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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는 2008년 5월 9일 발병한 희소난치병, 데빅씨병, 좀 더 폭넓게 알려진 이름으로는 '다발성경화증'으로 목 아래가 마비되어 투병 중입니다. 평지도 드물고 대개는 내리막인 난치병의 코스. 제 아내도 예외 없이 가정도 무너진 채로 각종 합병증과 마비된 장기들을 안고 병상투병 6년째입니다. 모든 비슷한 분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투병을 응원하면서 이 글들을 올립니다. - 기자 말

"아들아, 아무래도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
"아빠가 일을 놓으면 당장 수입도 끊어지고, 그럼 아빠 오고 갈 차 기름 값도 조달이 안 되는데 갑자기 엄마 응급실이라도 갈 일 생기면 어떻게 가냐."
"…알았어요."

이건 설명도 아니고 선택이 가능한 부탁도 아니었다. 어쩌면 협박에 가까운 올가미, 족쇄였다. 달리 거절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대화.

'사람은 가족이나 연인의 기쁨을 같이 나누듯, 불행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아마 나도 누군가를 묶고 있겠지?'

2008년 년말에 강원도 동해 깊은 산속 기도원에 아내를 데려놓고 나는 충주와 강원도를 오고 가며 일했다. 큰아이가 엄마를 잠시 돌보다가 군대 입대를 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겨울방학중인 초등학교 5학년짜리 막내딸에게 엄마 돌보는 일을 넘겼다. 방학에도 나가던 양궁 훈련은 그만두었다.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긴 기도원 집회를 하루 두 번씩 참석하며 막내딸은 잘도 견뎌주었다.

그러다 해가 바뀌어 방학도 끝나고 막내딸이 충주 학교로 돌아가면서 다시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월요일에 충주로 가면 한 주간 일하고, 금요일 밤이면 차 트렁크에서 옷을 꺼내 주차장에서 갈아입고 작업복을 대신 그 트렁크에 넣고 세 시간을 달려 대관령을 넘어왔다. 몇 달을 그렇게 계속.

엄마 곁을 지키던 둘째아들... "미칠 것 같아요"

'미칠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도 어이없는 짐을 다 나누어 진 둘째아들, 두 번이나 대입 준비를 하다가 제동이 걸린 후 알바를 전전하다 군대를 자원입대했다. 훈련을 마친 후 임관복을 입고 엄마를 찾아와 미안한 엄마의 마음을 달래주던 아들. 현재도 군복무 중이다.
▲ 골방에서 신음했던 청춘, 둘째 아들 '미칠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도 어이없는 짐을 다 나누어 진 둘째아들, 두 번이나 대입 준비를 하다가 제동이 걸린 후 알바를 전전하다 군대를 자원입대했다. 훈련을 마친 후 임관복을 입고 엄마를 찾아와 미안한 엄마의 마음을 달래주던 아들. 현재도 군복무 중이다.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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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아이는 전에도 나와 교대로 응급실, 입원실에서 엄마 병수발을 하며 병원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 손을 떼고 독립을 했다.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피아노도 배우러 다니고 대학입시 준비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다시 예전보다 더 힘든 엄마 병수발을 위해 호출을 받은 것이다. 강릉으로 와서 버스를 갈아타고 기도원까지 온 아들은 무거운 얼굴이었다.

'그 속인들 편할 리가 없지….'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나도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엄마 곁을 지키던 아이는 하루 종일을 작은 방에 갇혀 엄마를 돌보는 게 너무 갑갑했는지 무거운 얼굴로 엄마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미칠 것 같아요…."

마침 설 휴가를 맞은 김에 내가 아내 곁에 있고 아이에게 며칠 바깥 나들이를 할 기회를 주었다. 내가 지키는 동안 부산으로 친구도 만나고 여행 삼아 다니겠단다.

그런데 설 연휴가 끝나기 전 일이 벌어졌다. 그런 대로 부축을 받으면 거동이 가능하던 아내가 하룻밤 사이에 심한 두통을 느끼고 구토를 하면서 완전 사지마비에 빠져 버렸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손가락 발가락 하나도 까딱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침대에 누운 채로 대소변을 받아야만 하게 되었다. 목을 가누지도 못해 밥을 먹일 때도 이불 서너 채를 등과 벽 사이에 넣고, 양쪽 겨드랑이에 베개를 끼워 지탱시키곤 간신히 몇 숟가락 먹였다.

미안함을 무릅쓰고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결론은 '네가 바로 돌아와서 다시 엄마를 좀 보살펴 달라'는 것. 부산에서 밤차를 타고 와서 새벽에 동해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아이는 2월의 강추위에 새파랗게 떨고 있었다. 한참을 대합실에서 기다렸는데 불도 없더란다. 아이를 기도원 엄마 옆에 데려놓고 대소변 받고 기저귀를 바꾸는 방법과 밥 먹이는 요령도 인수인계하고 난 직장인 충주로 또 달려갔다. 몰려오는 피곤과 복받치는 서러움들을 꾹꾹 누르며.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지만 둘째아이 때문에...

어릴 때 큰아들과 둘째아이는 23개월 차이라 동시에 자랐다. 같이 놀기도 많이 하고 같이 티격태격 싸우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늘 목 하나만큼 큰 첫째아이는 둘째아이의 상대가 아니었다. 말로나 힘으로나 혹은 여러 가지 복수의 방법으로도, 그래서 자주 둘째아이는 소리 지르고 악을 쓰며 우는 걸로 대항했다. 신기하게 그 와중에도 주먹질을 하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부모가 끼어들거나 편들지 않아야 한다'는 폼나는 조언을 듣고 나는 권투 글러브를 두 켤레 사서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리곤 다투기만 하면 한 방에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권투 글러브를 끼고 실컷 싸우며 감정을 풀라고…. 하지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서 나는 참 미안해졌다. 그게 동생의 억울함을 푸는 방법도 아니었고 사랑하는 마음도 아니었음을 깊이 후회했다.

둘째아이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에서 빈둥거린다고 느낄 때 또 그랬다. 머리 기르고 베이스만 치면서 6개월 정도 지내는 꼴을 못 봐주고 짜증을 냈다. 그게 미안해서 둘째아들에게 잘 해줘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살면서 자주 경험하듯, 이번에는 마음을 바꾸자 형편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사람들은 반복한다. 형편이 될 때는 마음이 없다가, 정작 마음이 있을 때는 형편이 안 되는 아쉬움을 당해보고도…. 돈이라도 좀 여유가 있다면 좋은 병원에 입원시켜 유급간병인을 두고 아이를 풀어줄 텐데….'

무력감에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영동고속도로는 핸들을 한 바퀴만 돌리면 모든 고통을 끝내 버릴 만한 위치가 여러 곳에 있었다. 그러나 끝내 둘째아이가 영상처럼 눈앞에 나타나 핸들을 돌리지 못하게 잡았다.

스무 살의 남자가 그 황금 같은 시기를 두 번, 세 번이나 포기하고 미루며, 작은 골방에 갇혀 산송장이 되어 버린 엄마의 대소변을 치우고 밥을 먹이며 버티는데, 남편이자 아빠인 내가 무책임하게 떠나버리면 그 아이는 무슨 심정으로 그 뒷일을 감당할까? 아무리 떨치려 해도 나보다 더 억울할 둘째아이가 떠올라 그럴 수 없었다. '그래 조금만 더 버티자, 오늘은 아니다' 하며….

베르디의 아내도 혹 긴 병을 앓았던 것일까

터지거나 질식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은 낮선 곳의 요양생활 중 지나갔던 길,
정동진에서 옥계까지 가는 바닷가 도로를 남들은 낚시나 관광하는데 나는 장을 봐서 오다가 차를 세우고 울고 왔었다. 소리는 파도에 묻히고 마음은 절벽에 막히고...
▲ 눈물 쏟은 옥계 바닷가 터지거나 질식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은 낮선 곳의 요양생활 중 지나갔던 길, 정동진에서 옥계까지 가는 바닷가 도로를 남들은 낚시나 관광하는데 나는 장을 봐서 오다가 차를 세우고 울고 왔었다. 소리는 파도에 묻히고 마음은 절벽에 막히고...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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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에서 열흘 남짓 더 지난 어느 날, 둘째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뭐가 먹고 싶으냐고. 금요일에 갈 때 사다주마 그랬더니, 아무것도 없고 조심해서 잘 다녀오란다.

"고맙다 아들아, 이렇게 많은 짐을 네게 줄지는 몰랐구나. 예전에는 경험이 부족해서 잘해주지 못하는 부모였고, 이제는 알 만하니 형편이 안 되는구나. 반성하며 사랑만 주고 싶었는데…."

변이 막혀 버린 아내에게 먹일 오렌지를 사러 강릉 농수산물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바닷가로 잡았다. 가파른 언덕과 내리막길을 돌고 돌면서 천천히 달렸다. 얼마 멀지도 않은 거리가 마치 깊은 강원도 길을 닮았다. 이 길의 이름이 '헌화로'란다. 정동진에서 옥계로 가는 해안도로 초입 부분.

좀 지나서 깊은 골짜기에 어울리는 작은 어촌이 나온다. 이름조차 '심곡'마을, 한쪽은 절벽과 같은 육지, 한쪽은 푸르다 못해 짙은 바다가 비장함을 풍기는 풍경, 겨울바다의 파도가 낮은 해안도로의 아스팔트로 물을 튕기는 곳도 있고, 드문드문 사람들이 차를 세우고 낚시를 하는지 구경을 하는지 눈에 띈다.

아까부터 반복되는 차 오디오의 합창이 점점 귀를 지나 가슴으로 파고든다. 소리도 보이지 않는 바늘이 되고 몸을 찌르고 들어온다는 몰랐던 사실을 체험한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석양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고 바빌론 강둑을 걷는 지친 노동자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들이 부르는 낮고 떨리는 목소리, 울음 가득 담겼지만 결코 촐싹거리지 않는 묵은 슬픔…. 400년 긴 포로생활과 노역에 지친 민족, 언젠가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과 메시지를 자손에게 대를 물리면서 새기고 새기며 살아온 사람들.

내 마음아. 황금의 날개로/ 언덕 위에 날아가 앉아라/ 훈훈하고 다정한 바람과/ 향기로운 나의 옛 고향/ 요단강의 푸르른 언덕과/ 시온성이 우리를 반겨주네
오 빼앗긴 위대한 내 조국/ 오 가슴속에 사무치네/ 운명의 천사의 하프소리/ 지금은 어찌하여 잠잠한가
새로워라 그 옛날의 추억/ 지나간 옛 일을 말해주오/ 흘러간 운명을 되새기며/ 고통과 슬픔을 물리칠 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굳건한 용기를 주리라

얼마나 그립고 사무쳤을까? 온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푸른 언덕에서 신께 경배하며 찬양하고 함께 음식을 먹던 시절이! 또 얼마나 고대하고 손꼽아 기다릴까? 고통과 슬픔이 물러가고 새 기쁨과 노래가 시작될 그 어느 날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해안도로의 난간이 없다면 바다 위를 가로질러 무한히 가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며 듣고 또 들었다. 베르디는 무슨 고난과 슬픔을 지독히 겪었기에 <나부코>라는 오페라 속에 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같은 묵직한 합창을 담을 수 있었을까? 지독히 가슴 저리는 긴 여운의 노래를 말이다. 혹 그의 아내도 긴 병을 앓았던 것일까?

"고통과 슬픔을 물리칠 때 굳건한 용기를 주리라"

돌아오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산속 기도요양원의 정문을 통과했다. 아내를 수시로 휠체어에 태우고 둘째아들과 나왔던 자리. 절벽에 막힌 듯, 더 나가지 못하고 양지 쪽 햇살에 서성거리며 애꿎은 앞산에 소리를 지르곤 하던 자리. "나 돌아갈래! 나 돌아갈래!" 그러면 어김없이 돌아오던 더 짓궂은 메아리, "니 돌아가라! 니 돌아가라!".

차를 숙소 앞에 세우고, 오렌지 한 박스를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이걸 다 먹으면 장운동이 좀 나아지려나' 물건에도 기도하는 습관이 생긴 지 한참된 내가 우습다, 피식 웃으며. 그러나 나를 반기는 건 건강한 아내가 아니고, 내가 아무리 싫어도 신발도 신을 수 없고, 당연히 도망도 못 가고, 뒤돌아 눕지도 못한 채 천장만 보고 누운 사지마비의 아내.

그런데 밤이 되어서 호흡이 자꾸 거칠어지더니 결국은 위험해서 구급차를 불렀다. 이대로는 오늘 밤도 넘길 수 없을 만큼 힘들어 보인다. 밤길을 긴급으로 달려서 가는 곳은 강릉 아산병원 응급실. 구급차 안에서 틀지도 않은 노랫소리가 자꾸 귀에 들려온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흘러간 운명을 되새기며/ 고통과 슬픔을 물리칠 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굳건한 용기를 주리라

나중에야 알았다. 강릉아산병원 응급실에서 서울로 가라고 퇴짜를 맞고, 다시 기도원으로 돌아와 그냥 죽자고 버틴 사흘 동안, 그것이 4번째인지 5번째인지 헷갈리는 재발이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폐 신경을 마비시켜 나중에 한쪽 폐가 기능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2009년 2월에서 5월 사이에 강원도에서 머무를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태그:#희귀난치병, #투병,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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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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