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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광주광역시 광산구청장 민형배입니다.

초야의 기초자치단체장인 제가 대통령님께 이런 편지를 드리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벌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을 지켜보면서 국가구성원의 일원으로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성가신 내용이라 송구합니다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광주시민으로서, 공무를 집행하는 자치단체장으로서, 대통령님의 성공을 돕는 마음으로 직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귀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2일 광주를 방문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5·18 33주년 기념식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순서를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내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국민여론에 밀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에 "논란은 올해로 마지막"이라고 선언했던 이가 박 처장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약속을 스스로 뒤집고 다시 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여론에 밀려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이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저는 이대로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세상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광주가 아니더라도, 혹은 5월이 아니더라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1982년 '윤상원-박기순 영혼결혼식'에서 첫 선을 보인 이 노래는 80~9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억압이 있고, 소외가 있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꿈이 있는 곳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금도 변함없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피와 눈물, 힘찬 전망까지를 담고 있는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기 때문입니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몹시도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이 노래를 불편해한다는 것은, 노래가 담고 있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노래가 꿈꾸고 있는 '새날'을 불편해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공무를 집행하는 국가기관의 수장이 더 나은 세상과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꼴입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놀랍습니다.

박 처장의 '임을 위한 행진곡' 퇴출 시도는 이 노래를 진지하게 불러온 수많은 국민들을 모욕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국민의 주권과 자존심을 보호해야 할 대통령이 국민을 모욕하는 공무원을 그대로 둬서는 곤란합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당장에 보훈처장의 생각을 바로 잡아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번 논란이 대통령님의 생각을 잘못 짐작한 한 공직자의 '과잉충성'이 빚은 '해프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광주시민과 대다수 국민들은 '과연 대통령님의 생각은 어떨까'라는 질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주셨으면 합니다.

5·18기념식 참석하셔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주세요

2010년 5월 18일, 5.18유가족들은 5.18기념식장에 입장하지 않고 광주 5.18국립묘지 '민주의 문'에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의 노래가 시작되자 행사장 안에 있던 5.18부상자 등 유공자들도 밖으로 나와 "군사독재때도 부르던 노래를 이명박이가 못부르게 한다"고 성토했다.
 2010년 5월 18일, 5.18유가족들은 5.18기념식장에 입장하지 않고 광주 5.18국립묘지 '민주의 문'에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유가족들의 노래가 시작되자 행사장 안에 있던 5.18부상자 등 유공자들도 밖으로 나와 "군사독재때도 부르던 노래를 이명박이가 못부르게 한다"고 성토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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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간단합니다. 이번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대통령님이 꼭 참석하셔서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시면 됩니다. 대통령님께서 몸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대통령님의 진심을 알리고, 향후 이처럼 부끄러운 논란의 재발을 막는 길입니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을 가능케 한 '대통령 직선제'는 80년 5월의 목숨을 건 투쟁 그리고 전 국민이 일어나 싸웠던 87년 6월 항쟁의 힘으로 생겨났습니다. 이 시기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국민들 속으로 들불처럼 번져갔습니다. 직선제를 통해 대통령이 되신 분께서 그 직선제를 가능하게 했던 '노래'를 금기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박 대통령님께서는 또한 2004년 야당 대표 자격으로 5·18기념식에 참석했었습니다. 이때 바로 옆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습니다. 당시 박근혜 '대표'가 노래를 함께 불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5·18기념식장에 함께 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과 된 후의 처신이 달라지는 것은 '대통령'의 품격이 아닐 것입니다.

한 시대의 상징곡이면서 다수 대중이 자발적으로 선택해 부르는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세계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과 같은 사례는 흔하지 않습니다. 이런 노래는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막으려는 시도 자체가 국격을 떨어뜨리는 몰상식한 행동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비슷한 사례 중 하나가 혁명기 프랑스에서 탄생해 국가(國歌)가 된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입니다. 시대가 낳은 역사·문화적 자산을 프랑스는 국가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보수 정권도 '라 마르세예즈'를 바꾸려 한 적은 없습니다.

앞선 시대의 위대한 자산 폐기하는 정부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한 공무원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역사·문화적 자산을 폐기처분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까닭 없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오월 광주'를 모욕하며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국민을 욕보이는 몰지각한 처사입니다.

다시는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박 대통령이 직접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동시에 박 대통령님도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다시 말해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셔야 합니다. 그 방법이 5·18기념식에 참석해 온 국민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편지를 마무리 지으려 하니 지난해 대선 직후가 떠오릅니다. 선거기간 때문에 미뤄 두었던 주민과의 만남 자리가 많았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열려하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은 커다란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광주 지역에서 압도적으로 지지한 후보가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민들께 "국민 다수의 선택에 광주가 따라야 한다.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을 도와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박근혜 대통령님의 성공을 바랍니다. 대통령의 성공이 곧 국민의 성공으로 이어진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초단체장으로서 저는 대통령님과 함께 성공하고 싶습니다.

앞선 시대의 위대한 자산을 폐기하는 정부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님을 성가시게 하는 서한을 공개적으로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디 건강하시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현명한 판단과 옳은 일 많이 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태그:#5.18, #임을 위한 행진곡,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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