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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인협회가 낸 시집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
▲ 시집 <사람> 한국시인협회가 낸 시집 <사람>-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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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사에 나오는 인물들 112명에 대한 시를 실은 <사람>이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서문에서 신달자 시인(한국시인협회 회장)은 "우리 근대사의 주요한 인물들이 남긴 빛과 그늘을 문학의 눈으로 살펴보고자" 시집을 펴낸다고 했다. 언뜻 스쳐 들으면 '시로 읽는 한국 근대 인물사'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과연 <사람>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분야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낸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불러내고 있다. 김구, 안창호, 김좌진,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이중섭, 박경리, 정주영, 이병철, 앙드레 김, 이주일까지 한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시집을 펼쳐보면 '그늘'보다는 '빛'만을 너무 앞세운 '용비어천가'를 읽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나치게 번지르하다. 백 걸음 물러나 역사의 평가는 뒷날 달라질 수 있다고 쳐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들의 잘못은 말하지 않고 업적만 치켜세워서야 될 말인가.

같은 책 서문에서, '역사의 시공간을 살피고 그 시대의 주체인 사람과 삶의 지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당대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그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무엇이고, 그 선택이 오늘날 우리의 사람에 어떤 의미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반추하고 합당한 자리를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매김하는 것은 문학의 몫이다'(9쪽)라고 했다. 사람도 그냥 사람이 아니라 역사적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사람을 '찬양'만 일삼는 게 문학의 눈이고 시인의 입인가?

당신은 날이 갈수록 빛나는 전설입니다. /잘 살아 보자고 외치던 카랑카랑한 목소리, /위풍당당 자신감이 넘치는 형형한 눈빛, /아무도 못 말리던 그 집념, 그 믿음과 비전은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을 우리의 횃불입니다.
                                                                                  ……시 <박정희>의 일부

주린 배 뼛속까지 스미던 가난 속 의무교육은 /높은 문맹률 단숨에 말리고 /민주주의 자유 시장 경제 초석은 /잘 살아 보자며 고속도로 깔던 힘의 원천. /진보라는 가면을 쓴 붉은 얼굴들이 마음껏 설치는 /넘치고 넘친 자유가 오히려 불안한 /오늘 /6·25가 통일 전쟁이라는 그들의 말처럼 /만에 하나라도 이 나라 붉게 물들었다면 /나의 손자 우리의 손녀들이 /이렇게 맑은 웃음 날릴 수 있었을까
                                                                                   ……시 <이승만>의 일부

기업보국(企業報國)을 꿈꾼 선각(先覺)이었다. /근대의 낙후 속에서 가난은 정녕 기회였던가, /달 속 기린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북두(北斗)를 보았던가. /(가운데 줄임) /차라리 혁명은 가난한 역사 속에서 솟구치는 것이다. /가업(家業)은 창업 한 세기를 채우기도 전에 /세계 기업사의 기적으로 우뚝 솟았다.
                                                                                   ……시 <이병철> 일부

시집 <사람>에 실린 인물들 일부
▲ 시집 <사람>의 차례 시집 <사람>에 실린 인물들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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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집 <사람>에 시를 실은 시인들을 싸잡아 나무라거나 욕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시집에 실린 근현대사 인물들의 공과를 평가할 마음도 없다. 그럴 만한 깜냥도 안 된다. 다만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라는 말에 귀 기울여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말하는 거다.

'잠수함의 토끼'는 <25>를 쓴 게오르규의 말이다. 잠수함에서 산소가 모자라면 가장 먼저 눈치를 채고 반응을 보이는 게 토끼라지. 잠수함의 토끼처럼 시인은 시대 정신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남이 미처 보지 못한 길을 온 몸으로 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하루가 지났다. 23일 오후 한국시인협회 신달자 회장은 누리집(http://www.koreapoet.org) 커뮤니티 게시판에 "기획취지가 충실히 반영되지 못한 작품들이 일부 수록되었고 누락된 인물도 있는 등 시인협회를 사랑하는 시인들과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걱정과 심려를 끼쳤다"는 글을 올리고, <사람> 전량 회수와 30일에 열려던 출판기념회도 열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시인 55명이 시집 <사람> 출간에 대해 집행부의 사과와 시집 회수 요구를 따른 결정이다. 이 땅에 아직 시인다운 시인이 살아있다.


태그:#민음사 시집, #사람, #박정희, #이승만,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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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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