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도로에 늑대가 나타났다"고 보험회사들이 홍보하는 사이 외제차 운전자들은 실제 늑대가 됐다. '슬쩍 스치기만 해도 보험사에서 쏠쏠히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은 외제차 운전자들의 상식이 됐다. 외제차는 '도로의 갑(甲)'이 됐고 나머지 운전자들은 이들을 피해 다니는 을(乙)이 됐다."

최근 한 경제 일간지 논설위원의 글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을' 사례를 소개하며 수입차의 횡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수입차가 '도로의 갑'이 된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그때도 수입차는 '늑대'였다.

어쩌다 실수로 수입차 라이트를 하나라도 부쉈다면 50만 원∼60만 원은 물어줘야 했다고 한다. "국산차의 경우 한 개 5천 원 밖에 안 하는 테일 라이트가 50만 원, 3천∼4천 원 대 쇼바가 10만 원을 훨씬 넘었다"고 하며, "중고 택시가 벤츠 문짝이라도 건드리는 날이면 택시를 팔아도 수리비를 못 댈 게 뻔하다"고도 했다.

포니는 '달랑' 11만 원, 토요타 견적은 자그마치...

1995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 '잘 팔리는 외제차' 보도. 당시 보도를 보면 포드의 세이블 LS(438대), 벤츠 E200(198대), 크라이슬러의 비전 TSi(164대), 볼보 940GL(163대), 크라이슬러의 캐러밴 SE3.3L 순이었다고 한다
 1995년 7월 19일자 <경향신문> '잘 팔리는 외제차' 보도. 당시 보도를 보면 포드의 세이블 LS(438대), 벤츠 E200(198대), 크라이슬러의 비전 TSi(164대), 볼보 940GL(163대), 크라이슬러의 캐러밴 SE3.3L 순이었다고 한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관련사진보기


1979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 '갑'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더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고가도로에서 '토요타 로열살롱'을 추돌하고 도망갔던 시내버스 운전자가 잡혔는데, 사고로 인한 외제차 피해 견적이 국산차의 1백 배나 나왔다는 것.

경찰이 다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보도를 보면 당시 견적은 자그마치 1160만 원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피해차인 포니의 견적은 '달랑' 11만 원, 신형 포니 판매 가격과 비교해도 3∼4배가 됐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외제차 수입 개방 조치 이후 더욱 빈번하게 일어난다. 다음은 "고급 승용차는 서민차를 들이받아 아무리 큰 피해를 내도 수리비가 몇 푼 안 돼 벌이 약하다"며 1995년 한 독자가 신문에 억울함을 호소한 경우.

"친구가 트럭운전을 하다 외제차 볼보와 충돌, 경찰에서 쌍방 과실로 인정됐으나 차 문짝을 새로 해주는 바람에 3백50만원을 물어줬다. 이 사고로 상대 운전자는 벌점 처벌만 받았지만, 친구는 35일 간의 면허 정지까지 당했다."

'갑'의 비싼 수리비, '을' 보험료로 언제까지?

보험개발원의 수입차 및 국산차 가격대별 보험료 비교(2013년 3월 11일 기준)
 보험개발원의 수입차 및 국산차 가격대별 보험료 비교(2013년 3월 11일 기준)
ⓒ 보험개발원

관련사진보기


이와같은 수입차 수리비 '잔혹사'의 다음 과정은 이렇다. 비싼 '갑'의 수리비 덕분에 보험사 손해율은 상승한다. 보험료가 오른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불똥이 '을'에게도 튄다. 수입차 운전자만이 아니라 국산차 운전자 보험료도 인상된다. '갑'의 수리비, '을'이 메우는 격이다.

민병두 민주통합당 의원실에서 국내 5대 손해보험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1년 4월부터 작년 3월까지 수입차 사고 한 건당 지급한 평균 수리비는 261만8000원이었다. 국산차의 경우는 평균 84만6000원이었다. 수리비가 3배 정도 더 비싼 것이다.

그런데 보험개발원 자료를 보면 수입차 보험료 수준은 수리비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차량 가격 6260만 원인 BMW 520d의 보험료는 156만2000원. 에쿠스 VS380(차량 가격 : 6880만 원)의 경우는 99만5000원. 보험료 차이가 1.6배 밖에 나지 않는다.

차량 가격 4665만 원인 제네시스 BH330 모던스페셜에 비해 비슷한 가격대 수입차 평균 보험료 차이 역시 1.6배에 불과하다. 3천만 원 대 그랜저 HG330 노블의 경우는 보험료 차이가 '고작' 1.4배 수준이다. 수입차 수리비가 국산차의 경우보다 훨씬 비싼데도, 수입차 보험료는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을'의 부담만 더욱 커져간다. 1997년 8월, 종전 2천만 원, 3천만 원 두 종류였던 대물배상 가입한도에 5천만 원, 1억 원짜리가 추가된다. 2012년 'S손해보험사'의 자동차보험 계약 통계는 이렇다. 대물배상 1억 원 이상 가입자는 96%, 2억 원 이상 가입자도 전체 계약자의 절반이 넘는다.

두 기간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모두 비싼 외제차량 수리비 부담 가능성이 '을'에게 불리하게 작동했다는 것이다. 현재 업계에서는 이로 인해 연간 660억 원의 보험료가 수입차 때문에 낭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외제차 수리비 '잔혹사' 올해는 바뀔까

'달리는 궁전, 서울의 초호화차들'이란 제목으로 국내 고급 외제 승용차 실태를 전한 1979년 5월 9일자 <동아일보>
 '달리는 궁전, 서울의 초호화차들'이란 제목으로 국내 고급 외제 승용차 실태를 전한 1979년 5월 9일자 <동아일보>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관련사진보기


이렇듯 '늑대'가 통제되지 않으니, '양치기 소년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헐값으로 사들인 외제차를 이용해 교통사고를 조작하고 거액을 뜯어낸 조직 사기단이 적발됐다고 하더니, 최근에는 역시 고가 외제차를 이용해 보험 사기를 저지른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이 무더기로 경찰에 잡혔다고 한다. 전직 카레이서까지 가세한 보험 사기 사건 역시 최근 소식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도로의 잘못된 갑을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수입차 차량·부품 판매 가격을 조사하기 위해 현장 조사에 나섰으며, 손해보험협회도 수입차 수리비 횡포를 막기 위한 태스크 포스를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달에는 민병두 의원이 미국 인증자동차부품협회(CAPA) 인증 대체 부품을 도입해서 외제차 수리비를 낮추겠다는 복안을 담고 있는 '자동차 관리법 개정안(외제차 수리비 폭리 근절법)'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외제차 업계에서는 실효성이 없다며 반발하는 모양새다.

도로에 '늑대'가 나타난 지 어언 수십 년. 그 오랜 시간 동안 외제차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 했던 '을'의 '슬픈 잔혹사'가 올해는 달라질지 주목된다.


태그:#수입차, #외제차, #포니, #갑을, #민병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