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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하성태 얘는 누가 테러 안 하나, 사상이 의심되는 애구나."

작년 12월 11일, 대선 후보 2차 TV토론 후 포털에 나간 토론 관련 리뷰 기사에 달린 댓글을 요약하자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테러'와 '사상' 운운하는 댓글을 발견하고선 꽤나 충격을 받았다. 꼬꼬마 기자시절이던 2005년 가을, 당시 한국 최대 팬클럽을 보유했던 한류 그룹 관련 기사에 '하성태 개XX'라 달린 짧고 굵은 욕설을 본 이후 악성 댓글엔 면역이 됐다고 생각해 왔었는데도 그랬다.

일상적이라 여겼던 기사에 뜬금없이 '테러'나 '사상'을 들먹인 댓글을 마주하며 '이런 댓글도 혹시?'라며 소름이 돋았던 건, 다 '국정원' 때문이었다. 하필 그날은, 국정원 여직원이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서 민주당과 경찰, 언론이 한데 뒤엉키는 '장관(?)'을 연출하는 사이 '셀프감금'을 시도한, 역사에 길이 남을 대선정국의 복판이었다.

복기해보자. 아마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한 당시 박근혜 후보가 3차 토론에서 "여직원의 인권침해가 먼저"라고 호통쳤던 그 현장을. 그 아수라장 속에서 끝끝내 문을 열지 않던 국정원 직원의 당당함을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생생히 목도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당시엔, 국가 주요 정보기관인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댓글'을 달고 있었을 장면을 상상하며 밀려오던 폭소가 허탈함보단 먼저였다. 곧이어 그 '공작'을 말단 직원이 펼치기까지 내려왔을 지시체계를 거슬러 유추하며 허탈함의 감정은 한층 거세졌다.

대선 때마다 밀려왔던 '북풍'이 먹히지 않을 것을 대비해, 그 대단하고 엄중한 '댓글 공작'을 펼쳐왔을 국정원의 꼼꼼함과 이를 실행하기까지의 (그 정치적 배후는 뻔했지만) 몸통이 누구인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십알단(십자군알바단)'을 비롯해 인터넷 민의를 혼탁하게 만들던 주범 중 하나가 '국정원'일지 모른다는 경악할만한, 그러나 '합리적 의심'을 품게 됐다. 이후 민의를 대변할 것 같던 '넷심'은 더더욱 혼탁해져 갔다. 아니나 다를까, 해를 넘기며 '일베'가 조명을 받았다.

국정원, '공작'의 성과에 자축하고 있나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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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한동안 정치색이 담긴 글을 쓰기 꺼려졌던 건, 비단 선거 패배 후의 '대선 멘붕' 때문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연이은 '자살 정국'이 찾아 왔을 때, 대선 이틀 후 연탄을 피워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 선배의 장례식에서 받았던 충격 때문만도 아니었다.

돌아보면, 정확히는 어떤 '면역'에 대한 예감이지 않았을까 싶다. 2008년 촛불에도 변한 게 없이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느끼는 '면역'의 감정. 대통령 선거에 국가 정보 기관이 '치졸한' 그러나 소름 끼치는 방법으로 불법 개입했다는 정확이 포착됐지만, 해가 바뀌(고 대통령이 취임하면)면 아마도 단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자포자기의 체념. 대선 표심에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한 조직 사건에도, "댓글의 흔적은 없었다"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경찰 당국의 뻔뻔함.

이 뻔뻔함이야말로 사건의 주체인 국정원과 이를 묵인하는 여당, 그리고 대통령이 지닌 '멘탈'의 요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뻔뻔함은 무척이나 그리고 여전히 힘이 셌다. 지난 4월, 경찰 수사 은폐, 축소 의혹에 대해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이 용기를 내어 "윗선의 지시"를 양심 고백한 '내부고발'은 말 그대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역사가 대개 승자의 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 국정원과 같은 국가 조직인 검찰의 수사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이, 위기에 처한 국정원은 'NNL' 카드를 들고 나왔다. 대통령은 국정원 "셀프 개혁"이란 어이없는 처방을 내렸으며, 여당은 갖가지 꼼수를 이유로 국정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그리고 (국면 전환용이라 의심을 받을 만한) 검찰의 '전두환 비자금 수사'가 전격 실시됐다. 그 결과, 대통령의 지지율은 60%를 육박하며 고공 비행 중이다. 결과적으로, '댓글 공작'을 덮기 위해, 'NLL 논란'의 불씨를 당기며 제 한 몸 불사른 국정원은 이 모든 공작들이 '성공'했다고 자평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헐, 댓글들이 국정원을 생각나게 하네"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고 있다.
▲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2차 대규모 촛불집회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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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문제는, 국정원이 판을 짰을 시기, '댓글 공작'의 결과로 설정했을 최종 목표가 먹혀 들어가고 있는 2013년의 시대 분위기일 것이다. MB정부가 공을 들여 장악하고 봉쇄해온 지상파 방송 다음의 2차 목표가 이 인터넷 여론이었을 터. 최근 국정원 댓글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작전 세력'이 제거됐더라도, 이러한 충격파의 잔향은 잔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헐. 댓글들이 국정원 생각나게 하네.ㅋ"
"요즘 일베에서 좌표 따주면 좌표대로 들어가서 댓글 점령한다는데 사실인가 보군."

얼마 전 종편 방송과 관련해 기고했던 기사에 달린 포털 댓글들 중 일부다. '국정원 댓글'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됐지만, 입에 담지 못할 수준인 댓글의 표현들은 그 세기를 더해 가고 심지어 익숙해지고 있다. 그렇게 자극적인 것은 부딪칠수록 단련되는 법이다.

예컨대, "국정원도 이 만큼 했는데 뭘"과 같은 정서. 이러한 '국정원 공작'의 심각한 폐혜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일베'라는 인터넷 세상의 얼룩과도 같은 극우 사이트의 대두다. '국정원'의 훌륭한 공작의 결과는 '일베' 회원들이 퍼트리는 악성 글들의 알리바이가 돼버렸다.

그렇게 태생부터 익명성을 기반으로 했던 인터넷 여론이 한층 더 심각하게 오염되는 사이, 국민들이 분노를 표출할 공간은 점점 협소해지는 중이다. 그리고 'NLL' 떡밥을 덥썩 물은 여당이 조연으로 나서고, 무능한 민주당이 여기에 끌려가는 형국이다.

국정원이 의도적으로 터트린 'NLL 논란'이 '국정원 불법 선거 개입'이란 사건의 본질을 집어 삼키고 있는 가운데, MB 정권이 길들인 후 '기계적 균형'에 사로 잡힌 TV 뉴스와 보도 프로그램이 '사실'을 중계하거나 자극적인 이슈에 매달리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 국민들의 분노가 영글어 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셀프 개혁' 발언에 다시금 분노하는 이유

중·고등학생들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앞에서 '제헌절에 헌법정신 위배한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717 청소년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과 철저한 국정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중고생 시국선언 "배운 것과 다른 현실에 분노한다" 중·고등학생들이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앞에서 '제헌절에 헌법정신 위배한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717 청소년 시국선언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과 철저한 국정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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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대통령의 국정원 '셀프 개혁' 발언을 마주하며 작년 겨울의 그 체념과 허탈함의 감정이 진짜 분노로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선거 조작임이 명백하나 그 증거를 안/못 잡고 있는 국정원을 향해 짐짓 준엄한 척 "스스로 개혁하라"는 대통령에게는 누가 면죄부를 주었나. 국정원의 저 '댓글 공작'의 최대 수혜자가 여직원의 인권을 그토록 걱정하던 박근혜 대통령 아니었던가.

결국 '매트릭스' 속 세상마냥 예정된 수순으로 흘러가는 정국 앞에서,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쓰디 쓴 교훈을 곱씹는 슬픔쯤은 감수해야 할 듯 싶다. 인터넷 여론의 분열을 조장해 혁혁한 공을 올린 국정원을 수술하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 그것도 대통령 선거에 불법으로 개입한 국가 정보 기관을 해체시키는 길이 "다시 광장으로"뿐 이라면 말이다.

이를 입증하듯, 7월 들어 매 주말, 수천 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다시금 광장으로 나가고 있다. 일찌감치, 대학 총학생회와 교수 사회, 시민 단체들이 앞장선 시국선언도 계속되고 있다.

급기야 고등학생들이 "반장선거보다 못한 대선"이었다며 시국선언을 하는 비극적 상황에도 침묵하는 주류 언론과 꿈쩍도 않는 이들을 추동 하는 방법이 '광장' 뿐이라면, 다시금 촛불을 드는 수밖에. 국가 기관이 적으로 돌아 설 때, 언로가 막혔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SNS란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는 길 뿐이라는 것을 중동의 시민들이 보여줬듯이 말이다.

잠시, 2008년과 2013년의 촛불이 왜 다른지에 대한 분석들은 잊어도 좋을 것 같다. 극우와 우파, 그리고 중도 사이에서 생물처럼 균형을 맞춰가는 현 한국사회의 균형추를 다시금 되돌리는 건 어쩌면 역사적 사명일 터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다시금 '분노'일 터다. 2000년대 이후 반복되는 '촛불'이 동어반복과 데자뷔처럼 다가올지라도, 그 현재적 의미만큼은 분명 다르다는 걸, 그리고 그 물리적 힘의 가능성 또한 2008년을 통과하며 우리도 알고, 저들도 알고 있으니. 곧 끝날 여름 장마 이후 더욱 환히 밝혀질 촛불을 함께 들어야겠다. 면역에서 비롯된 허탈함과 체념, 무력감을 뒤로 한 채로, 더욱 거세지는 분노를 머금은 채로. 


태그:#국정원, #국정원불법선거개입, #NLL논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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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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