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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 위에 한석봉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 구지봉 정상부 귀퉁이에 있는 고인돌 판석 위에 한석봉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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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은 왜 머리를 내놓아야 했을까, 구지봉
봉하마을에서 택시나 시내버스를 타고 진영시외버스터미널로 나와 14번 버스를 타면 옛 가야의 터전으로 향할 수 있다. 흔히 김해의 가야 유적으로 수로왕릉을 떠올리지만, 사실 '왕릉'에서 '왕'자를 빼고 나면 그것은 역사적 가치를 제외할 때, 오늘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민중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이야기'가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이야기의 중심 무대인 구지봉이야말로 가야 역사문화답사의 첫 기착지가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구지봉은 말 그대로 산이 아니라 '봉'이다. 낮은 구릉에 가깝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곳이 어떤 곳이었기에 이곳을 무대로 가락국의 건국신화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민중들의 입으로 전해져왔던 것일까. 구지봉 정상부에 이르자 그 까닭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높이가 낮아 오르기가 쉽고 정상부가 넓으면서 평탄한 구지봉은 고대 김해인들이 함께 모이기 쉬운 장소였을 것이다.
▲ 구지봉 정상부 전경 높이가 낮아 오르기가 쉽고 정상부가 넓으면서 평탄한 구지봉은 고대 김해인들이 함께 모이기 쉬운 장소였을 것이다.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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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구지봉의 정상부는 평탄했다. 그리고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다른 산들의 경우 고도가 높고 정상부가 좁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구지봉은 그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를 수 있고, 정상부에 모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 점이 구지봉이 가락국 건국신화의 주요 배경무대가 된 일차적인 이유가 아닐까. 심지어 정상부 한 귀퉁이에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곳이 오르기 어렵고, 정상부의 공간이 협소했다면 이곳까지 무거운 돌을 운반하리라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고대 김해사람들은 쉽게 그리고 함께 올라 직접 하늘과 마주할 수 있는 이 구지봉을 신성한 제의의 공간으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자연과 하늘에 대해 경외심을 품고 있던 고대인들에게 제의 공간은 필수적이었고, 그런 가운데 구지봉은 가장 최적의 장소이면서 친숙한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제의를 지내는 과정에서 구지봉을 무대로 한 건국신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 제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건국신화를 재현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은 여유와 기지가 한껏 넘치는 구지가를 함께 부르며 서로의 단합을 다졌을 것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삶아먹으리.

한편, 구지봉 정상부 주변은 소나무로 둥글게 둘러싸여 있었다. 혹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과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또 구지봉에서 바라보자 저 멀리 사방으로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구지봉은 멀리 사방을 둘러싼 산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실제 구지봉 한 귀퉁이에 있는 고인돌은 위치상 먼 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로, 판석은 둥그런 탁자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또 양 옆에는 돌들이 판석을 괴고 있다. 판석 평면은 자줏빛을 띠고 있는데,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지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와 함께 솔 향이 은은히 퍼지는 소나무 숲 그늘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멀리서 울려오는 새소리와 함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김해 지역의 고대인들 역시 이런 구지봉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유일한 고대 왕비릉, 수로왕비릉

불탑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있어 초기 형식의 탑으로 보인다. 불교적 요소보다 주술적 요소가 강해보인다.
▲ 파사석탑의 신비 불탑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있어 초기 형식의 탑으로 보인다. 불교적 요소보다 주술적 요소가 강해보인다.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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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봉 곁에는 수로왕비릉이 있다. 그러니까 인도 야유타국에서 건너와 수로왕과 혼인해 가락국의 왕비가 되었다는 신비의 인물 허황옥의 릉이다.<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해지는 이 이야기와 허황옥의 실체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어쨌거나 그 이야기자체는 매우 극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교통수단이 아주 발전한 오늘날에도 인도는 저 멀리 멀게만 느껴지는데, 까마득한 옛날 뱃길로 인도에서 가야까지 와서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상상력의 폭이 웬만큼 넓지 않으면 만들어질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무덤 주변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무덤 앞에는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이라 적혀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 비는 조선후기인 1647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수로왕비릉에서 이목을 끄는 유물은 단연 파사석탑일 것이다. 원래 호계사에 있던 것을 조선 말기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는데, 현재는 탑의 부재 5층만 남아 있다.

이 파사석탑의 돌은 김해지역에서는 나지 않는 재질이라 한다. 돌은 은근히 붉은 빛이 감돌고 있는데, 닭 벼슬의 피를 석탑의 돌 위에 떨어뜨려도 피가 굳지 않는다는 말이 전한다. 안내 표지판에 따르면 이를 이곳지역 향토사학자 분이 실험으로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 왜 이런 말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튼 파사석탑이 특이한 탑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그냥 돌을 쌓아 올린 초기 형태의 탑인 듯하지만, 한편으로 돌의 크기가 상층으로 갈수록 적어지는 일정한 형식을 취하고도 있다. 아무튼 파사석탑은 역사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물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불탑의 양식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불탑의 목적으로 쌓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와 함께 수로왕비릉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 고대 왕릉 중 유일한 왕비릉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특별하다. 한국 고대사에서 왕비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사실상 허황옥이 유일하다.

가야 문화의 보고, 국립김해박물관과 대성동고분박물관

왼쪽에 있는 것이 출토된 당시의 모습이고 우측의 것은 복원해놓은 것이다. 고상식 주거 형태로 그 모습이 앙증맞다.
▲ 집모양 토기 왼쪽에 있는 것이 출토된 당시의 모습이고 우측의 것은 복원해놓은 것이다. 고상식 주거 형태로 그 모습이 앙증맞다.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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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국립김해박물관을 찾았다. 아쉽게도 때마침 이곳은 상설전시실 개편으로 원래 상설 전시하던 유물들 중 일부를 특별전 형태로 운영하고 있었다. 국립김해박물관은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대부분을 소장, 전시하는 곳인 만큼 가야문화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다.

이곳에선 김해 대성동, 양동리부터 시작해 창원 다호리, 고령 지산동, 함안 말이산, 창녕 교동, 합천 옥전 등 가야 문화권 지역 중 역사학계, 고고학계에서는 꽤 유명한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다. 사실 가야에 대한 문헌자료는 절대적으로 빈약하다. 역사학의 큰 한계 가운데 하나가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묻혀 버리는 속성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야인들은 풍부한 유물을 통해 자신들이 일군 삶을 말하려 하는 듯하다. 가야 지역의 유물들은 가야인들과 그 문화가 도달한 역량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멀리 일본, 오키나와 지역과 교류하고 북방계통의 문화까지 접하고 있던 상황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천 늑도에서 출토된 일본산 유물들과 대성동에서 출토된 청동솥은 이를 말해준다.

사실 일반인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박물관은 대단히 따분한 장소일 수 있다. 솔직히 봐도 잘 모를 익숙치 않은 옛 유물들이 주는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를 동반한 어른들이 역사 유물에 대한 지식이 알천하다면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는 자세로 유물 관람에 집중하게 하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이들의 흥미를 유도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박물관 관람객들은 그저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는 구경꾼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진품명품식의 평가만 하면서. 그러니까 이 유물은 금칠을 해놓았으니 값이 꽤 나가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유물의 가치가 돈의 잣대로만 인식되는 서글픈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다.

청동거울에 새겨진 문양의 솜씨가 감탄을 자아낸다.
▲ 대성동박물관 소장 사신 문양거울 청동거울에 새겨진 문양의 솜씨가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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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물관에 올 때마다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라고 이야기한다. 비록 별 것 아닌 유물 같지만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그 유물이 자신을 이렇게 바라봐달라고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역사에 대한 일정한 지식이 없어도 자신과 유물 사이의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결국 유물에 대한 시각 역시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유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낙동강 하류역의 선사문화와 관련해선, 창녕 비봉리에서 출토된 멧돼지무늬가 새겨진 토기편이 눈길을 끌었다. 이 토기는 신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표면에 멧돼지가 그려져 있다. 왜 토기에 멧돼지를 그려 넣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인데, 사실 널리 알려진 반구대 암각화에도 이런 모습의 멧돼지가 그려져 있다.

또 마산 진동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은 전형적인 비파형동검의 형식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세형동검의 생김새에 가까웠다. 그리고 김해 양동리에서 출토된 청동 세발솥의 경우 솥의 어깨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 주목되었는데, 이는 중국과의 교류 및 부피를 재는 도구와 관련된 단서라고 했다. 솥의 부피는 콜라 한 병인 1.98리터라고 했다. 최근 고대 도량형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당히 주목되는 유물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어깨 어디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지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함안 말이산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토기는 굽다리 위에 뿔잔을 제작하고 그 양쪽에 수레바퀴를 붙여놓은 형태인데, 이는 의례용으로 영혼을 실어 나르는 의미로 추정된다. 붓이 출토된 것으로 유명한 창원 다호리 유적 유물의 경우 전시된 붓이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창녕 교동에서 출토된 청동합은 오늘날 사용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김해 화정에서 출토된 토기에는 글자 새겨져 있는데, 한자는 아니고, 가야인들의 문자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외 각종 가야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절구, 항아리, 청동기, 곡옥, 금동관, 뿔잔, 그릇, 부뚜막, 장신구, 환두대도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생활유물과 의례용 유물, 지배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유물, 무기용 유물로 나누어볼 수 있었다. 가야의 철기문화를 잘 보여주는 갑옷과 투구는 병사만이 아닌 말까지 착용하였고, 귀걸이 등 각종 장신구들은 정교한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김해박물관을 나와 수로왕릉 쪽으로 걷다보면 그 중간에 노출전시관이 있다. 이 전시관은 김해 대성동 고분 중 왕릉으로 추정되는 29호분 및 39호분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놓은 것인데, 무덤 안에서 다량의 토기가 쏟아져 나왔다. 또 특이한 점은 39호분의 경우 29호분을 일부 파괴하며 무덤을 조성한 점이다. 사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싸고 고고학계에서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노출전시관을 지나면 대성동고분박물관이 나온다. 여기선 대성동고분군의 목관묘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들 유물 중 대성동 23호분에서 출토된 사신(四神) 문양 거울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이곳에서 출토된 인골도 볼 수 있었다.

수로왕릉 앞 5일장이 상징하는 것?

수로왕릉은 우리나라 역대 왕릉 가운데 그 묘역이 가장 넓고 화려해보인다. 뒷날 삼국을 이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묘는 알 수 조차 없는 속에 가야의 시조묘가 이토록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은 역사의 오묘함을 말해준다.
▲ 수로왕릉 묘역 전경 수로왕릉은 우리나라 역대 왕릉 가운데 그 묘역이 가장 넓고 화려해보인다. 뒷날 삼국을 이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묘는 알 수 조차 없는 속에 가야의 시조묘가 이토록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은 역사의 오묘함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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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걷고 또 걸으면 수로왕릉에 이른다. 그러니까 수로왕릉과 허황후릉은 부부임에도 서로 꽤 떨어져 있는 셈이다. 수로왕릉의 묘역은 각종 전각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대 왕릉 묘역치고 화려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후손들이 번창했기 때문일까? 사실 오늘날 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수를 자랑한다. 또 수로왕의 후손들은 김유신을 비롯해 뒷날 신라에서 크게 출세했다. 실제 왕릉 바로 앞에 가락 김해시종친회가 보였다.

수로왕릉의 전각과 문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글자는 '숭(崇)'이다. 숭신각, 숭선전, 숭정전(초상화를 모신 곳), 숭인문 등등 그야말로 '숭'자의 연속이다. 이곳이 후손들에 의해 끊임없이 덧붙여졌음을 보여준다. 본래 수로왕릉 정문은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인데, 바로 지금 왕릉 앞에 있는 문이다. 그러니 묘역 역시 현대에 들어와 계속 확장된 것 같다. 이 문에 그려져 있는 쌍어문 문양은 가락국 건국신화와 관련해 주목받곤 한다. 우리 전통적 분위기보다 오히려 인도풍의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수로왕릉 묘역은 멀리 동서로 푸른 산이 있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하늘을 향해 쳐다보면 시야가 탁 트인다. 그래서 시원하고 장쾌한 느낌을 준다. 왕릉은 문 앞에서 바라만 볼 수 있도록 규제하고 있었다.

이렇듯 '숭'자의 연속이지만, 사실 수로왕릉 앞은 5일장이 서는 장터다. 이토록 성역화되어 있는 왕릉 앞에 시끌벅적한 장터가 서는 것이 처음엔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예전 가락국은 국제무역과 시장으로 번성했으니 가락국 시조 수로왕릉 앞에 장이 열리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더불어 왕릉이 지니는 상징성 덕분에 사람들은 쉽게 왕릉 앞에서 모였을 것이고 이게 장으로 연결됐던 것이 아닐까. 결국 왕릉의 존재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북적거리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수로왕릉 앞 장터는 2, 7일에 열리는 5일장이어서 마침 방문한 날은 장이 선 날이었다.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활기에 찼다. 예전 김해는 바다에 바로 접해 어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이곳 장터 곳곳에도 어물전이 펼쳐져 있었다. 활력을 잃은 대도시의 재래시장과는 딴판인 풍경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애완동물부터 시작해 각종 먹을거리, 반찬거리, 일상용품 등이 난전을 이루고 있었다. 장터의 규모도 꽤 컸다. 수로왕릉 앞 장터는 이처럼 장터 나름의 향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옛 가락국의 활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장쾌하고 상쾌하다.
▲ 수로왕릉에서 바라본 하늘 장쾌하고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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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지난 17일 김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구지봉, #허황옥, #수로왕릉,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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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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