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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구의>
지구의의 남극을 관통하는 생활보다는
차라리 지구의의 남극에 생활을 박아라
고난이 풍선같이 바람에 불리거든
너의 힘을 알리는 신호인 줄 알아라

지구의의 남극에는 검은 쇠꼭지가 심겨 있는지라―
무르익은 사랑을 돌리어보듯이
북극이 망가진 지구의를 돌려라

쇠꼭지보다도 허망한 생활이 균형을 잃을 때
명정(酩酊)한 정신이 명정을 찾듯이
너는 비로소 너를 찾고 웃어라
(1956)

(2) <꽃 2>

꽃은 과거와 또 과거를 향하여
피어나는 것
나는 결코 그의 종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설움의 귀결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설움이 없기 때문에 꽃은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은
완전한 허공을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단과 계속과 해학이 일치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
견고한 꽃이
허공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
(1956)

(3) <자[針尺]>

가벼운 무게가 하늘을 생각하게 하는
자의 우아는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재어볼 수 있는 마음은
아무것도 재지 못할 마음

삶에 지친 자여
자를 보라
너의 무게를 알 것이다.
(1956)

길었던 수영의 시, 언제부터 짧아졌을까

시인 김수영. 이미지는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전집>에 실린 것임을 밝힙니다.
 시인 김수영. 이미지는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전집>에 실린 것임을 밝힙니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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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地球儀)> <꽃 2> <자(針尺)>들은 시 말미에 '1956'이 박힌 시들 중 마지막 세 작품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3연으로 돼 있습니다. 또이들 작품은 전체 행 수가 10행 내외로 짧은 편입니다. <지구의>가 10행, <꽃 2>는 13행, 그리고 마지막 <자>는 9행입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나온 수영의 시는 대체적으로 길었습니다. 그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달나라의 장난>(1953)은 42행이나 되는 단연시(單聯詩)입니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같은 작품은 전체 14연에 91행으로 돼 있습니다. 본격적인 장시로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짧은 작품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1954년의 <시골 선물>이나 <도취의 피안> 같은 작품들도 20행을 훌쩍 넘길뿐더러, 문장들이 길게 이어지는 복합문으로 돼 있습니다. 단문(短文)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느낌이 더 강한 셈이지요.

이런 점만을 놓고 보면 수영은 원래부터 긴 시를 꽤 좋아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수영은 1961년 6월 14일에 쓴 시작(詩作) 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장시(長詩) 같은 것은 써보려고 한 일도 없다. 시는 되도록 짧을수록 좋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고, 장시를 써낼 만한 역량도 제재도 없다. 장시를 쓸 바에야 희곡을 쓰고 싶다."(<김수영 전집2> '산문' 289쪽 중)

첫머리에 등장하는, "장시 같은 것은 써보려고 한 일도 없다"와 같은 진술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당시의 다른 여느 시인들에 비해 결코 짧다고만은 할 수 없는 시들을 많이 써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수영의 생각이 위 글이 쓰인 1961년 당시에 생겨난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힘듦을 말하고 있지만, 어둡지는 않은 시

우리에게는 이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증거물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비교적 확실한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수영의 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영의 시가 짧아지는 대략의 시점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제가 볼 때 그 기점은 1950년대 중반쯤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위의 세 작품 직전에 나온 작품 중, 수영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병풍>과 <눈>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이중 <병풍>은 수영이 자신의 작품 중 진정한 현대시의 출발로 보고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이들 세 작품은 모두 '생활'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심상찮습니다. <지구의>에서는 "쇠꼭지보다도 허망한 생활"(3연 1행)이 펼쳐집니다. <꽃 2>의 화자는 "어지러운 가지"(3연 2행), 혹은 "허공의 말단"(3연 5행)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고 있습니다. 현실에 치인 채로 살아가는 화자가 '꽃'으로 상징되는 어떤 삶의 절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그려지시는지요.

이와 같은 화자의 모습은 <자>에서 조금 더 직설적으로 드러납니다. 화자가 "삶에 지친 자여 / 자를 보라 / 너의 무게를 알 것이다"(3연)라고 말할 때, 그의 가슴은 "가벼운 무게"(1연 1행)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을는지요. 그 피할 수 없는 삶이 주는 엄청난 무게를 벗어던진 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작품들은 그렇게 '생활'과 '삶'의 힘듦을 말하면서도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오히려 밝고 긍정적입니다. 그런 상황을 즐기면서 거뜬히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듯한 짧은 경구들, 예컨대 "명정(酩酊)한 정신이 명정을 찾듯이 / 너는 비로소 너를 찾고 웃어라"(<지구의>의 3연 2·3행)나 "삶에 지친 자여 / 자를 보라" 같은 구절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즈음의 시들이 점점 더 짧아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되지 않을는지요. 수영은 차츰 안정돼가는 생활 속에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돌아봤을 것입니다. 수영이 1966년에 쓴 <생활의 극복 - 담뱃갑의 메모>라는 산문의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담뱃갑 메모에 적힌 수영의 몸부림

"벌써 오랜 옛날에, 나의 머릿속의 담배에 오랫동안 적어놓은 일이 있던 공자인가 맹자인가의 글의 한 구절이 또 생각이 난다. 이런 뜻의 유명한 처세훈이다.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 욕심을 제거하려는 연습은 긍정의 연습이다."(<김수영 전집2> '산문' 61쪽)

담뱃갑의 메모를 통해서조차 생활의 욕심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수영의 모습이 그려지시는지요. 인용문을 보면 수영이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면서도 긍정하려는 몸짓 같은 게 보입니다. 자신의 삶과 문학을 부단히 갱신하고 싶어하는 몸부림도 보입니다.

그런 간절한 몸부림이 있었기에 이 시기 수영의 시가 점점 짧아지고 단순해지지 않았을는지요.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는 장황함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는 다른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돌아보는 마당에 중언부언 잔소리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과정에서 수영의 내면이 갈수록 강철처럼 단단해졌을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수영, #<지구의>, #<꽃 2>, #<자[針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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