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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피켓을 들고 교문 앞에 섰다.
▲ 6월 27일 아침 교문 앞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피켓을 들고 교문 앞에 섰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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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 앞 1인 시위 파장은 예상 밖으로 컸다. 지난 주 이틀간의 시위를 마치고 출근한 월요일, 여기저기서 나를 불러댔다. 자고나니 유명해져 있더라는 말이 실감났다. 그저 아이들과 학부모, 동료 교사들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려 했을 뿐인데, 지인들의 격려 전화와 함께 일면식도 없는 많은 분들이 이메일로 지지를 보내주셨다. 고맙고 뿌듯했다.

(첫 기사 : 교사 신분이지만 용기내 외쳤다... "이게 나라냐?")

소식을 처음 알린 이곳, <오마이뉴스> 덕이다. 다시 인터넷과 언론의 힘을 느꼈다. 기사를 본 후 용기를 얻었다고, 체념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고 고마워하는 '선한 이웃'을 많이 만났다. 어떤 분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현 정권 5년을 버틸 수 있는 영양분을 섭취했다"면서 "질긴 놈이 이긴다, 절대 지치지 말자"고 격려하기도 했다.

교사인 내가 왜 1인 시위를 했냐고?

이제 다시 시작이다. 다시 교문 앞에 서겠다는 게 아니다. 아이들에게, 이웃들에게 1인 시위를 감행한 까닭을 밝히며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낼 때다. 전화를 걸어 "교사가 할 짓이냐"며 버럭 화를 낸 학부모의 말마따나, 이건 교사로서 '할 짓'이기도 하다. 여느 때처럼 냄비 끓듯 확 달아올랐다가 이내 식어버리기에는 사안이 너무 엄중하다.

1인 시위 이후, 국정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해 여전히 낯설어하는 아이들은, 수업중에 왜 '민주주의가 죽었다'라고 적었는지, '이게 나라냐?'라는 선정적인 반문을 던진 이유가 뭔지 물었다. 국정원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태반인 현실에서, 피켓에 적은 문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메일로 처음 접한 몇몇 분들도 1인 시위를 한 직접적인 계기를 물으며, 아이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답글에서 되묻진 않았지만, 아마도 중학교 교사인 듯했다. 그는 전국 도심 곳곳에서 촛불이 켜지고, 일부 대안학교 학생들이 상경해 시국선언까지 하는 마당에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며, 내 사례를 들어 아이들과 얘기 나눠보고 싶다고 말했다.

1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앞에서 열린 '국정원의 헌법유린 규탄 시국법회'에서 참석자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108배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대한불교청년회, 불교환경연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 불교, 원불교 단체 회원들이 참석했다.
▲ 국정원 헌법유린 규탄 시국법회 1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앞에서 열린 '국정원의 헌법유린 규탄 시국법회'에서 참석자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108배를 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대한불교청년회, 불교환경연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 불교, 원불교 단체 회원들이 참석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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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또 이름 모를 몇몇 누리꾼에게 '왜?'라는 질문을 받았지만, 지금껏 '오로지 선거에 이길 수만 있다면 온갖 불법도 마다 않는 저들의 행태에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라는 경탄조의 짤막한 답변만 남겼을 뿐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훼손되는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눈 뜬 장님 아니냐'는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렇듯 비장한(?) 답변을 거두고, 이 글을 통해 아이들과 '왜?'라는 질문을 던진 모든 분들에게 명색이 '교사다운' 모습을 보여드리려 한다.

첫 번째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는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다. 백 보 양보해서 민간인 사찰 등 국정원의 일탈 행위는 과거의 유습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뿌리 깊은 관행으로 치부했고, 얼마 못 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릇된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고, 급기야 국민이 아닌 정권의 '충견'을 자임하며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중의 기본인 선거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국민의 눈높이에서 일하겠다'는 경찰은 국정원의 범죄 행위를 알고서도 묵인해, 국정원 못지않은 정권의 '충견'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러나 분노의 정점에는 언론이 있었다. 보수를 참칭하는 몇몇 언론이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돼버린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해 그들은 편파 보도와 의도적 사실 왜곡으로 여론을 비틀고 국민을 간보는 '찌라시'임을 드러냈다. 거칠게 말해서, 그들은 우리 사회의 '공기'가 아니라 '독소'다.

그들은 피아 진영을 확실히 구분지은 채, 현 정권과 범죄 집단과 다를 바 없는 국정원, 경찰을 비호하는 '기관지' 노릇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에게 언론 본연의 권력 비판을 기대하는 건 애초 무망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번 사건으로 현 정권과 국가기관, 그리고 자칭 보수 언론은 결국 '한통속'임을 국민들에게 또렷이 각인시켜주었다.

분노가 치밀어 참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 교사로서, 뼈아픈 역사로부터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한 퇴행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아이들에게 수십, 수백 시간의 대학입시 공부보다도 더 중요한 수업이라 여겼다. 반세기가 넘게 지났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전범 '아이히만의 변명'을 수긍하며 들어야하는 사회에 머무르고 있음이 비통할 따름이었다.

얼마 전 한 신문 기사의 내용이다. 검찰은 선거 개입 혐의가 확인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 김아무개 이른바 '국정원 여직원',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 외부 협력자 6명 등 모두를 기소 유예 처분한다고 밝혔다. 이유인즉슨 '원장의 지시에 따라 범행했고, 상명하복 관계의 조직 특성 등을 감안'했단다. 유일하게 믿었던 검찰조차 '한통속'이 되겠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그런가 하면 국정원의 선거 개입 증거 은폐와 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서울경찰청의 최현락 전 수사부장, 이병하 전 수사과장, 김아무개 전 수사2계장은 아예 처벌 계획조차 없다고 한다. 역시나 상명하복 관계가 엄격한 조직에서 상관인 경찰청장의 명령에 복종한 것을 두고 문제 삼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진한 중앙지검 2차장이 6월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정보원 관련 의혹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날 검찰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대통령 선거 운동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나머지 국정원 직원들은 기소유예한다고 발표했다.
▲ 검찰, 국정원 의혹 관련 수사 발표 이진한 중앙지검 2차장이 6월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정보원 관련 의혹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날 검찰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대통령 선거 운동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나머지 국정원 직원들은 기소유예한다고 발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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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상관인 히틀러의 지시를 받아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충성스런' 군인 아이히만에게도 죄를 물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15년간 도망 다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붙잡혀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후 전범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이렇게 외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나는 그저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입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그러한 호소에도 전범 재판부는 "책임이 크다"며 사형을 선고했지만, 우리는 검찰이 앞장서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되레 '아이히만들'을 두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역사적 판결에 대해 과연 검찰은 뭐라고 할까. 혹 '독일은 독일이고, 한국은 한국이다'며 눙칠 것인가.

물론,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의 죄가 훨씬 더 엄중하다는 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고 뻔히 범죄행위인 줄 알면서도 스스럼 없이 명령에 복종한 그들의 죄를 묻지 않는 건, 우리 사회 가치관의 혼돈을 가져온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백 날 떠들면 뭐 하겠나. 이러한 '현실적 깨달음' 하나가 아이들의 의식을 규정하고 지배한다.

적어도 '힘 있는 자에게 붙으면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세간의 처세술을, 아이들 앞에서 교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문제 삼고 싶었다. 아이히만의 이 역사적 판결을 두고,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과 함께 '생각 없음'이야말로 유대인 학살을 '충실하게' 자행한 근본적인 동력이라 짚었다. 역사가 마땅히 배워야할 진정 중요한 학문이라면, 뒤틀린 현실을 깨닫고 바로잡는 도구여야 한다. 한나 아렌트의 통렬한 지적을 모르는 척 넘겨서야 되겠는가.

세 번째는 지금껏 몰랐던 국정원의 규모와 예산에 경악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 뉴스의 배경 화면으로 등장하는 국정원 내곡동 사옥 건물을 보긴 했다.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 더 큰 걸 보고, 여태 다른 정부 부처와 함께 사용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국정원의 외형적 실체가 시나브로 드러났다.

소속된 직원이 만 명이 넘고, 1년 예산이 무려 1조 원에 육박한단다. 전국의 웬만한 도시마다 지부가 꾸려져 있고, 마치 지하조직처럼 운영되기 때문에 공무원이면서도 상무, 전무, 과장 등 명함에 일반 기업체의 직함이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누가 국정원 직원인지 알기 어렵고, 이따금 국정원 직원을 사칭하는 범죄 행위가 벌어지는 것도 이러한 비밀스런 운영 체계 탓이라고 한다.

국정원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총학생회 시국선언과 종교계, 시민사회단체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국정원 규탄 대학생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들이 국정원 대선 개입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와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촉구하고 있다.
▲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 국정원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총학생회 시국선언과 종교계, 시민사회단체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국정원 규탄 대학생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들이 국정원 대선 개입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와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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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끈 다시 동여 맵니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모두 합해 대략 4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니, 일개 정부기관인 국정원 직원 수가 얼마나 많은지 상상이 갈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더욱 음습한 이미지가 굳어져서인지, 그 많은 수가 '선글라스'를 낀 채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곳곳에 설치된 CCTV를 보는 것처럼 섬뜩하기도 하다.

직원 수보다 더 충격적인 건 예산 규모다. 올해 우리나라 전체 예산 규모가 342조 원이니, 국정원의 '지갑'이 얼마나 두꺼운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난 4월, 아동양육시설 급식비를 1420원에서 고작 100원 올린 것을 두고, 해도 너무한다는 여론이 비등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정부는 적은 예산 타령을 하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의 1조 원이라는 예산이 너무나 커보였고, 한편으로는 어이없게 느껴졌다.

근무하고 있는 학교를 돌아보니, 예산이 없어 엄두조차 못 내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1년 상담실 운영 예산이 불과 150만 원. 상담 자료를 구입하기는커녕 부러 찾아오는 아이들 주전부리 값도 안 되는 돈이다. 27개 학급 규모의 학교 도서관 1년 운영 예산도 채 300만 원이 안 된다. 추진 사업은 십수 가지가 넘는데, 저자 초청 강연 몇 번 열기도 솔직히 버겁다.

교내의 이런저런 사업은 차라리 사치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교실에 에어컨 가동하는 것조차 예산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교실이 찜통이 된지는 이미 오래인데, 정부의 에너지 절감 대책에 따라 더위와 싸우며 '자린고비'를 실천하느라 공부는 뒷전으로 밀렸다. 물론, 이는 한두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정원 예산이 그저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이상이 등굣길 아이들과, 학부모, 동료 교사들의 시선을 붙들고 호소하고 싶어 피켓을 들었던 이유다. 피켓보다 분필로, 생각보다 실천으로, 또 글을 통해 그들을 만나기 위해 신발끈을 다시 동여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태그:#1인 시위, #국정원의 선거 개입, #원세훈, #김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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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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