니까 하는 짓이라는 말을 노상 한다. 그게 다 박정희 공인 줄도 모르고 박정희 욕을 하니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서 천지분간 모르는 것들은 몽땅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고 극언을 하는 친구도 보았다. 그런 친구들 가운데서 외로움을 느낄 때도 많다.

나는 경제발전이라는 것의 본질적인 가치, 궁극적인 지향점에 대해 친구들에게 논한 적이 있다. 우리가 산업발전을 이루고 경제를 향상시키려는 근본적인 목적은 민주주의를 잘 발전시키고 유지하려는 것에 있지 않을까? 경제발전의 목적이 잘 먹고 잘 놀고, 비행기 타고 외국 여행이나 하고, 프로야구장에 가서 열광하는 것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발전의 목적이 민주주의를 잘 발전시키고 유지하려는 것에 있다면 그것의 내용은 뭘까? 그것은 공평한 룰이 적용되고 유지되는 사회, 파인플레이가 전개되는 환경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곧바로 진실과 정의라는 명제와 연결된다. 다시 말해 공정한 사회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요체이며 경제발전의 목적지라는 것이다.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의 전면에 나서서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우선 공명정대해야 한다. 소인적인 기질을 극복하고 대인적인 풍모를 지녀야 한다. 거짓과 모략과 꼼수에 연연하지 말고, 진실과 정직과 양심을 지향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는 쪽으로 처신해야 한다.

자신의 영달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 쪽으로만 혈안이 되어 있다면 자신도 불행해지고 나라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기틀을 망각하거나 무시한다면 공정한 사회는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다.

국정원 선거개입,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국가의 기관이 일개 정파의 노리개로 전락한 듯 선거에 개입한 '국정원사건'은 시국선언에 참여한 281명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말 그대로 국민주권을 유린한 사건이며 국가의 기틀을 문란케 한 중대 범죄이다.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을 이용한 여론조작 행위로 노출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적발되었을 때 경찰 수뇌부는 이 사건을 은폐하고, 거짓내용을 언론에 발표했다. 경찰도 국가의 경찰이 아닌, 일개 정파의 노리개로 전락해버린 순간이었다.

국정원사건이 노출되고, 경찰의 은폐 시도와 검찰의 봐주기 수사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집권당인 새누리당과 국정원은 국가 최고기밀인 2007년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내용까지 불법적으로 공개해 이미 세상을 떠난 전임 대통령을 난도질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물 타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집권여당의 물 타기 시도는 또 다른 국기문란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대통령도 볼 수 없고, 법으로 수십년간 공개가 금지되어 있는 국가 최고기밀 문서를 누군가가 몰래 들여다보고, 유출시키고, 조작하고 왜곡하여 선거에 이용해먹은 정황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물 타기 시도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만 것이다.

물 타기의 효과를 얻기 위해 노무현이 NLL(서해 북방한계선)를 포기했다는 정상회담 회의록 상에 있지도 않은 사항을 물고 늘어지지만, 그 효과는 이미 물거품이 된 상황이다. 그 물거품을 가지고 계속 거품을 만들어내는 짓은 국민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고 분노를 촉발시킬 뿐이다.

총체적인 국정원사건은 한마디로 현 집권층의 정치력과 국가와 역사에 대한 인식 수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태도 등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늘의 총체적인 난맥상이 집약되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국민주권 유린', '국기문란'은 적확(的確)한 표현으로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자 훼손임이 자명하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민주주의 수호 촛불문화제'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 "국정원 선거개입 제대로 된 국정조사 실시하라"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민주주의 수호 촛불문화제'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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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정부수립 이후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시련과 곡절들을 겪어왔다. 다시 말해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국민이 피를 흘리며 고초를 겪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이 정도의 민주주의를 이루어 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룩해온 민주주의가 매우 허약한 것임을 우리는 오늘 뼈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물론 민주주의 퇴보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국정원과 검찰과 경찰 등 국가기관들이 국가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보다는 일개 정파를 위해 복무하는 현상, 권력에 철저히 장악된 방송매체들과 수구족벌 언론들이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며 오도를 일삼는 보도 태도 등을 보노라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 이 정도의 민주화도 박정희가 이룩한 경제발전 덕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은 잘 먹고 잘 놀고, 비행기 타고 외국 여행이나 하고,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열광하는 사람들만 눈에 보이는 모양이다. 또 국민 모두가 그것이면 만족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비행기 자주 타고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열광하는 사람들도 그 안에 공평한 룰이 존재함을 잘 알고 있다. 공평한 룰이 공정한 사회의 밑바탕임을 잘 알기에 프로야구 경기장에서 공평한 룰을 줄기며 열광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현 집권층은 국민을 무시하거나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자신들의 눈높이 정도로만 재단을 하는지도 모른다. 현 집권층이 국민을 무시하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장악에 의한 대중조작으로 국민을 얼마든지 좌지우지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국민에게 실망감과 좌절감을 안겨주며 분노케 하는 근본 이유를 박근혜 대통령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또 오늘의 난국을 난국으로 인식하지도 않는 것 같다. 오늘의 난국을 슬기롭게 풀어내며 '희망의 나라'로 만들어갈 정치력과 도량, 역사의식과 혜안 등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정말 무리한 일일까?


태그:#국정원 사건, #물타기 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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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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