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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023년 9월 23일 오후 4시]

조선시대에 폐주(廢主)라는 개념 속에는 '주상 자리에서 폐위된 사람'뿐만 아니라 '전직 주상의 대우를 못 받는 사람'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직 주상이 받는 대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어서 종묘 사당에 모셔지는 것이었다. 종묘 사당에 모셔져서 조(祖)나 종(宗) 같은 묘호(사당 명칭)를 받는 것이 전직 주상 대우의 완성이었다.

광해군과 연산군이 폐주 소리를 듣는 본질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임금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묘에 모셔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다. 쿠데타로 폐위됐을 뿐만 아니라 전직 주상의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전직 대통령을 종묘 같은 사당에 모시지는 않지만, '전직 대통령의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전직 대통령을 예우한다. 그런데 지난 1995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을 12·12 군사반란죄, 5·18 내란죄, 불법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두환을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표시했다.  

1997년에 추징금 징수를 제외한 분야에서 전두환을 사면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전직 대통령 예우를 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결단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전두환을 전직 주상으로 대우하지 않겠다', '전두환을 폐주로 대우하겠다'는 우리 국민의 결단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두환은 '폐주'처럼 살기는커녕 '상왕'처럼 호사를 누리고 있다. 아니, 상왕이 아니라 상황(上皇) 혹은 태상황처럼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폐주 전두환의 화려한 삶을 조선시대 대표적 폐주인 광해군의 초라한 삶과 비교해보면, 폐주 전두환이 얼마나 몰염치한 인물인지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될 것이다. 

광해군은 전두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그릇이다. 이 글에서 광해군과 전두환을 비교하는 것은, 광해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급 인물'이 광해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층 생활'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모순되고 서글픈 일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호위하는 군관에게 안방 빼앗겨 

인조의 쿠데타로 왕권을 잃은 뒤 광해군은 처음에는 강화도에서, 나중에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여기서 인조반정이라 하지 않고 인조 쿠데타라 한 것은, '반정'이란 표현 자체가 정치적이고 편파적이기 때문이다. 

반정(反正)이란 것은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다'란 의미다. 이것은 광해군의 조세 개혁과 자주 외교가 옳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서 나온 표현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쿠데타 세력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인조반정 대신 인조 쿠데타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서울 덕수궁 석어당. 폐위된 직후에 쿠데타군에 끌려 덕수궁에 간 광해군은 이곳에서 젊은 계모인 인목대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서울 덕수궁 석어당. 폐위된 직후에 쿠데타군에 끌려 덕수궁에 간 광해군은 이곳에서 젊은 계모인 인목대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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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1623년부터 1641년까지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5년간의 임금 생활과 비교하면, 유배 생활이 3년 더 길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참으로 말 못할 수모와 고통을 겪었다. 

광해군은 숙박 문제에서부터 수모를 당했다. 인조 2년 6월 3일자(1624년 7월 17일) <인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을 강화도에 끌고 간 군관인 홍진도는 동료들과 함께 안방을 차지하고 광해군에게는 마루방을 주었다. 난방 시설인 구들이 없고 그냥 마루만 깔린 곳에 광해군을 밀어 넣은 것이다. 

홍진도는 인조의 이종사촌형이었다. 그가 광해군을 적당히 박대했으면, 이런 일이 실록에까지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처사가 너무나 지나쳤기 때문에 그 행위의 일부가 실록에 공개된 것이다. 그의 행동이 매우 방자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인조실록>은 말한다. 

이 정도였으니, 광해군이 유배지에서 물질적으로 얼마나 궁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전두환이 연희동 자택에 사는 것과 비교하면, 광해군이 처한 환경은 매우 열악한 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광해군은 가족을 잃는 슬픔까지 겪어야 했다.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된 직후에 그는 아들 부부를 잃었다. 유배된 지 2개월 만에 광해군의 세자인 이질이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들렸다. 이질의 부인인 세자빈 박씨는 나무 위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남편이 붙들려 되돌아오는 장면을 보고 놀라 나무에서 떨어졌다. 그 후 이 부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행은 광해군의 부인인 폐비 류씨에게 옮겨갔다. 남편이 폐위된 데 이어 세자 부부가 자살한 뒤로 가슴에 화병이 생긴 류씨는 유배 이듬해에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탓하며 유배생활에 적응하고자 한 것이다. 

시중드는 궁녀한테 영감 소리를 들었다 

그 뒤 광해군은 홀로 제주도로 떠났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광해군 이송 작전은 선박의 사면을 휘장으로 가린 채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광해군을 이송한 것이다. 광해군은 제주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제주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광해군의 유배지는 네덜란드 표류민인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도 소개되어 있다.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광해군의 숙소에 기거했다는 사실이 <하멜 표류기>에 적혀 있다.  

광해군은 이 집에서 참으로 못된 궁녀한테 정신적으로 시달렸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광해군의 시중을 드는 궁녀 중에 성질이 고약한 여성이 있었다. 이 궁녀가 너무 모질고 건방지게 대하자, 한번은 광해군이 그 궁녀를 꾸짖은 일이 있었다. 

이때 광해군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궁녀를 질책했다가 엄청난 봉변을 당한 것이다. 궁녀는 광해군을 '영감'이라고 부르면서 광해군에게 일장 연설을 해댔다. 길고 긴 훈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잘했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지"라는 것이었다. 
 
광해군 부부의 무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소재.
 광해군 부부의 무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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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견문록>에 따르면, 광해군은 고개를 숙인 채 탄식만 하면서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기를 꾸짖는 궁녀를 보면서 자기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의 처지를 담담하게 수용했다. 폐주 전두환이 고개 뻣뻣하게 하고 거액의 돈을 뿌리고 다니면서 상왕 행세를 하는 것과 대조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지만 힘이 없어 왕위를 빼앗긴 광해군은 18년 동안 치욕과 고통 속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감시하는 군관이 안방을 차지하고 시중드는 궁녀가 영감이라 부르며 삿대질을 하는 속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유배생활은 참혹했다. 

그에 비해 전두환은 1988년 퇴임 이후는 물론이고 1997년 석방 이후에도 마치 상왕이나 태상황이라도 된 것처럼 유세를 부리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며 얼마나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전두환은 폐주처럼 참혹하고 참담하게 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광해군보다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태그:#광해군, #전두환, #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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