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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옷가지를 챙겨 나오신다. 갑자기 찾아오는 아들 며느리에게 어머니의 단정치 못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입은 옷을 벗겨 빨래하러 나오시는 거다. 이런 장면 다음에는 "제가 빨게요. 저 주세요"라고 아내가 얼른 나서는 게 순서겠지만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덥석 빨래 거리를 며느리에게 넘겨줄 분이 아니라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빨래 거리를 들고 수돗가로 가시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 거실로 들어가니 문이 열린 작은방에서 주섬주섬 옷을 입는 어머니가 보였다. 평생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않고 억척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몸이 망가져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한 채 팔 힘으로 몸을 움직여 겨우 화장실 정도만 출입하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밥하고 빨래하는 일이 모두 아버지 차지가 되고 말았다.

"아버님한테 잘해드려야지. 아버님 아니면 다 우리 일인데."

아내가 가끔 하는 말이다. 거동이 불편해서 꼼짝 못하는 어머니 곁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농사까지 지으시는 아버지가 없다면 그 모든 일들은 다 우리 부부가 떠안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잘해드리기는커녕 한 달에 한두 번 찾아뵙기도 빠듯하다.

전쟁 때문에 졸지에 가장이 된 열세 살 아버지

텃밭에서 재배한 달래를 캐고 계신 아버지
 텃밭에서 재배한 달래를 캐고 계신 아버지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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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부친을 잃고 사형제의 맏이로 남은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사실상의 가장이 되었다. 남편을 잃고 홀어머니가 된 할머니 혼자 가진 재산 없이 품팔이만으로 남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열 셋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동네 어른들 따라 농사짓기, 나무하고 장작 패기, 홀어머니 늦을 때 밥하고 빨래하기, 구멍 난 양말 기워 신기, 집안 청소하기…. 흥부처럼 남이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집안일, '집밖일' 가리지 않았다. 손위로 누나가 있었지만 전쟁 전에 출가했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맏이인 아버지가 가장 노릇에 딸 역할까지 하는 사이 동생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남의 집 머슴이 되어 자신들의 앞가림을 해나갔다.

이런 성장 배경 때문인지 아버지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여성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빗자루 들고 외양간을 쓸면 안방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걸레 들고 방을 닦으면 파리가 앉다 낙상할 정도로 깨끗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 할머니는 딸 노릇까지 도맡아 했던 큰아들 자랑을 가끔 했는데, 동네 아낙네들보다 더 뜨개질을 잘 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아버지가 여성적 취향을 유감없이 발휘한 건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였다. 첫 아들 학교 입학시킬 때 설렘이야 어느 부모나 같겠지만, 아버지가 보여준 행동은 남달랐다. 입학하는 아들 주려고 장날 시장에 가서 가방을 사가지고 왔는데 하필이면 여자 애들 메는 빨간색 가방이었다.

새 가방 메고 학교 갈 꿈에 부풀었던 나는 빨간 가방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징징거려도 보고 떼도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빨간 가방 메고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로부터 여자 가방 메고 다닌다고 놀림깨나 받았다. 그래서 가방이 얼른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집에 오면 있는 힘을 다해서 방바닥에 팽개치곤 했다.

한국전쟁 때 부친을 잃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남동생이 있었지만 갓난애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지게 지고 나무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 아버지가 선보러 오던 날도 지게 지고 나무를 했다고 어머니는 어린 시절 내게 이야기하며 웃으셨다. 자라면서 지켜본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억세고 억척이셨다.

"다른 집 남자들은 막노동 해서 목돈도 벌어오는데..."

전쟁통에 부친을 잃은 아버지가 가장 역할에 딸 노릇까지 하며 살았다면 남자라고는 어린 동생밖에 없는 집에 살았던 어머니는 아들 역할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그런 두 분이 결혼했으니 마음과 뜻만 맞는다면 알뜰살뜰 재산 모아 잘살 수도 있었을텐데 안타깝게도 두 분 생각이 달랐다.

전쟁 통에 부친 잃고 처녀 몸으로 지게 지고 나무까지 하며 살았던 어머니는 결혼 후에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 몸 상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이든 다 했다. 봄이면 산에서 산나물 뜯고 잔대며 더덕 캐서 팔기, 밭에서 달래, 냉이, 씀바귀 캐서 팔기, 누에치기, 여름이면 옥수수 삶아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내다 팔기, 가을이면 새벽이슬 맞으며 산밤 주워다 팔기, 메뚜기 잡아 말려 팔기, 봄부터 가을까지 개울에서 다슬기 잡아다 팔기, 겨울이면 괭이 들고 산에 올라가 삽추싹 뿌리 등 약재 캐다 팔기….

별 볼일 없는 것도 어머니 손을 거치면 돈이 되었다. 한약재에 눈을 떠서 뽕나무 뿌리, 옥수수 수염, 복숭아 씨, 패랭이꽃 줄기 등을 모아 건재약방에 내다 팔았다.

아버지는 약간의 땅을 마련한 뒤부터는 돈벌이보다는 농사일에만 매달렸다. 다른 집 남자들은 막노동을 해서 목돈도 벌어오는데 아버지는 도무지 그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어머니가 불만을 터트려도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열 세 살 나이부터 고생하며 자란 아버지는 가족들 밥 굶기지 않을 정도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땅을 소유하는 것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봄에 씨앗 뿌려 가을에 수확해서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농사지으며 남는 시간들을 빈둥대며 보내지는 않았다. 집 울타리를 따라 꽃을 심고 가꾸었다. 이웃집 아저씨가 막노동 가면 그 집 농사일을 아무 조건 없이 거들어주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던 어머니와는 달리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했던 게 아버지였다.

그런 남편의 모습이 달가울 리 없는 어머니는 늘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억척스럽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산과 들은 물론이고 개울까지 넘나들면서 돈 될 것을 모아다 시장에 내다 팔다보면 집안일은 당연히 소홀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그 빈자리를 채우며 살아왔다.

바깥출입 못하는 어머니 위해 머리까지 잘라주시는 아버지

고생 끝에 골병든 채 집 안에만 머물러 계신 어머니
 고생 끝에 골병든 채 집 안에만 머물러 계신 어머니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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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되는 일에 억척으로 매달렸던 어머니는 골병이 들어 바깥출입도 못한 채 아버지가 해주는 밥을 먹고 살고 계신다. 어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생을 덜하셔서 그런 걸까? 아버지는 대장암도 거뜬히 이겨내고 늙고 병든 아내를 보살피며 농사를 짓고 계신다.

그런 생활이 힘들어 때로는 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진다"고 속내를 표현하신다. 그러면서도 미장원에조차 가기 힘든 늙고 병든 아내 머리까지 손수 잘라주면서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이 할망구야. 손주들 대학 졸업하기 전까지는 죽지 말고 살아 있어야 해."

덧붙이는 글 | '만화가 박재동 <아버지의 일기장> 출간 기념 기사 공모' 응모 글입니다.



태그:#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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