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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5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간 지역은 부산경남입니다. [편집자말]
1980년대 마산지역 중학생들은 매우 어려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인구에 비해 인문계고등학교 숫자가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야간자율학습 뿐만 아니라 새벽등교까지 하곤 했다.
 1980년대 마산지역 중학생들은 매우 어려운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인구에 비해 인문계고등학교 숫자가 턱없이 적었기 때문이다. 야간자율학습 뿐만 아니라 새벽등교까지 하곤 했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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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학창시절과 당시 상황을 엮었습니다.

1987년 경남 마산 소재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심란했다. 당시의 민주화 바람 때문도, 마산을 대표하는 스포츠스타 이만기가 '인간기중기' 이봉걸에 잇따라 패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해 고등학교 입학시험인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역대 가장 높을 것이란 전망 때문이었다.

교사들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잔뜩 겁주며 공부를 독려했다. 2학년 때는 야간학습반이 생겼고, 새벽반을 만드는 학교도 있었다. 80년대 마산의 고교 입시 커트라인은 평균 170점(200점 만점)이 넘었다. 87년엔 180점이 넘을 것이란 게 대다수 교사들 생각이었다.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아이들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한 교사는 "대학도 아니고 고등학교에서 떨어지면 창피해 마산에서 얼굴 들고 다닐 수 없다"며 아이들을 긴장시켰다. 중3 아이들은 답답한 가슴으로 지냈지만 어른들 술자리 화제는 달랐다.

일단 한일합섬이 화제였다. 대다수 도시 사람들에게 '내 고장 기업'이 잘 나가는 건 큰 자랑거리다. 울산에는 현대차와 중공업, 포항에는 포항제철이 있다면, 마산엔 한일합섬이 있었다.

1970년대 10대 기업에 든 한일합섬. 1980년대에도 꾸준히 30위권 대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현대나 럭키금성, 삼성, 대우 같은 '진짜' 대기업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부터 뭔가 다른 바람이 불었다. 1985년 10대기업이었던 국제그룹 일부를 한일합섬이 인수하면 재계 순위 15위 권으로 대폭 뛸 전망이었다.

게다가 87년 6월엔 한일합섬이 그 대단하다는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고 발표했다. 마산시민은 "이제 한일합섬도 진짜 대기업에 포함된다"고 기대했다. 지역민들에겐 모든 게 얘깃거리였다.

1980년대 마산 사람들은 씨름을 유난히 좋아했다. 아마도 이만기, 이승삼 같은 스타들이 전국 씨름판을 주름잡았기 때문이리라. 사진은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1980년대 마산 사람들은 씨름을 유난히 좋아했다. 아마도 이만기, 이승삼 같은 스타들이 전국 씨름판을 주름잡았기 때문이리라. 사진은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 천하장사마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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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섬 이야기는 사실 맛보기고,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열을 올린 건 스포츠스타 소식이었다. 이만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 205cm의 이봉걸이 183cm에 불과한 이만기를 3월과 5월 연거푸 이긴 건 꽤 기분 나쁜 일이었다. 키가 2m건 3m건 이만기를 이길 장사는 없다는 믿음이 마산시민에겐 있었다. 하지만 이봉걸이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일부 시민은 "몸집과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자조감에 빠졌다.

이봉걸과 이만기의 대결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다윗이 이겨야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법. 골리앗이 이기면 심한 열패감만 떠안게 된다. 당시 상황이 그랬다. 사람들은 유난히 덩치 큰 이봉걸이 못마땅했다. 일부는 "저렇게 덩치가 크면 기술은 전혀 없어도 되겠다"며 이봉걸을 폄하했다. 이봉걸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열패감이 담긴 말이다. 

하지만 역시 이만기였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9월 5일 열린 천하장사 대회에서 이봉걸을 꺾고 우승했다. "이봉걸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쏙 들어가고 "역시 이만기"라는 말이 다시 대세가 됐다.

이만기뿐만 아니다. 당시 전국 10대 도시에 들었던 마산엔 인재가 많았다. 원래 줄서는 식당에 더 긴 줄이 생기는 법이다. 인재가 모이니 성적 또한 좋았다. 씨름계에선 '털보' 이승삼도 전국구 스타였고, 뒤를 이어 강호동이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았다.

당시 마산에선 배구, 농구 성적도 괜찮았다. 8월엔 마산중앙고가 9월엔 마산여고가 전국배구대회 고교부 우승트로피를 들었다. 그해엔 고교생 센터 랭킹 1위인 마산고 정재근이 어느 대학교로 가는지가 큰 관심사였다.

한일합섬, 한국철강, 몽고간장... 도시도 '쑥쑥' 자라

한국철강 또한 마산을 대표하는 기업이었다. 1967년 마산공장 준공식 때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로 나라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한국철강 홈페이지 캡처)
 한국철강 또한 마산을 대표하는 기업이었다. 1967년 마산공장 준공식 때 대통령이 참석할 정도로 나라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한국철강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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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에 한일합섬만 있지 않았다. 한국철강 또한 유명세에서 뒤지지 않았다. 한국철강은 출발부터 시끌벅적했다. 1967년 4월 마산공장 준공식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미 국무부 차관이 방한 시 방문할 정도의 기업이었다.

그럴 만했다. 국내외에서 조성한 350만 달러(약 39억 원)로 지은 공장이었다. 당시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시영아파트 한 채가 90만 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계산하면 1조 넘는 돈으로 공장을 차린 셈이다.

포항제철이 세워진 게 1973년이니 꽤 앞선 시도였다. 문제는 실력 없이 시작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얕은 수까지 부렸다. 한국철강은 선박을 만드는 데 쓰이는 두꺼운 철판을 국내에서 독점으로 만들었다. 정부에 외국산 철강을 수입하지 못하게 요청한 뒤 공급이 부족한 점을 이용, 가격을 올려 부당이득을 취했다. 그럼에도 제 때 빚을 갚지 못해 빈번하게 연체했다.

빚은 쌓이고, 기술력은 떨어지니 1969년 정부 부실기업 정리 대상에 한국철강이 포함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철강은 산업은행을 거쳐 동국제강에 인수됐다. 동국제강 또한 대기업이었다. 동국제강 시절에도 한국철강은 여전히 마산에 있었다.

'물좋은 마산'에 관한 역사는 꽤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때 이미 마산은 물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몽고군이 마산에 주둔했고, 우물을 팠다. 그 때 몽고군이 물맛에 감탄하면서 당시 판 우물에 '고려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1932년 일본인 단체가 '몽고정' 비석을 세웠다.
 '물좋은 마산'에 관한 역사는 꽤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때 이미 마산은 물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몽고군이 마산에 주둔했고, 우물을 팠다. 그 때 몽고군이 물맛에 감탄하면서 당시 판 우물에 '고려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1932년 일본인 단체가 '몽고정' 비석을 세웠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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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시민에게 친숙한 기업은 또 있었다. 바로 무학소주와 몽고간장. 두 회사 모두 물을 주재료로 한다는 점에서 '물 좋은 마산'이란 이미지를 대표했다.

'물 좋은 마산'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고려시절 몽고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마산에 모였다. 군이 모였으니 물이 필요했다. 우물을 팠고, 물맛을 본 몽고군은 "고려 최고"라며 감탄했단다.

우물엔 '고려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1932년 일본인 단체가 '몽고정'이라는 비석을 붙였다. '몽고간장'이라는 상호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물 좋은 마산' 이미지는 더욱 강해졌다.

당시 가정집에서 몽고간장은 필수품이었다. 그 시절 몽고간장 본사 앞엔 빵집이 한 곳 있었다. 아이들은 그 빵집을 지날 때마다 실없는 농담을 했다.

"너거들 그거 아나? 저 빵집에서 간장 냄새 난다는 거."

어쨌든 '몽고정'으로 불리기 전 '고려정'을 기억하는 마산시민들은 '고려'란 이름을 꽤 좋아했다. 마산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 이름은 고려당이었고, 시내 한복판의 호텔 이름은 고려호텔이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름이 고려당이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름이 고려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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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란 이름은 '고려정'을, '고려정'은 '물 좋은 마산'으로 이어졌지만 놀랍게도 당시 TV에선 물이 썩어가는 도시로 자주 마산이 나왔다. 수출자유지역과 대공장들이 들어선 뒤 마산 앞바다가 폐수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마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주로 보는 물이란 마산 앞바다였고, 그 바다는 검은색이었다. 이들에게 '물 좋은 마산'이란 말은 다소 생뚱맞게 들린다. 나 또한 그 시절을 떠올리면 앞바다에 둥둥 떠다니던 해파리떼와 기름얼룩이 생각난다.

아이들은 종종 "앞바다가 썩어서 전국에서 제일 더럽다는데 물 좋은 마산은 무슨"이라며 냉소하기도 했다.

1920년대 마산엔 꽤 많은 술공장이 있었으나 세월을 거치며 부침을 거듭했다. 1973년엔 경남 36개 회사를 통폐합해 마산엔 무학소주만 남았다. 오래된 기업은 어쨌든 지역민의 사랑을 받게 돼 있다. 마산 사람들은 오로지 무학소주만 마셨으니, 마산에서 소주란 곧 무학이었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형 이병각이 1952년까지 무학소주를 운영한 일은 술자리 가십거리였다.

큰 어시장과 미더덕 그리고 아구찜

마산은 꽤 좋은 바닷길을 가진 해안도시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설 수 있었다.
 마산은 꽤 좋은 바닷길을 가진 해안도시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수출자유지역이 들어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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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수출자유지역과 큰 섬유공장 탓에 마산은 공업도시로 불렸다. 지리적으로는 바다를 낀 해안도시다.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은 수산물이다.

훗날 어머니는 서울에서 장을 보면 종종 "살 게 없다"고 푸념했는데, 사실 그럴 만하다. 마산에서 장을 본다는 건 곧 수산물을 산다는 뜻이다. 서울에서 마산만큼 큰 수산물시장을 보기 어렵다. 마산 수산물시장의 점포수는 약 2000여 개다. 당연히 수산물 종류가 많고, 가격도 싼 편이다.

마산 아구찜은 전국구 음식으로 손꼽히며, 일찍이 서울 도심까지 진출했다. 나는 그 사실을 마산에 살던 청소년기에는 전혀 몰랐다. 마산을 떠날 때까지 집에서 만들어 먹은 아구찜은 손에 꼽을 정도다. 어쩌다 어머니가 아구찜을 하면 "맛이 없다"고 투덜대기 일쑤였다. 살은 물컹하고, 가시가 많아 발라먹기 영 힘들다는 게 당시 아구찜에 대한 느낌이다. 대신 미더덕찜을 수시로 해먹었다.

마산을 상징하는 음식이라 하면 다들 아구찜(사진)을 꼽는다. 그러나 마산에선 가장 많이 나는 재료가 미더덕인 만큼 마산에선 미더덕찜도 자주 먹는다.
 마산을 상징하는 음식이라 하면 다들 아구찜(사진)을 꼽는다. 그러나 마산에선 가장 많이 나는 재료가 미더덕인 만큼 마산에선 미더덕찜도 자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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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더덕은 마산에서 가장 흔한 수산물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맛보는 미더덕은 거의 마산에서 오는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더덕은 야들야들하고 꼬들꼬들한 살을 먹는 맛이 괜찮았다. 주말이나 특별한 날, 집에선 미더덕찜이 나왔다. 된장국에도 미더덕이 푸짐하게 들어갔다. 당연히 미더덕을 특별하게 여기진 않았다. 흔하고, 익숙한 음식일 뿐이었다.

워낙 오랫동안 미더덕을 먹다보니 딱딱한 투구 부분까지 통째로 먹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간 뒤 투구를 뱉어내고 살 부분만 먹는 사람들을 봤을 땐 엄청 어색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1987년 12월 5일 연합고사 치르는 날이 다가왔다. 예상처럼 마산지역 연합고사 커트라인은 180점 가까운 178점을 기록했다. 어느 반에선 반장이 마산시 인문계학교 진학에 실패했고, 우리반에선 8등 하는 아이가 떨어졌다. 그때 시험을 치른 강봉균(42, 창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매번 진주와 마산이 전국에서 연합고사 성적이 최고였다. 그해에는 마산이 진주보다 높았다. 마산이 178점, 진주가 176점이었다. 처음엔 마산이 180점이라고 했는데, 그 해 마산에 고등학교가 하나 새로 생기면서 점수가 다소 떨어졌다."

입시에서 떨어진 아이들은 마산에서 꽤 익숙한 고등학교 재수학원을 찾아 나섰다.

쇠락한 도시 마산, 이젠 변신을 꿈꿀 때

바다도시 마산을 상징하는 음식문화론 통술을 꼽을 수 있다. 술과 함께 각종 다양한 해산물 안주가 곁들여 나온다.
 바다도시 마산을 상징하는 음식문화론 통술을 꼽을 수 있다. 술과 함께 각종 다양한 해산물 안주가 곁들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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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88년은 마산이 도시로서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처럼 보인다. 마산의 대기업은 가장 크게 덩치를 불렸다. 마산은 덩치에 걸맞게 구청을 두 개나 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서울, 부산, 대구처럼 광역시급에만 구청이 있던 시절이었으니 구청 신설은 어깨에 꽤 힘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사실 그때 마산은 전성기가 아닌 '끝물'이었다. 이미 꼭짓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들어섰지만 그 시기를 늦추려 안간힘 쓰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10년 정도를 더 버텼다.

1997년 1월 19일 삼성화재컵 슈퍼리그 2차 대회 여자부경기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한일합섬이 흥국생명에 세트스코어 3-2로 패했다. 대회 최대 이변으로 꼽혔고, 언론은 '무적함대 한일합섬 침몰'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모기업 한일합섬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그해 말 한일합섬이 여자배구단 해체를 결정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듬해인 1998년 7월 1일 한일그룹 핵심 계열사인 한일합섬은 최종 부도처리됐다. 마산 사람들은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이 사라지는 걸 허망하게 바라봐야 했다.

한 때 아시아에서 가장 컸다는 한일합섬 공장 자리엔 이제 아파트가 들어섰다.
 한 때 아시아에서 가장 컸다는 한일합섬 공장 자리엔 이제 아파트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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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을 대표하는 기업이던 한국철강 또한 그즈음 마산과 작별을 고하기 시작했다. 1993년 마산 3압연공장 가동을 중지한 것을 시작으로 줄줄이 마산에 있는 공장이 멈췄다. 2003년 11월엔 마산공장이 완전히 문을 닫으면서 마산과 인연이 끊겼다.

100여 년 동안 마산에서 간장을 만들던 몽고간장 또한 1988년 창원으로 공장을 옮겼다. 1970~1980년대 전국 10대 도시였던 마산은 인구 50만 명 근처에서 주춤거렸다. 인구는 모래알처럼 빠져 나갔다. 의기양양하게 구청제를 시작했지만 2000년 12월 31일 쓸쓸하게 구청제가 폐지됐다.

2010년 7월 1일 창원시와 마산시, 진해시가 통합해 지금의 '창원시'가 됐다. 1980년대 마산 사람들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다. 1980년대 후반 창원 인구는 30여만 명으로 '50만 마산'보다 훨씬 아래였다.

기업과 도시는 운명공동체와 같다. 한일합섬, 한국철강, 몽고간장은 이제 마산에 없다. 과거 영화에 얽매이지 말고 지난 역사를 자산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공업도시로 흥했다가 문화도시로 재기한 사례는 꽤 있다. 주력인 조선업이 무너지면서 한때 실업률이 30%에 이른 스페인 빌바오, 몰락한 공업도시로 불린 영국 글래스고, 환경오염의 대명사였던 일본 구마모토현 등.

과거 경남을 대표하는 중심지였다가 쇠락한 마산 창동엔 최근 예술촌이 들어섰다. 다시 20년 뒤에 지금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무엇인가 강렬하게 스치고 지나간 흔적은 역사가 된다. 마산엔 기업 관련 강렬한 역사가 있다. 그 흔적은 훌륭한 문화자산이 될 수 있다.

한시절 공업도시였던 마산은 앞으로 어떤 도시로 바뀔까. 2013년을 살아가는 나는 꽤 궁금하다.


태그:#마산, #한일합섬, #한국철강, #몽고간장, #무학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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