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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수용을 하십시다. 야당에 신뢰를 주고 약속한 바대로 야당이 법을 수정한다고 하니까, 그걸 믿읍시다. 신뢰를 보내고 또 거기에 화답하고, 그런 것을 국민이 볼 수 있게 합시다. 도박 같은 결단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뢰를 위한 정치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겨레21> 2003.03.20 '영남을 향한 뜨거운 프러포즈' 기사 중

6.15 정상회담 전후로 4억 달러 대북지원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의 폭로는 2002년 9월부터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공세의 고삐를 잡은 한나라당은 연일 특검제 도입을 요구했고, 고건 총리 내정자에 대한 인준 거부 카드까지 꺼내들고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했다.

당시 특검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통치행위'라며 특검제 도입에 강하게 반발했고, 개혁진영 원로그룹이나 여당인 민주당과 국무회의에서도 특검제 도입은 남북관계의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며 대통령의 거부권을 주문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신뢰의 정치를 내세우며 특검제 요구를 전격 수용했다. 이같은 결단에 정치 공세를 이어오던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전격 수용을 발표할 줄 몰랐다"라며 황당하다는 반응과 환호성을 동시에 내놓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송금 특검 수용, 결과는?

대북송금 특검의 결과는 초라했다. 현대가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에 송금한 4억5천 달러 중 3억5천 달러는 현대아산이 금강산 등 포괄적 경제협력사업권을 얻는 대가이며, 1억 달러만 정책적 차원의 대북 지원금 성격이라는 게 특별검사팀의 설명이었다. 박지원 의원이 구속되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3년 후 대북송금 혐의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이후 남북관계는 한동안 단절되었고, 노무현 대통령이 의도했던 신뢰의 정치도 실현되지 못했다. 오히려 보수 세력은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거래 의혹까지 제기하며  6.15 정상회담이 잘못된 외교라는 공세를 이어갔다. 특검으로 끝날 줄 알았던 진실 공방은 계속됐고,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에서 얻은 '차 떼기' 오명에서 벗어나 또다시 보수 세력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차라리 특검제 요구를 거부하고 노무현· 김정일 정상회담을 2~3년 앞당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정계은퇴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2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돼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자료제출 요구안이 통과되자 착잡한 듯 생각에 잠겨 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정계은퇴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2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 대통령기록물로 지정돼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자료제출 요구안이 통과되자 착잡한 듯 생각에 잠겨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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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10.4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할 것을 제의합니다. (중략) 또한 남북관계 발전의 빛나는 금자탑인 10.4 남북 정상회담 선언의 성과를 이렇게 무너뜨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고, 노무현 대통령의 명예를 지켜야 합니다. 정상회담 대화록과 녹음테이프 등 녹취자료 뿐 아니라 NLL에 관한 준비회의 회의록 등 회담 전의 준비 자료와 회담 이후의 각종 보고 자료까지 함께 공개한다면 진실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NLL 포기 발언이 사실이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문재인 의원의 발언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제출 요구안의 국회 통과를 이끌어냈다. 재석의원 276명 257명의 찬성. 반대 17명, 기권 2명.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이뤄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제출 요구안 국회통과로 남북정상의 4시간 대화뿐 만 아니라 준비과정과 사후 처리 자료가 낱낱이 공개될 법적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과 관련, 국회에 제출될 국가기록원 기록물은 256만건에 이른다고 한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관련 국가기록물 제출 요구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기록관리단체협의회에서는 '21세기 무오사화'라고 비판했고, 경실련 설문조사 결과 한국정치학회와 한국행정학회 소속 학자 71명 가운데 91%가 국회 결정에 대해 부적절하다고 응답했다.

문재인 의원이 제안하고 국회가 의결해 통과시킨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제출 요구안이 우려스러운 것은 국가기록관리 측면만은 아니다. 문재인 의원은 10.4 남북 정상회담 선언의 성과를 이렇게 무너뜨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음이 기록물 공개 제안의 배경이라고 밝혔지만 회의록 전체 공개로 10.4선언의 성과의 폄훼가 중단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가 과연 회복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NLL 포기 발언은 새누리당과 국정원이 이미 오래 전부터 상황을 반전시킬 히든카드로 준비한 내용이다. 그들이 필요했던 것은 NLL 포기 발언의 진실이 아니다. 국정원은 '나'를 '저'로, '김정일 위원장'을 김정일 위원장님으로 고쳐가면서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비굴한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했다. 대통령기록물 256만건 전부가 공개된다고 한들,  NLL 포기 발언을 확인하지 못한다고 한들 그들에게 과연 진심어린 사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국정원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온 회의록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을 분명했다. NLL 포기 발언은 새누리당과 국정원에 의해 왜곡된 것이며, 오히려 노 대통령의 서해평화 구상은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여론이다. 구체적으로 '포기'라는 문구가 없으나 포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은 새누리당이나 보수 일각의 주장일 뿐이었고 국정원의 불법적인 정상회담 회의록 유출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의 판단이었다. 정치권을 제외한 누구도 국가기록원 원본과 대조해서 노무현 대통령의 결백을 증명해야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문재인과 민주당이 해야 할 일

문재인 의원과 민주당에 국민이 원하는 건 국가기록물을 불법으로 공개하고 왜곡해서 대선에서 국민들을 거수기로 전락시킨 세력과 맞서 싸우는 일이다. 정상회담 회의록 제출 요구안을 새누리당과 합의해 의결한 행위가 과연 노무현 대통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고 있다.
▲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2차 대규모 촛불집회 '국정원에 납치된 민주주의를 찾습니다 2차 촛불문화제'가 6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과 정치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규명을 위한시민사회단체 긴급 시국회의' 주최로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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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공동선언의 성과를 지키겠다는 주장도 그렇다. 남북정상들이 나눈 이야기를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공개하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기 어렵다.  앞으로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한들 남북정상회담에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10.4 공동선언의 성과를 지켜내고자 한다면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불법적 유출과 요약본의 악의적인 왜곡에 맞서 싸우는 일이 먼저다.  

문재인과 민주당은 역사와 국민들을 향한 배포 있는 믿음으로 함께 싸우기보다 자신들의 순결성을 내보임으로써 위기에 벗어나는 길을 택했다. 소탐대실의 행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앞으로 국가기록원 원본 공개를 둘러싸고 수많은 공방이 이어질 것이다. 새누리당이나 국정원은 이 틈을 활용해 국면을 전환하고 지난 과오에 대한 면죄부를 얻고자 할지 모른다.

촛불을 든 시민들의 분노는 기본권을 유린당한 민주주의 회복을 향한 절규다. 국정원을 개혁하고 불법적인 여론조작을 주도한 세력을 단죄하지 않고서는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는 위기의 발로이기도 하다. 문재인 의원과 민주당은 길거리에 나가 분노한 민심을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명예를 지키는 일과 10.4 선언의 성과를 이어가는 일은 국가권력이 정보기관 및 보수언론과 똘똘 뭉쳐 국정을 유린한 현실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태그:#국정원, #NLL,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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