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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20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정보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시민사회 시국회의' 주최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및 진상규명 촉구 3차 범국민대회'에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참여하고 있다.
▲ 서울광장 수놓은 수만개 촛불 13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20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정보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시민사회 시국회의' 주최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및 진상규명 촉구 3차 범국민대회'에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참여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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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중순 포도밭 일이 한창 바빠질 무렵,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큰딸이 방학 하자마자 내려오기로 했었다. 단 하루, 단 한 명의 일손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아빠, 오늘 못가고 내일 첫 차로 내려갈게요."
"무슨 일인데?"
"오늘 저녁 국정원 규탄 집회에 참석하려구요."

큰 딸은 결국 다음날 오후경 시골집에 내려왔다. 일손 돕기에 차질(?)을 빚었지만, 농사일이 먼저라고 말릴 수도 없는 대한민국의 망가진 자화상, 국정원의 대선개입으로 민주주의가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외면 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농사짓는 것도 촛불 드는 일?

귀농 첫 해인 2007년 겨울, 당시 야당이었던 이명박 후보는 무려 500만 표차 이상으로 거뜬하게 정권을 접수했다. 캄캄한 시골의 한 구석에서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선거 결과, 다음 해 터진 광우병 위험 미 쇠고기 수입으로 전국이 촛불로 달아오를 때 한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촛불을 들어야 할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어떡하나?"
"하하. 열심히 농사짓는 것도 촛불 드는 일이 아닐까요."

포도밭에서 아내와 큰 딸, 잠시 집안 일 도우려 귀가한 둘째 딸이 알솎기에 열중하고 있다.
▲ 포도밭 세모녀 포도밭에서 아내와 큰 딸, 잠시 집안 일 도우려 귀가한 둘째 딸이 알솎기에 열중하고 있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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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로운 답변 뒤엔 낯선 시골에 대한 경이로움과 적응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초보농부의 여유가 있었고, 또 한편으로 '지난 정부 10년 동안 쌓아 놓은 민주주의가 그렇게 쉽사리 무너지겠어'라는 생각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 후 5년, 도시의 찌든 때를 벗어가며 조금씩 농부가 돼가면서 접했던 세상의 소식들은 한마디로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 나라가 망가지는구나" 라는 한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작년 겨울 MB 뒤를 이은 박근혜 후보의 청와대 입성을 통한의 심정으로 바라봐야 했다.

'정권교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했던가? 세상은 어찌되든 나 혼자 산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게 과연 잘 사는 길인가? 은둔도 저항? 조용히 은둔하면 누가 좋아하는가?' 등등의 생각이 밀려왔다.

올해 내 나이 53세, 1961년 군인 박정희가 총칼로 쿠데타를 일으킨 해 태어나 '말죽거리잔혹사' 같은 10대를 박정희 시대와 함께 보내고, 스무살 시작을 전두환의 살기와 맞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30,40대를 도시에서 전전하다 새로운 삶을 찾아 귀농을 선택했다.

어슴푸레 새벽하늘이 눈을 뜰 무렵,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밭으로 향한다. 포도 농사 일 년 중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는 가장 바쁜 날들의 연속이다.그러나 하루 종일 포도만 바라보며 단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세상은 온통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NLL 포기, 정상회담 내용 공개로 도배되고 있었다. 고되지만 단순한 노동 뒤에 만나는 세상은 농부의 얼굴에 절망과 분노를 심어주고 있었다.

포도밭에서 아내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내의 피곤한 표정은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고된 지 알게 해준다.
▲ 포도밭 휴식 포도밭에서 아내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내의 피곤한 표정은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고된 지 알게 해준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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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의 선택에 관심과 격려를 보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귀농자를 통해 시골의 낭만과 은둔의 삶에 대한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간혹 정치와 시국에 대한 관심과 생각을 표출하면 이런 반응들이 나온다.
"귀농까지 했으면서 뭘 이런 데까지 신경 쓰나?"
"아직도 마음을 다 비우지 못한 거 아냐"

이명박 5년, 경제는 신음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는 걸레조각이 되고 말았다. 민족의 숙원인 평화통일은 물 건너가고 보수를 가장한 냉전수구세력들은 그들만의 공간을 확보했다. 뒤를 이은 박근혜 정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니 떠들었지만 내각조차 꾸리기 힘겨울 정도로 준비부족에 능력부족을 드러냈다. 겨우 이명박이 만들어 놓은 종편과 공영방송의 편파방송에 힘입어 국민의 눈과 귀만 닫아 놓은 상태다.

깨어있는 시민들은 다양한 SNS를 통해 게릴라처럼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왜곡된 소식만 접하고 있다. 비를 맞으며 시민 수만 명이 촛불을 들고 외쳐도 보수 언론들은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는 현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과연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수천 년 역사를 통해 권력자들은 국민들이 깨어나기를 두려워한다는 진실은 바뀌지 않았다. 최초로 중국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배운 자들이 따진다고 학교와 책, 심지어 유생까지 땅에 묻는 참극을 저질렀지만 그 역사는 수십 년도 넘기지 못했다. 세월이 지났지만 지식과 정보를 알까 두려워하고, 사건의 본질을 알까 두려워하는 지배계층의 모습은 똑같다. 국민들은 그저 먹고 사는 일에만 열중하고, 놀이와 여가로 시간을 보내고 정치와 사회현상에 대해선 무관심해지길 지배계층은 여전히 바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명박 정부보다 더 형편없는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박근혜 정부, 출범 5개월도 못돼 터진 윤창중 대변인의 미국 성추행 사건,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남북정상회담 공개로 대한민국의 국격은 일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헤매고 있다. 최고의 국가정보기관이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건, 결국 지난 대선은 불법부정선거였음이 드러난 게 아닌가. 국가정보기관의 도움이 당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박근혜 후보가 불법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는 건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도 국민들 앞에 사과는커녕 비겁한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국정원 자체가 개혁해야"라는 말 정도다. 생각있는 국민들은 절망과 분노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인데 말이다.

귀농이 아니라 이민 가고 싶은 심정

초등 3년인 막내딸 성결이가 감자를 함께 캐고 있다. 이 시골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줘야 함은 우리들의 책무이다.
▲ 감자밭 초등 3년인 막내딸 성결이가 감자를 함께 캐고 있다. 이 시골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줘야 함은 우리들의 책무이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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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온 국민이 규탄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임에도 보수 쪽은 오히려 종북 타령이나 하며 가래 끓는 소리를 내고 있다. 다행히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지만, 주요 언론들은  이 내용을 축소·은폐하기에 급급하다. 정상회담 내용을 슬쩍 조작하면서 고의적 흠집내기나 저지르는 국정원과 같은 한글을 놓고도 끝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고 우기는 새누리당을 보면서 오만가지 정이 떨어져 귀농이 아니라 이민이 가고 싶은 심정이다.

귀농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큰딸은 이제 성인이 되어 시위현장에서 역사의 가파른 물결을 체험하고 있다. 대를 이어 거리에 나서야 하는 대한민국의 씁쓸한 현실, 여유롭게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조리고 흙냄새와 더불어 소박하게 살고자 했던 귀농의 초심은 어지럽기만 하다.

내재화된 현실에 대한 분노는 꿈틀거리고, 행동하지 못하는 지식은 박물관의 먼지와 다를 바 없다는 자책감, 그리고 이번에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단죄하지 못하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수십 년 후퇴하고 자식들에게 못난 나라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진실 앞에 귀농한 농부의 심사는 매우 불편스럽다.

이번 국정원 사태가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닌 만큼 집권여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타기하면서 유야무야시키려 하지만, 야당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보여줬던 저항의 결기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또 다시 먹고 살기에도 힘겨운 국민들의 함성과 투쟁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아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명운이 위태로운 지금 이 시간,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말이 절절하게 와 닿는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덧붙이는 글 | 농부가 맘 편히 농사를 짓고, 국민들 모두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려면 나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희생만큼 얻어지기에 분노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태그:#포도밭, #국정원,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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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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